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
현질 전사
-8권 9화
"몬스터에게 넋이 나가 민폐를 끼친 것 말이야. 여태 구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도 못했으니까 말이야."
싱거운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소강두를 보고 정대식은 서슬 퍼런 표정을 했다.
"리칸트로피계 능력자가 이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민폐 수준이 아닌 거지. 몬스터로 전락하는 짓이나 다름없다!"
정대식의 일갈에 소강두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는 고개를 푹 수그렸고 정대식은 날카롭게 일침 했다.
"만약에 네가 내 부대원이었더라면 오래전에 방출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 이번 임무에서도 널 데리고 가도 될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소강두는 그 말을 듣고 정대식과 자신의 위계 차이를 확실히 깨달은 것 같았다.
그는 자세를 고치고 바로 서서 허리를 90도로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두 번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기회를 주십시오."
정대식은 싸늘하게 말했다.
"만약에 이번 임무에서도 그 같은 일이 발생한다면 공대장께 너와의 계약 해지를 심각하게 고려해 보라고 할 것이다. 외국에 나가서까지 외인부대를 책임지고 있는 부대장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으려면 정신을 단단히 차려라!"
"알겠습니다."
소강두는 얼굴이 벌게져 입술을 깨물었다.
한때는 자신보다 뒤에 들어온 후배였고, 동료였던 정대식에게 대놓고 꾸지람을 들었으니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이성을 잃어 부대원들 내지는 자신을 위험에 빠트렸으니 이 정도 경고는 약과였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하와이 파견대와 함께 실려 갈 화물을 점검하고 그것을 적재한 뒤, 앤더슨 대위가 앞장 서 비행기로 안내했다.
미군 측에서 제공하는 전용기는 스페셜 게스트를 실어 나르기 위함인지 내부가 매우 넓고 좌석도 비즈니스 클래스급으로 편안했다.
스튜어디스들의 도움을 받아 대원들이 제자리에 안착할 동안 정대식은 별도로 마련되어진 자리로 갔다.
비행 좌석이라기보다는 리무진처럼 멋들어지게 꾸며진 일등석에서 정대식은 미모의 스튜어디스에게 이런저런 주의 사항을 듣고 안전벨트를 맸다.
앤더슨 대위가 그의 건너편 자리에 앉았고 곧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더니 잠시 후 비행기가 이륙했다.
비행기가 안정된 고도에 들어서자 앤더슨 대위가 스튜어디스를 손짓해 샴페인을 가져오게 했다.
그것을 손수 따라 주며 그는 정대식과 건배를 하고 기대에 찬 눈으로 말했다.
「이번 작전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듣자 하니 최근에 위험 등급 수준의 던전을 공략하셨다고요? 브세슬라브라고 불리는 8성급 몬스터를 퇴치하셨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물론, 사실입니다. 그 정도 실력이 아니라면 이번 임무를 수락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듣자 하니 하와이 제도에 둥지를 튼 몬스터가 대단히 위험한 종류라고 하더군요.」
「그렇습니다. 시 서펜트라고 불리는 바다 괴수가 흘러 들어와 빅아일랜드 주변으로 다가가는 모든 선박을 침몰시키고 있으니 접근하기조차 쉽지 않습니다. 칼라와오와 마우이 해안가에는 카니발 옥토퍼스와 버진 크램이 득시글거리고, 내륙에는 워킹 머맨과 포그 세이렌이 버글거리죠. 가장 위험한 놈은 역시 빅아일랜드에 도사리고 있는 용암 거신입니다.」
「용암 거신이라고요?」
「저희들은 이놈을 헤르보르라고 부릅니다. 티르빙이라고 불리는 황금색의 장검을 갖고 있고 초대형종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여성형에 가까운 외양을 하고 있거든요. 첫 번째 몬스터 브레이크 때 나타난 거대괴수 중 한 마리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놈은 용암과 불을 제 몸처럼 다룹니다. 덕분에 헤르보르의 영역이 되어버린 킬라우에아 부근은 지옥이 따로 없죠.」
「그렇군요. 하지만 대항마를 갖추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MFP라고 부르죠. 그게 우리의 목숨을 살렸습니다. 앞으로 이게 인류의 가장 큰 무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든든하군요.」
「후훗, 아무리 그래도 올인원의 능력만 하겠어요?」
마지막 말은 앤더슨 대위가 한 말이 아니었다.
앞쪽에 드리웠던 커튼을 젖히며 어떤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강렬한 빨강 머리에 자극적인 몸매를 한 미인이었다.
그녀는 큼지막한 입을 벌리며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미소를 지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캐서린 엘리자베스 가렛이라고 해요. 리즈라고 불러주세요.」
「아, 예. 반갑습니다, 리즈. 그런데...... 소속이?」
「어머, 내 정신 좀 봐.」
그녀는 웃으면서 명함 한 장을 꺼내 건네주었다.
「전 PCC 소속의 캐스팅 매니저이자 각성자 협회 미국 지부장이에요. 얼마 전에 간접적으로 만나 뵌 적이 있죠. 미스 한이 제가 건네 드린 제안서를 가지고 찾아뵈었을 텐데요?」
「아, 그렇군요.」
정대식은 비로소 일이 어떻게 된 건지를 알 것 같았다.
미 정부에서 하와이 건으로 펜리르 부대를 콕 찍어서 요청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펜리르 부대의 실력을 신뢰한 탓도 있었겠지만, 그 이면에는 정대식을 끌어들이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던 것이다.
정대식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때 주신 제안서는 잘 보았습니다. 굉장한 조건이던데요?」
「아무리 파격적인 제안이라고 하더라도 당사자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의미 없는 거죠.」
「과분한 제의는 감사했습니다만, 한미란 씨를 통해 전달했듯이 당분간은 조국을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시겠죠.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금세 바뀔 수도 있는 거잖아요?」
「이미 거절을 했는데...... 예상치 못한 이런 만남은 좀 불편하군요.」
정대식이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하는 말에 리즈는 즉시 사과했다.
