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
현질 전사
-8권 5화
정대식이 들뜬 기분으로 하는 말에 영은하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그럼, 저...... 연락처를 받을 수 있을까요?"
"제 전화번호요?"
"네, 가끔 이렇게 만나 뵐 수 있을까 하고요."
오늘 하루 내내 최고의 대접을 받으며 구름 위에 뜬 기분을 만끽했으나, 진짜배기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었다.
수십만 팬을 거느린 스타가 정대식의 팬을 자처하며 연락처를 물어온 것이다.
정대식은 꿈이라도 꾸는 듯 믿기지 않는 기분으로 영은하와 연락처를 교환했다.
그러자 영은하가 정말 고맙다고 말하며 꽃같이 웃어 보였다.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제가 스케줄이 남아 있어서요.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아, 그렇군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네, 시간 되실 때 언제...... 꼭, 꼭 연락 주세요. 제가 식사 한 번 대접할게요."
정대식은 차가 있는 곳까지 영은하를 배웅했다.
그녀와 대화하느라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했지만 안 먹어도 배가 불렀다.
정대식은 흐뭇한 기분으로 자신의 차로 돌아가며 생각했다.
'이래서 사람은 유명하고 볼 일이야! 그 영은하와 연락처를 주고받다니, 이게 꿈이야, 생시야?'
콧노래를 부르면서 집으로 돌아가던 그때까지만 해도, 정대식은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만족스러웠던 오늘 하루를 곱씹으며 앞으로도 종종 이런 날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Chapter 45. 스캔들
다음 날 아침.
딩동! 딩동! 딩동!
요란하게 벨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에 어렴풋이 잠이 깼는데, 곧이어 쾅쾅,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부대장님! 대장님!"
정대식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정신이 번쩍 든 것이다.
그는 팬티 바람으로 현관으로 뛰쳐나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얼굴이 상기된 이재우가 흥분해 말했다.
"이거, 이거 사실이에요?"
"뭐가?"
영문을 몰라 하는 정대식에게 이재우는 휴대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이거 사실 아니에요?"
정대식은 자다 일어나 침침한 눈을 한껏 찌푸렸다.
그러자 웬 기사가 하나 떠 있는 게 보였다.
"......이게 뭐야? 이거, 나랑 영은하?"
그 기사에는 정대식과 영은하가 레스토랑에 나란히 앉아 있는 광경이 적나라하게 찍혀 있었다.
정대식의 얼굴에 모자이크가 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쉬이 알아봄 직했다.
아마도 정대식이 연예인이 아니라서 그런 모양인데, 그의 유명세를 생각해 보면 별 의미 없는 짓이었다.
이재우는 흥분해 말했다.
"정말 영은하랑 사귀시는 겁니까?"
"엥? 갑자기 웬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지금 부대장님과 영은하가 스캔들이 터졌다고요! 지금 온라인에서 완전 난리예요!"
"그게 진짜야? 엔트로피!"
정대식은 엔트로피를 불러내 질문했다.
"이게 사실이냐? 나랑 영은하랑 스캔들이라고?"
<사실입니다. 현 주요 포털 메인 최고 클릭 수 기사가 바로 정대식 님과 영은하 씨의 열애설입니다.>
"허 참, 말도 안 되는......."
"그럼 이 사진은 뭡니까?"
이재우가 추궁하듯이 묻는 말에 정대식은 저도 모르게 말했다.
"어제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마주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눴을 뿐이야. 엄밀히 말해서 우연히 마주친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열애설이라니, 말도 안 돼. 우린 어제 처음 얼굴 본 사이라고?"
이재우는 묘하게 안심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푸쉬쉬 내쉬었다.
"역시 그렇죠?"
"그건 무슨 뜻이냐?"
정대식이 흰 눈을 뜨고 묻는 말에 이재우는 너스레를 떨었다.
