소설리스트

현질 전사-178화 (178/297)

# 178

현질 전사

-8권 4화

솔직히 딱히 뭔가 사야겠다 싶어서 온 게 아니라 그냥 돈지랄이 하고 싶어서 막연히 발길을 한 거였다.

그래서 당황해 퍼뜩 말을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 곁에 있는 엔트로피의 존재를 깨닫고 말했다.

"아! 그...... 여, 여동생 옷을 좀 사려고요."

말을 해 놓고 정대식은 아차 했다.

엔트로피의 용모는 외국인에 더 가까웠고 정대식과는 어떻게 봐도 전혀 닮지 않았다.

혈연관계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로, 그냥 아는 여동생이라고 해도 수상쩍었다.

엔트로피의 나이가 어리니 자칫 잘못하면 상황이 요상하게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쇼핑 메이트들은 노련했다.

그들은 어떤 의문이나 당혹감도 드러내지 않은 채 말했다.

"아, 여동생 분의 옷을 보러 오셨다고요?"

"아주 귀여운 여동생이니 무엇을 입혀도 잘 어울릴 겁니다. 그럼 프라이빗 쇼룸에서 셀렉하시겠습니까?"

"뭐, 뭐라고요?"

정대식은 난생 처음 듣는 용어에 당혹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철저한 서비스 정신을 발휘했다.

"오직 특별 고객을 위해 마련된 장소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다과와 함께 기다려 주시면 저희가 여동생 분께 어울릴 만한 상품을 가져다 보여 드릴 겁니다."

"만약 프라이빗 룸이 싫으시다면 직접 매장을 둘러보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대식 님이 워낙에 유명 인사시다 보니, 다소 소란스러울 수도 있는 고로......."

남자 직원이 하는 말에 정대식은 어느새 사람들이 그들을 둘러싼 채로 힐끔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를 알아보고 군중이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정대식은 헉, 하는 기분에 서둘러 말했다.

"그 프라이빗 룸인지 뭔지 하는 데로 가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자 여자 직원이 앞장섰다.

"이쪽으로 와 주시겠습니까?"

정대식은 그들을 따라 별도로 마련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 * *

프라이빗 룸은 정갈하게 꾸며진 드레스 룸 같은 장소였다.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노라니 마실 것과 함께 여자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과자와 과일이 나왔고, 곧 쇼핑 메이트들이 취향을 물어왔다.

어차피 엔트로피 입힐 거라 대충 대답을 하니까 최신상부터 보여 주겠다며, 엔트로피만 한 나이 대의 아이들이 입을 법한 알록달록한 옷가지를 행거에 쫙 걸어 가져왔다.

엔트로피가 개중에 마음에 드는 것을 몇 가지 골라 탈의실로 사라졌고, 정대식은 음료와 과자를 집어먹으며 엔트로피가 다시 나오길 기다렸다.

잠시 후, 핑크색 원피스를 입은 엔트로피가 머리띠에 하얀 양말을 신고 구두까지 장착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외양이 그럴싸하니만큼 그렇게 차려 놓으니까 제법 깜찍했다.

"와, 예쁜데?"

정대식이 무심결에 한 말에 엔트로피는 우물쭈물했다.

정대식이 그게 마음에 드냐고 묻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몇 벌 더 입어 보라 말을 하자 냉큼 옷을 몇 개 더 집어 탈의실로 사라졌다.

곧 쇼핑 메이트가 그 옷에 어울릴 법한 액세서리며 가방, 구두 등을 가지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진짜 여동생이라도 생긴 것 같은 희한한 기분이 들었다.

'가족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정대식은 부모님을 잃기 전엔 외아들이었으나 철없던 시절에 동생을 낳아 달라고 조르던 때도 있었다.

같이 놀 친구가 필요하다고 떼를 썼던 기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러자 입맛이 씁쓸해져 와, 정대식은 억지로 생각을 바꿨다.

'그래, 뭐. 엔트로피를 여동생인 셈 치지, 뭐. 내 마력으로 이루어진 내 분신 같은 존재이니 여동생이라 해도 무리가 없잖아? 여동생치고는 좀 싸가지가 없긴 한데. 원래 남매들끼리는 서로를 싸가지 없다고 여기는 법이라니까.'

