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
현질 전사
-8권 11화
「다른 헌터들의 생각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곳 하와이 제도에서 오랫동안 몬스터들과 씨름해 온 저로서는 던전 안의 몬스터보다 던전 밖의 몬스터들이 훨씬 더 위험하게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던전 안의 몬스터들은 각자의 영역을 지키고 거기서 벗어나려 하지 않으니까요. 오히려 제 영역을 지키기 위하여 서로 싸움을 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던전 밖, 현실 세계로 나오면 놈들은 인간이라는 공공의 적을 인지하고 전략적으로 행동합니다. 무리를 짓지 않는 놈들까지 무리를 지어 공동의 목표, 즉 둥지의 건설과 방어를 위해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아담은 근심 어린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놈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광경을 보면 흡사 잘 훈련된 군대를 보는 것 같죠. 만약 던전 안의 몬스터가 모조리 튀어나오는...... 최후의 몬스터 브레이크가 일어난다면 그때는 인류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겁니다.」
실로 오싹한 이야기였다.
정대식은 내심 섬뜩한 기분을 숨기며 염려하지 말라는 식으로 말했다.
「놈들이 전략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이 위협적이라는 뜻이 아닙니까? 실제로 각성자들의 능력이 아니더라도 몬스터를 통제할 수 있는 무기가 개발되었으니, 놈들이 한낱 짐승으로 전락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겁니다.」
아담은 대답 대신 훗, 웃고는 내일 보자는 말을 남기고 가 버렸다.
정대식은 숙소로 발길을 옮기며 옆에 있던 김시온에게 말했다.
"아담의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가 하는 말은 다 사실일 겁니다."
김시온은 파견대가 하와이에 착륙한 그 순간부터 정대식에게 깍듯한 경어를 쓰고 있었다.
그가 파견대의 대장을 맡고 있으니 그를 상급자로 예우해 주는 것이다.
김시온은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고 말을 이었다.
"몬스터들이 한 번 둥지를 틀어 영역을 설정하면 그곳을 되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완전히 둥지화되어 버린 몇몇 장소들은 빼앗긴 땅이라고 불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헌터들이 있다는 한국조차 울릉도와 제주도 등, 수많은 섬들을 되찾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이곳 오아후 섬을 탈환한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그것도 MFP의 존재가 있었으니 가능한 일이었겠죠. 그러니 아담 커클랜드 공대장은 현실에 적응한 몬스터들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일 겁니다."
"아무튼, 내일은 몬스터 조사반이 방어 기지에 머물 테니 외인부대도 작전에 참여해 주셔야 합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럼 내일 뵙죠."
"내일 뵙겠습니다."
정대식은 김시온과 숙소 입구에서 갈라졌다.
그리고 펜리르 부대가 배정받은 방이 쭉 늘어선 복도를 지나치는데, 우연히 김태희와 마주쳤다.
"김태희!"
김태희는 제자리에 딱 걸음을 멈추고 즉각 답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대장님?"
대장님이라 부르는 걸 보니 완강히 거리를 두는 태도였다.
정대식은 그녀를 잡아 이끌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일전에 있었던 일은...... 아무래도 내가 뭔가 잘못한 것 같더군. 다시 한 번 정식으로 사과하지."
정대식이 하는 말에도 김태희는 고개를 모로 돌리고 모르는 척을 했다.
"대장님이 제게 사과하실 일이 뭐가 있습니까? 무슨 소릴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최희라고 불러야 말을 들을 텐가?"
"여기서는 김태희일 뿐입니다만?"
"최희."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공과 사는 구분하셔야 할 게 아닙니까?"
계속 쏴 붙이는 김태희를 보고 정대식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은 비단 하와이 제도의 탈환을 거들어 주기 위해서만은 아니야. 나는 이곳에서의 볼일이 끝나면 미국 본토로 건너가 팔머 가에서 주최하는 자선 경매에 참가할 예정이다. 그곳에 누가 오는지는 너도 잘 알고 있겠지?"
"......."
"그를 만나기 전에 네가 하려던 이야기가 무엇인지 들어 두고 싶다. 필시 중요한 이야기였을 테니 거기까지 날 불러낸 것이겠지. 겨우 영은하와의 스캔들을 탓하려고 날 불러내진 않았을 거잖아?"
그 말에 갑자기 김태희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는 쓰고 있던 뿔테 안경을 벗고 손등으로 거칠게 눈가를 문질렀다.
안경을 벗자 김태희는 사라지고 어느새 최희가 눈앞에 서 있었다.
"그럼 안 돼?"
정대식은 울먹이는 그녀를 보고 말문이 막혀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최희는 전에 없이 약한 모습을 보이면서 혼잣말 같은 말을 뇌까렸다.
"결국 나를 불러 세워 사과를 하려 드는 건 광필두에 대한 일을 묻기 위해서잖아? 나한텐 아무 관심도 없지......."
그제야 정대식은 요전번 최희가 왜 뺨을 후려쳤는지 깨달았다.
상처받아 달려가는 그녀를 붙잡아 세워 놓고 달래 주기는커녕, 광필두에 대한 말을 묻기에 급급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뒤늦게 자신의 무신경함이 자각되어 몹시 미안했다.
그러나 또다시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니 그 말이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입술을 파르르 떨며 훌쩍이는 최희를 보자 순간 강렬한 충동이 찾아들었다.
정대식은 저도 모르게 최희에게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최희는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얼굴이 마치 어린애 같아 보여서 정대식은 짧게 웃고 이번엔 좀 더 깊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 나자 최희가 약간 얼이 빠진 듯 멍한 얼굴이 됐다.
그 표정을 보고 정대식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때서야 최희도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손에 들고 있던 안경을 도로 썼다.