"아하하, 그냥 부대장님이 저희들을 훈련시키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신데 연애할 틈이 어디 있었겠나 싶어서요. 아닐 거라 생각했어요."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난다고. 황당한 노릇이군."
"아니 땐 굴뚝은 아니죠. 영은하가 평소에도 부대장님 팬이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으니까요."
"그래도 그렇지. 잠깐 얼굴 본 걸로 열애설이라니. 오바가 심하잖아?"
정대식은 혀를 쯧, 하고 차면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은근슬쩍 따라 들어온 이재우가 여러 기사들을 클릭해 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괜찮으시겠어요?"
"뭐가?"
"지금 백만 안티 양성 중이신데...... 영은하 팬덤이 무섭기로 유명하거든요. 거기 각성자들도 많아요. 트리니티 팬클럽이라고."
"얼씨구."
"음, 그래도 부대장님 편드는 댓글도 많네요. 사실을 놓고 보면 부대장님이 더 아깝다고요. 일개 아이돌 출신 연예인과는 비교가 안 된다는 거죠. 완전 난리 났는데요?"
이재우는 남의 일이라고 완전히 신이 났다.
정대식은 휴가 중임에도 아침부터 고작 이 말을 하려고 들이닥쳤느냐면서 이재우를 나무랐다.
그러나 이재우는 휴가에 어디 가지도 않고 사택에 머물러 있으니 심심하실까 봐 그랬다고 능청을 떨었다.
"제가 아침 식사라도 대령하겠습니다! 오믈렛 괜찮으세요?"
"너, 그런 것도 만들 줄 아냐?"
"제가 이래 뵈도 자취 경력이 어언...... 달걀은 있으시죠?"
"없는데?"
"그런 것도 없어요?"
이재우는 텅텅 빈 냉장고를 보고 한숨을 쉬며 자기 집으로 가서 만들어 오겠다고 말했다.
잠시 이재우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샤워를 한 정대식은 휴대폰에 메시지가 들어와 있는 것을 보았다.
-오늘 잠시 만나.
당돌하게 만남을 요구하는 메시지는 다름 아닌 최희가 보낸 거였다.
말투로 보나, 보낸 연락처를 보나, 오늘은 김태희가 아닌 최희로서 만나고자 하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아침부터 스캔들 터졌다는 소리를 들어서 그런가? 예감이 안 좋은데.'
정대식은 핑계를 대고 피할까 하다가 어차피 같은 부대라 계속 피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답장을 보냈다.
약속 장소를 잡아 놓기가 무섭게 이재우가 오믈렛 두 개를 만들어 가지고 왔다.
놀랍게도 그것은 모양도 예쁘고 맛도 좋았다.
진짜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정대식은 말했다.
"너, 안 되는 그림 술사 때려치우고 요리사로 전업하는 게 어떠냐?"
"에에이~ 요새 제 실력이 얼마나 일취월장했는데요. 보여 드릴까요?"
최근 이재우는 정대식이 붙여 준 그림 선생 밑에서 열심히 배우는 중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난번 브세슬라브 공략 때도 만들어 낸 구현체가 꽤 그럴싸해 보였다.
정대식은 실력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이재우를 만류하고 말했다.
"조금 있다 나가 봐야 할 것 같으니 네 실력은 다음에 구경하지."
"약속 있으세요? 누구랑? 어디로 가시는데요?"
"그건 네 알 바 아니고."
"설마 영은하랑 만나는 건 아니시죠?"
"아니야."
"그럼 누구 다른 여자랑......?"
"네 알 바 아니라니까!"
정대식은 이재우를 쫓아내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 뒤 새 차 키를 챙겨 들고 차에 올랐다.
그러자 실체화해 마찬가지로 새로 산 원피스로 차려입은 엔트로피가 냉큼 조수석에 올라탔다.
정대식은 핸들을 꺾으며 그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넌 이만 돌아가지 그러냐?"
<제가 곁에 있어서 안 될 이유라도?>
"그런 건 아니지만 상대방한테 실례잖아? 나랑 만나려는 거지 너랑 만나려는 게 아니니까."