엔트로피는 이번엔 하늘색의 줄무늬 원피스를 입고 나왔다.

하얀 리본을 매고 있으니까 그건 그것대로 어울려서, 정대식은 이번에도 예쁘다고 칭찬해 주고 덩달아 신이 나 이것저것 옷을 골라 주었다.

엔트로피가 인형 같은 옷만 고집을 해서 좀 실용적인 티셔츠나 바지 같은 것도 몇 벌 고르고 속옷이나 외투, 모자, 신발, 양말과 가방 따위도 잔뜩 샀다.

솔직히 엔트로피에게 그런 게 뭐가 필요하겠느냐마는, 오늘은 어차피 돈지랄을 하러 왔으니까 싶어서 좀 괜찮아 보인다 싶은 것은 몽땅 담아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친 김에 자신의 옷도 몇 벌이나 고르고 값비싼 명품 시계와 구두, 벨트 같은 것도 장만했다.

그렇게 반나절을 백화점에서 노닥거리다 보니 무려 3억 가까이를 탕진했다.

1억에 준하는 시계를 고른 탓이 크기는 하지만 어찌 되었든 거금을 쓴 셈이었다.

순식간에 VIP 중 최고 등급이라는 프레스티지로 뛰어오른 정대식은 프라이빗 룸에서 식사까지 대접받고 백화점을 나섰다.

상품은 전부 집으로 배달해 준다고 해, 발걸음도 가볍게 코앞까지 대령해 주는 차에 올라탔다.

그러고 나니까 수수한 차가 눈에 밟혀 곧장 외제차 매장이 즐비한 거리로 갔다.

그곳에서 매장에 전시된 벤츠 최신형을 현금 박치기로 구입했다.

그리고 타고 온 차는 나중에 타이탄 공격대 주차장으로 보내 달라 부탁한 뒤, 임시 번호판이 붙은 벤츠를 몰아 거리를 내달렸다.

신나게 드라이브를 하고 났더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정대식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길가에 차를 세워 놓고 잠시 감상에 잠겼다.

그러나 본디 그리 감상적인 성격이 아니라서 금세 집어치우고 밥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엔트로피, 근처에 어디 럭셔리한 레스토랑 같은 데 없어? 돈 쓰는 김에 칼질 좀 해야겠다."

<500m 거리에 호텔 레스토랑이 있습니다.>

"그래? 그럼 그곳으로 가자."

정대식은 호텔 스카이라운지에 자리해 있는 레스토랑으로 갔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는데 누가 봐도 영락없는 꼬맹이인 엔트로피를 데리고 가려니 좀 김이 샜다.

정대식은 야경이 기가 막힌 창가 자리에 앉아서 투덜거렸다.

"쳇, 이런 데는 근사한 여자랑 같이 와야 하는데."

그 말에 엔트로피가 눈을 뾰족하게 떴다.

<칼질이라면 저도 할 수 있습니다만.>

"어, 너 뭐 먹을 수 있어?"

<있습니다. 인간처럼 소화, 흡수하지는 못해도 분해시켜 없애는 건 가능합니다.>

"됐다, 돈 아깝다. 오늘 옷 그만큼 사 준 걸로 됐잖아? 혼자 있고 싶으니까 이제 그만 들어가 봐."

엔트로피는 앉았던 자리에서 슉 하고 사라졌다.

그러자 주문을 받으러 다가오던 직원이 깜짝 놀라 제자리에 멈춰 섰다.

정대식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설프게 웃으며 설명했다.

"아, 진짜 사람이 아니거든요. 가짜예요, 가짜. 제가 헌터인지라."

그 말에 주춤거리며 다가온 직원이 정대식을 살피다 말했다.

"헌터시라면...... 혹시 정대식 씨?"

"네, 제가 정대식입니다."

오늘 하루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는 데 꽤나 익숙해져 정대식은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게 대꾸했다.

그러자 직원이 만나 뵙게 되어 반갑다며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

정대식은 거드름을 피우며 주문을 했고, 잠시 후에 지배인과 셰프가 함께 나와서 인사를 했다.

"이렇게 귀한 분이 저희 레스토랑을 찾아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아닙니다. 그냥 지나는 길에 밥이나 먹을까 하고 들렀습니다, 하하."

