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 전사-182화 (182/297)

# 182

현질 전사

-8권 8화

<광필두가 자신의 흔적을 지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자식은 도대체 왜 그래? 더 수상해 보이잖아!"

정대식은 괜히 큰 소릴 냈다.

사실 그는 광필두의 대항마로 점 찍히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광필두 같은 놈과 얽혀서 좋을 일이 뭐가 있다는 말인가?

정대식은 눈앞에 닥친 돈 문제뿐만 아니라 최후의 몬스터 브레이크에 대한 염려만으로도 골치가 아팠다.

거기에 더해서 광필두와 같은 문젯거리를 떠안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주변에서 이렇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기어이 미국에 있는 7성 무구까지 사들이려는 것을 보면, 단순히 수집욕이 있다고 보기에는 어렵겠지?"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있는 편이 좋겠지요.>

"어쨌든 제이드 팔머가 그걸 광필두에게 안 팔았으면 좋겠군."

<판매 의사가 없다면 광필두를 자선 경매에 초청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이미 거래가 성사된 것과 진배없다는 말이냐?"

<제 짐작이나 대중과 전문가의 견해를 봐서는 그렇습니다.>

"골치 아프군...... 장한나가 나에게 마기전을 사 주려는 것도 꿍꿍이가 있는 거야. 아마 나를 보내 광필두의 속을 떠보려는 것이겠지."

<정대식 님이 자선 경매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광필두에게는 충분한 압박이 될 겁니다. 세계 유일의 능력자가 7성 무구의 거래 현장에 나타나는 것은 경고의 메시지로밖에는 해석할 수 없지요.>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보이는 게 싫다는 거지. 난 광필두랑은 아무런 개인적인 원한도 없는데 왜 굳이 껄끄러운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광필두가 7성 무구를 다 모으게 된다면 그를 견제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오로지 정대식 님뿐일 겁니다.>

"어휴, 됐다, 됐어. 최 씨네에 거의 다 왔으니까 이제 돌아가 봐."

정대식은 엔트로피의 실체화를 해제하고 차를 대 저택의 입구에 세웠다.

그가 왔음을 알아차린 것인지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자동적으로 문이 열렸다.

차를 몰아 안으로 들어간 정대식은 정원 입구 적당한 데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저택 쪽으로 발길을 하니 현관 앞에 최선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최선 씨. 오랜만입니다."

"네, 오랜만이네요."

최희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최선의 얼굴은 다소 딱딱했다.

정대식은 미묘한 아쉬움을 느끼며 그녀를 보고 말했다.

"최희 씨가 연락을 안 받아서 찾아왔습니다만. 그녀는 어디 있습니까?"

"언니는 아무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아요."

"그럼 여기에 있기는 한 거죠?"

"제가 한 말을 언니에게 그대로 전하셨더군요."

최선이 하는 말에 정대식은 멈칫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뒤통수를 긁적이고 말했다.

"작정하고 한 말은 아니고...... 대화를 하다 보니 어쩌다 나온 겁니다."

최선은 싸늘하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는 거죠?"

"영은하 씨하고 스캔들이 난 걸로 최희 씨가 화가 나서......."

스캔들이라는 말을 듣고 최선의 낯빛이 변했다.

그녀는 당혹하다 주저하는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언니가...... 화를 냈나요?"

"예, 그랬다고 볼 수 있겠죠."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정대식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봤다.

그러자 최희가 무슨 소릴 하면서 화를 냈는지 깨달은 최선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언니가 이상한 소릴 한 모양이네요."

"제가 최선 씨를 놔두고 영은하 씨와 만난다고 불같이 화를 내어, 변명 아닌 변명을 하다 보니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가 그렇게 됐습니다."

"죄, 죄송해요."

"아닙니다. 최선 씨가 사과할 일은 아니죠. 최선 씨가 한 말을 전한 것은 제 불찰입니다. 아마도 최희 씨가 뭔가를 오해하고 있다 보니......."

정대식이 계속 말하기가 껄끄러워 말을 흐리자, 최선이 윗입술로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언니는, 제가 정대식 씨를 좋아......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예, 그런 것 같더군요. 최선 씨는 최희 씨가 절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정대식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말하고 보니 자신의 꼴이 정말이지 웃겼다.

당사자들은 그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부정하면서, 정대식을 서로에게 떠미는 꼴이다.

이리저리 던져지는 공 신세가 된 정대식은 솔직한 기분을 말했다.

"까놓고 말해서 두 분이 절 두고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최희 씨도 최선 씨도, 두말할 필요 없이 아름다운 분들이라 호감을 가진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두 분 다 저를 거절하고 계시니, 그냥 이 문제는 없었던 걸로 하죠. 그리고 두 번 다시 이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것으로 하면 간단한 문제가......."

그때였다.

별안간 정대식이 하는 말을 자르고 들어온 최선이 폭탄을 던졌다.

"없었던 걸로 할 수는 없어요."

"예?"

"사실이니까요."

"뭐가요?"

"저도 언니도, 정대식 씨를 좋아하고 있으니까요."

정대식은 머리를 한 대 돌로 맞은 것처럼 벙쪘다.

최희는 불과 어제 자신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성을 내다가 뺨을 치고 갔고, 최선은 정대식의 식사 요청을 언니 핑계를 대며 정중히 거절을 했었다.

그런데 둘 다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니?

이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린지?

정대식은 얼이 나가서 아무 말을 못했다.

그러자 얼굴을 화르륵 붉힌 최선이 도망치듯 뒷걸음질하며 말했다.

"오늘은 그냥 돌아가 주세요. 저도 언니도, 정대식 씨를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요. 죄송합니다."