그리고 김태희로 돌아가 정대식이 궁금해했던 광필두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확실한 건 아니에요. 이건 그냥 제가 주워 들은 몇 가지 소문을 조합하여 짜낸 추측일 뿐입니다."
"그게 무슨 추측이지?"
"제 짐작으론 아무래도 광필두가 자신의 능력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아요."
"자신의 능력을 숨긴다고?"
정대식은 미간을 찡그리며 조디악 공격대에 있을 때 보았던 광필두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불길이 솟구치는 검을 들고 싸웠는데, 그걸 보고 정대식은 광필두가 강화계나 방출계 쪽 능력자가 아닌지 짐작했었다.
그런데 그 능력이 광필두의 본연의 이능이 아니라는 말인가?
김태희의 말은 계속됐다.
"광필두는 조디악 공격대에 들어가기 이전에는 그 행적이 묘연해요. 정대식 씨처럼 갑자기 나타나 단번에 두각을 드러내었죠. 그로 인해 조디악 공격대에 들어갔고...... 그 이후로는 줄곧 불꽃 검을 들고 싸웠는데 그건 그 아이템의 능력이지 광필두의 능력이 아니에요."
그러고 보니 한미란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정대식은 그 이야기를 입에 올렸다.
"광필두와 싸웠던 박태산이 이능을 잃어버렸다는 게 사실인가?"
김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사실로 확인되었어요. 그런데 그게 광필두의 능력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전투의 후유증으로 그리된 것인지는 알 길이 없어요."
"박태산 씨의 상태가 어떻기에......?"
"완전히 넋이 나갔다고 해야 하나? 본래도 나이가 좀 있으시긴 한데, 그래도 아직까지 정신을 놓을 정도는 아니죠. 그런데 지금은 치매노인요양보호소에 몸을 의탁하고 계세요."
"뭐라고?"
정대식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다.
1세대 능력자로 첫 번째 몬스터 브레이크를 겪어 내었고, 7성 무구중 하나를 보유하고 있던 인물이 치매 환자가 되었다는 말인가?
"모종의 충격을 받아 그렇게 된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렇지만 여진주 씨는 멀쩡하지 않나?"
"겉보기론 그렇죠. 하지만 그 사람도 광필두와 일전을 치른 이후에는 은퇴했어요. 광필두와 싸운 후로 단 한 번도 이능을 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말이에요."
"그럼 광필두가 각성자의 이능을 강탈한다는 게 사실이란 말이야?"
"강탈한다기보다는 파괴한다는 표현이 더 맞겠죠. 제 생각으론 광필두는 각성자를 평범한 사람으로 바꿔 버리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아요."
"어떻게 신이 준 능력을 한낱 인간이 망가트린단 거지?"
"그건 저도 모르죠. 하지만 만약에 자선 경매에 참가하여 광필두와 마주치게 된다 하더라도, 그와 싸우면 안 됩니다. 그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 확인할 때까지는 조심하는 게 좋아요."
정대식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여진주를 만나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해 봐야겠군."
Chapter 47. 특수 작전
다음 날 아침.
새벽 기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파견대와 피닉스 공격대, MFP를 설치할 특수작전합동부대가 한자리에 모였다.
먼저 각 대장들이 최종적으로 세부적인 의견을 조율하고 대형 회의실에서 총 작전 브리핑을 가졌다.
그런 뒤 각 부대별로 상세 작전 사항이 전달되었고, 간단히 식사를 한 뒤 한 시간가량의 준비를 거쳐 아침 아홉 시 정각, 작전이 시작되었다.
투다다다다다다다!
대형 수송 헬기의 프로펠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가운데, 펜리르 부대원과 외인부대원을 다 합쳐 총 14명의 인원이 헬리콥터로 옮겨 탔다.
서펜트로 인해 배로는 이동이 불가능했으므로 몰로카이 섬으로 가기 위해서는 하늘길을 이용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타다다다다다다다!
헬기를 타고 이동하면서 이재우는 창밖으로 펼쳐지는 하와이의 풍경에 환성을 내질렀다.
"호우-!"
놀러 온 것이 아니었기에 이재우는 소리를 지르기가 무섭게 대원들의 눈총을 한 몸에 받았다.
허미래는 난생 처음 강하를 할 생각에 얼굴이 창백했다.
그러나 최신식 장비를 이용할 예정이라 초보라고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없이 지상으로 내려갈 수 있을 터였다.
'저기가 몰로카이 섬이군.'
하와이 제도가 한때는 지상낙원으로 불렸던 곳이니만큼 녹색의 섬은 푸른 바다 위에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몬스터가 득시글거리는 던전 못지않은 곳일 테니 방심해서는 안 됐다.
곧 헬기가 방향을 바꾸어 해안가에서 몰로카이 섬 쪽으로 접근했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섬의 동쪽으로 그들이 가야 하는 카마코우 고원이 보였다.
타다다다다다다!
카마코우 산등성이의 농경 지대에 헬기가 멈춰 섰고 강하 신호가 떨어졌다.
정대식은 앞장서서 헬기 밖으로 뛰어내렸다.
세찬 바람이 뺨을 때리고 그는 자동으로 완급 조절이 되는 와이어 장치를 지상에 도착하자마자 풀어냈다.
곧 그를 따라 나머지 13명의 대원이 땅으로 내려왔다.
정대식은 대원들이 와이어 장치를 풀어내고 전투 준비를 갖출 수 있도록 시간을 벌기 위해 앞으로 뛰쳐나갔다.
요란한 프로펠러 소리를 듣고 숲 속에 숨어 있던 몬스터들이 사방팔방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정대식은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워킹 머맨들을 향해 MFP 수류탄을 날렸다.
휘리리리릭- 빠지지지지직!
허공으로 날아간 MFP 수류탄은 바닥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전자기 펄스를 방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