"실례가 안 된다면 기념사진을 남기고 싶은데요. 괜찮겠습니까? 대신에 식사는 저희가 서비스해 드리겠습니다."

"아, 그렇다면야. 얼마든지요."

정대식은 기념사진을 찍었고 지배인은 곧 최고급 와인을 가져다주었다.

그걸 홀짝거리고 있노라니 애피타이저부터 풀코스 프랑스 전문 요리가 하나씩 날라져 왔다.

솔직히 말해 별맛은 없었으나 정대식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고상하게 식사했다.

드디어 스테이크가 나와서 고기 맛을 좀 보나 싶었던 그때.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대식이 뭔가 싶어 고개를 들어 올리자, 레스토랑 저 끄트머리에서 아는 얼굴이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영은하?'

엄밀히 말해서 그녀를 아는 것은 아니었으나, 워낙에 요즘 뜨고 있는 대세 아이돌인지라 마치 아는 사람처럼 얼굴이 낯익었다.

자신의 팬이라고 사방팔방 떠들고 다닌다 하니 더 그랬다.

정대식은 썰어 놓은 스테이크를 먹으려고 입을 앙 벌린 채로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쪽으로 사뿐사뿐 걸어오는데 머리가 진짜 주먹만 했다.

'우와, 이쁘다! 역시 연예인이 다르긴 다르구나.'

최희나 최선도 대단한 미인이기는 하지만 뭐랄까, 영은하에게는 연예인만의 포스가 있었다.

반짝반짝 빛이 난다고 해야 하나?

아직 나이도 겨우 스물이니만큼 젊고 싱그럽고 상큼했다.

그녀는 입을 다물고 그대로 포크를 내려놓는 정대식의 앞에 다가와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으고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정대식 씨?"

"예, 영은하......씨죠?"

정대식이 알아보는 말에 영은하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는 손끝을 가늘게 떨며 힘겹게 말을 이어 나갔다.

"어머, 어떡해. 절, 절 알아보시네요?"

"요즘 영은하 씨 모르면 간첩이죠."

그 말에 영은하가 살짝 웃어 보이는데 애간장이 다 녹는 듯했다.

정말이지 요정처럼 예쁜 여자아이였다.

"제가 방해가 안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아닙니다. 방해가 되기는요. 그렇잖아도 기회가 닿으면 한 번 만나 뵙고 싶었던 참인데."

거기까지 말하고 정대식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괜찮으시면 잠시 앉으시죠."

"그래도 돼요?"

"물론입니다."

영은하는 조심스레 맞은편 자리에 앉았고 곧 직원이 와인글라스를 하나 더 갖다 주어 정대식이 그녀에게 와인을 따라 주었다.

그녀는 샛별 같은 눈동자로 정대식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늦었지만 저희 할머니를 도와주신 것을 감사드려요."

"인사라면 벌써 충분히 받았습니다."

"저희 가족에겐 정말 은인이세요."

"제가 아니라도 누구나 그 상황에서는 그렇게 행동했을 겁니다."

정대식이 하는 말에 입술을 잠시 깨문 영은하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저...... 그 일 이후로 줄곧 정대식 씨를 지켜봐 왔어요. 정대식 씨가 놀랍도록 강해지는 것을 보면서 팬이 되어 버렸지 뭐예요."

"하하, 이것 참. 영광입니다."

"실은, 오늘도 정대식 씨를 만나 뵙고 싶어서 일부러 이 레스토랑에 온 거예요."

"그래요? 제가 여기 있는 것은 어떻게 알고."

"제가 이 레스토랑에 자주 들르는 편이라서요. 여기 매니저 분이 제가 팬인 걸 알고 연락을 해 주셨어요."

"아, 그랬군요. 어쩐지. 갑자기 영은하 씨와 마주쳐서 이게 웬일인가 했습니다."

"약속도 없이 나타나서 죄송해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대식 씨를 뵐 일이 없을 것 같아서요. 워낙에 바쁜 분이시니......."

"바쁘긴요. 간혹 바쁘기는 합니다만, 오늘과 같이 제 생활을 즐길 때도 있답니다."

워낙에 예쁜 아이를 눈앞에 두고 있어서 그런가, 혀가 매우 매끄럽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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