「사전에 아무런 언질도 없이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뵌 것은 죄송해요. 하지만 원치 않는 제의를 강요할 생각은 없어요. 저는 미 정부를 대신하여 귀한 발길을 해 주신 정대식 씨의 편의를 보살펴 드리려는 것뿐이에요. 물론, 그 과정에서 정대식 씨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게 무엇인지를 찾아낼 수는 있겠지요.」
리즈가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며 말을 하는데,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험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너털웃음을 흘리고 편의를 살펴 준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물었다.
그러자 리즈가 마기전 이야기를 꺼냈다.
「듣자 하니 팔머 가의 소장품에 볼일이 있으시다고요?」
「그렇습니다.」
「한국 정부의 요청이 있었어요. 정대식 씨가 자선 경매에 참여하여 제이드 팔머 씨를 만나 무언가를 구매하길 원한다고요. 제가 그 일을 도와 드리게 될 것입니다.」
「희한하군요. 저를 PCC로 데려가고 싶으신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한국 정부에서 저를 위해 하는 일에 동참하셔도 되는 건지요?」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한국과 미국은 동맹 관계, 우방입니다. PCC가 정대식 씨를 탐내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 정부의 요청을 무시할 만큼 치졸하게 굴 생각은 없어요. 궁극적으로는 정대식 씨를 위한 일이니까요.」
「좋습니다. 그 외 다른 용무도 하나가 더 있지요.」
「미스터 강 말이군요.」
「강이 아니고 광입니다. 광필두.」
「강피르두? 부르기 어려운 이름이군요. 하여간에 그 남자가 7성 무구를 모으고 있다는 사실은 전 세계의 각성자 협회와 헌터 협회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일이죠. 미 정부에서도 그 사실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가급적 그 남자가 팔머 가에 있는 7성 무구를 구입하지 못하도록 해야겠죠.」
「무슨 방법이 있습니까?」
「제이드 K 팔머는 합리적인 사람이죠. 광이 얼마만한 금액을 내놓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미 정부에서 제안하는 액수보다 더 많은 대가를 지불할 순 없을 거예요.」
리즈는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정대식의 생각은 좀 달랐다.
'광필두가 정말로 그 갑옷을 돈 주고 사려고 할까? 그만한 재산도 없다고 하던데. 분명히 돈이 아닌 다른 협상 카드를 손에 쥐고 있을 거야. 어쩌면 실력 행사를 하려고 들지도 모르지.'
정대식은 예의 자선 경매에서 광필두와 한판 붙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최희가 하다 만 이야기가 무엇인지 더 궁금해졌다.
'자선 경매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최희를 협박해서라도 그게 뭔지 알아 놔야겠어.'
정대식은 짬을 내 부대원들이 있는 뒷좌석 쪽으로 가 김태희와 대화를 나눠 보고 싶었지만 리즈가 그를 놔주지 않았다.
그녀의 말솜씨는 실로 현란해서 정대식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누었다.
리즈의 이야기 속에는 미국 헌터들에 대한 정보가 다수 섞여 있어 같이 합동 작전을 벌이게 될 PCC 산하의 피닉스 공격대에 대해 세부적인 것을 파악할 수가 있었다.
「PCC에는 여러 공격대가 있는데 캡틴이 누구냐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한국보다는 포지션에 있어서 훨씬 더 자유로운 분위기예요. 탱커나 원딜, 근딜 같은 개념이 희박한 편이거든요. 타고난 능력보다는 무구나 장비에 의지해 평균적인 공격력과 방어력을 갖추게끔 하고 있죠. 그래서 버퍼나 힐러라 하더라도 전투력이 떨어지진 않아요. 뭐, 요즘 새로이 생기는 사설 공격대는 한국 스타일을 많이 따라하는 편이기는 해요. 뭐니 뭐니 해도 싸이킥 강국은 대한민국이니까 말이에요.」
「피닉스 공격대는 인원이 총 몇 명이나 됩니까?」
「20명이에요. 이것도 많은 편이지요. 미국의 공격대는 아무리 많아도 30명 정도가 한계예요. 피닉스 공격대도 PCC 소속이라 그 정도 인원이지, 보통은 10명 내외로 펜리르 부대와 비슷한 규모예요. 여긴 대형 정공이라는 개념이 없거든요. 규모가 큰 작전을 벌일 때는 여러 공격대가 연합하곤 하죠. 그렇다 보니 피닉스 공격대는 다른 공격대와 함께 일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이 없어요. 피닉스 공대장도 상당히 소탈한 사람이라 같이 일할 만할 거예요.」
「피닉스 공격대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는 넘겨받았습니다만, 거기 공대장이 대단히 걸출한 인물이더군요.」
「1차 몬스터 브레이크가 터졌을 때 처음으로 나타난 1세대 각성자로서 미국 국민들에게는 살아 있는 신화와도 같은 존재죠. 대통령보다 더 인지도가 높을 정도이니 말 다한 셈이죠.」
「아직까지 현역으로 활동하고 계시다니 놀랍네요.」
「미국의 각성자들은 피치 못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은퇴를 염두에 두지 않아요. 특별한 능력을 타고났으니 불구가 되거나 죽기 전까지는 국가와 사회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죠. 그래서 PCC 소속 공격대원들은 연배가 좀 있는 편이에요. 피닉스 공격대도 그렇고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도 하고 술도 마시고 하다 보니 어느새 하와이가 가까워져 있었다.
기장의 안내 방송이 다시 한 번 흘러나오며 비행기가 하강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