탕!

코앞에서 문이 닫히고, 정대식은 그 소리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혼자 남겨진 것을 알고 주춤주춤 물러나 몸을 돌렸다.

잘 꾸며진 정원을 가로질러 나오면서, 정대식은 천천히 침착함을 되찾았다.

다시금 차에 오를 때쯤에는 평소 같은 기분을 회복할 수가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최 씨 자매의 행각이 이해가 가는 것은 아니었다.

'나를 좋아한다고? 둘 다 나를 좋아한다는 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의문하며 정대식은 차를 몰아 저택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길을 달리다가 문득 룸미러를 봤다.

한데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이 헤벌쭉하게 풀어져 있었다.

정대식은 민망한 기분에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을 했다.

'이거 참, 큰일이네.'

솔직히 두 여자가 어쩌다 자신을 좋아하게 됐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대놓고 고백을 들었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상황이라 진짜인지 믿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별개의 매력을 지닌 아리따운 자매가 동시에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을 하니, 가슴이 설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대식은 주책맞은 스스로를 나무라며 씰룩거리는 입술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좋아할 만한 일은 아니지. 자매가 동시에 날 좋아한다니! 어떻게 보면 이거, 비극 아냐? 나 때문에 그 사이좋은 자매가 의라도 상하면 어떡하지? 만약에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요구해 온다면, 난 누굴 택해야 하나?'

정대식은 생전 해 본 적 없는 사치스런 고민 속에서 탄식했다.

'아, 잘난 남자는 괴롭다니까. 이렇게 죄가 많아서야, 죽어서 천국 가기는 틀렸구나!'

Chapter 46. 출국

난감한 고민을 떠안은 채로 정대식은 하와이 임무를 위해 미국으로 떠나게 됐다.

출발하는 당일 날, 타이탄 공격대 본사 건물 로비로 출국할 인원이 전부 모였다.

정대식은 '하와이 파견대'로 명명되어진 이 부대의 책임자로서 대장 직위를 도맡게 되었다.

파견대의 구성원은 펜리르 부대와 외인부대, 지원 2팀, 그리고 몬스터 조사 팀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강영후와 간단한 위임식을 치르고 정대식은 파견대와 함께 비행장으로 향했다.

대절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길에 정대식은 멀찌감치 앉은 김태희를 곁눈질했다.

그녀는 평소와 한 치 다름없이 김태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태연하기 짝이 없는 기색에 정대식은 역시 최선이 무언가를 잘못 알고 말한 게 아닌가 싶었다.

'최희의 속마음이 어찌 되었건 내게 직접 말을 한 것도 아니니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최희가 공과 사를 구분 못할 인물도 아니고. 지금 당장은 눈앞의 임무에 집중하는 편이 좋겠다.'

정대식은 쓸데없는 생각을 끊어 버리고 미군 부대 안에 있는 비행장에 당도했다.

미군 측에서 하와이 방어 부대로 가는 비행 편을 제공해 주기로 했던 것이다.

정대식은 파견대를 마중 나온 사람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세계 유일의 올인원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와이 방어 기지까지의 안내를 도맡은 토마스 리 앤더슨 대위라고 합니다. 앤더슨 대위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타이탄 공격대의 파견대 대장, 정대식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서번트인 엔트로피입니다.」

통역을 위해 엔트로피를 불러 놓았기에 정대식은 가장 먼저 그녀부터 소개시켰다.

복숭아색의 화사한 나들이용 원피스를 입고 에나멜 가방을 메고 있는 엔트로피의 모습이 군인과 헌터들 사이에서 상당히 이질적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앤더슨 대위가 「Oh!」하고 소리를 치며 놀라워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서번트인 것이로군요? 제가 본 것은 무시무시한 것들뿐이었는데, 정대식 님의 서번트는 흡사 인간 같군요. 대단한 능력이십니다.」

「명색이 올인원이니 이 정도는 해야죠.」

정대식은 곧이어 외인부대의 김시온과 지원 2팀의 팀장 범영우를 소개시켰다.

그리고 정부 관계자인 몬스터 조사 팀 팀장 한해수와 고문인 이정연 교수도 소개를 했다.

몬스터 도감 편찬 사업을 명목으로 하는 몬스터 조사 팀의 규모는 예전과는 달리 그 수가 제법 됐다.

팀장도 저번과는 다른 인물이었는데, 지난번 대대적인 구조 조정으로 크게 물갈이가 된 것 같았다.

단, 이정연과 그녀의 조수만은 그대로였다.

솔직히 성가신 것은 몬스터 조사 팀 자체라기보다는 이정연 한 사람이라서 정대식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앤더슨 대위와 악수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은근슬쩍 그 옆으로 다가온 김시온이 말을 걸어왔다.

"골칫덩이가 붙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군."

정대식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외인부대에게 몬스터 조사 팀을 떠넘긴 셈이 되어 죄송하군요."

김시온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나. 그보다, 이제는 내가 지휘를 받는 쪽인데 말을 편하게 하지 그래?"

"작전에 들어가면 그렇게 할 겁니다. 어차피 외인부대는 몬스터 조사 팀과 함께 별도로 움직일 거고요."

"알겠다. 그보다, 소강두가 네게 할 말이 있는 것 같군."

소강두는 두 사람에게서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힐끔힐끔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마 지난번 아스모데우스 건으로 인해 할 말이 있을 터였다.

김시온은 자리를 비켰고, 곧 슬그머니 다가온 소강두가 말을 걸어왔다.

"저기...... 지난번엔 미안했다."

"뭐가?"

정대식은 무심하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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