<어차피 정대식 님이 겪는 모든 일은 제가 알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정대식 님의 분신과 마찬가지. 함께한다 하더라도 별 차이 없을 텐데요?>
"상대방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걸? 이만 돌아가."
엔트로피는 놀랍게도 새로 산 원피스를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새 옷을 산 김에 실체화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렇다 보니 괜히 미안해서 정대식은 말했다.
"내 8km 반경까지는 네가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으니까. 약속 장소에 도착하면 알아서 해."
<알겠습니다.>
정대식은 오래지 않아 시외에 자리해 있는 호젓한 커피숍으로 향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기에 매장은 한산했다.
정대식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한쪽 구석에 선글라스를 끼고 앉아 있는 최희를 발견했다.
"여기."
평소에도 미인이라 생각하기는 했지만, 김태희로 있는 모습을 오래 봐서 그런지 오늘 따라 더 근사해 보이는 것 같았다.
어제의 영은하가 예쁘다면 최희는 그야말로 아름다웠다.
몸매를 드러내는 검은 원피스 한 장만 달랑 입고 있는데도 그 미모가 갖는 힘이 대단했다.
정대식은 그녀와 마주 앉기도 전에 압도당하는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먼저 와 있었군. 오래 기다렸나?"
부대원인 김태희로 대하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이제는 자연스레 반말이 나왔다.
최희는 그 사실을 신경 쓰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나도 금방 도착했어. 자리에 앉지?"
맞은편에 앉아서 정대식은 질문을 던졌다.
"오늘은 왜 날 보자고 했지?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중요한 일이 될지, 안 될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지만...... 일단은 말을 해 두어야 할 것 같아서."
"무슨 말?"
"광필두가 조만간 미국으로 갈 거야."
정대식은 광필두의 이름이 나오자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광필두가 미국엔 무슨 볼일로?"
잠시 후 정대식은 생각에 잠겨 말했다.
"아니, 미국이야 업무 차든, 휴양 차든 갈 수 있지. 근데 그걸 내게 말하는 이유는......."
"그래. 광필두가 미국으로 가는 건 7성 무구를 모으기 위해서다. 광필두가 팔머 가와 접촉했다는 첩보가 있었어."
"정말이야?"
아직 엔트로피로부터 전해 들은 바가 없기에 정대식은 놀라서 물었다.
그러자 최희가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누구에게도 자신의 행적이 들키지 않도록 은밀히 연락을 주고받았던 모양이더군. 아무래도 7성 무구를 하나 더 모으려 한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여러모로 입장이 난처하다 보니 그랬을 거야."
"당신도 광필두가 7성 무구를 다 모으는 것을 반대하는 입장인가 보지?"
최희는 어깨를 으쓱했다.
"누구든 우려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7성 무구가 다 모으면 전에 없는 강력한 무구가 탄생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 하지만 광필두가 그걸 다 모아서 뭘 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잖아? 그의 목적이 분명해지기 전까지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수밖에는 없어."
"그래도 당신은 세계 최강의 헌터잖아? 게다가 SSS급 무구인 호라갈레스를 갖고 있고. 설령 광필두가 G급 무구를 획득한다 하더라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 거 아닌가?"
최희는 피식 웃었다.
"날 그렇게 높이 평가해 준다니 고맙기는 한데. 세계 최강이라는 입장은 유리한 점보다는 불리한 점이 더 많지. 내가 얼마만큼 강한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것도 개중 하나이고."
최희는 정대식이 무어라 말을 하기 전에 재빨리 말을 이었다.
"만약에 광필두가 정말로 7성 무구를 완성시킨다면 얼마나 강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야. 나보다 더 강해지지 말라는 보장이 없지. 게다가 광필두가 7성 무구를 모으기 시작한 이후, 신경 쓰이는 점이 있어서 그에 대해 조사를 좀 해 보았는데...... 미심쩍은 부분이 많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