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
현질 전사
-8권 25화
애석하게도 그 질문에도 대답할 수 없었다.
부로 세상을 지배하고 싶다는 욕망을 입 밖으로 내려니 매우 저속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렇게 부끄러울 것까지는 없는데, 왠지 사실을 말하면 최희가 몹시 실망할 것 같았다.
그녀는 정대식이 힘에 대한 비밀을 숨긴 채 아무도 모르는 어떤 숭고하고 거대한 목적에 도달하려 애쓴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이상을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이런 적은 난생 처음이었다.
정대식은 단 한 번도 돈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부끄러워해 본 적이 없었다.
구두쇠라고 주위에서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돈이 행복의 전부가 아니라는 헛소리를 비웃으며 살아왔다.
그에겐 돈이 진리이자 믿음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가식을 떨고 있을 뿐, 내심으론 자신과 똑같을 거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헌터라는 족속들은 달랐다.
물론, 헌터들 중에서도 부와 명예를 좇는 부류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수많은 헌터들이 물질적인 것보다는 무언가 다른 것을 원했다.
그들은 그것을 강해지는 것이라고 말했으나, 정대식에게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았다.
강함을 향한 집념과 올곧은 태도가 그들이야말로 무언가 숭고한 것을 추구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정대식은 그런 부류를 난생 처음 보았다.
아무리 고상한 척하는 사람들도 돈 앞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이기 마련이다.
정대식은 어릴 적, 금전 앞에서 부조리해지는 이들을 많이 봐 왔다.
겉으로는 교육자, 성직자로 칭송받는 보육원 원장이 뒤로는 지원금을 빼돌린다는 것을 알았고, 세상 의리 있는 척 구는 짐꾼들이 일거리를 소개시켜 준답시고 임금을 떼먹거나 사기를 치는 것을 수도 없이 목격했다.
그래서 세상에는 자신처럼 돈에 환장한 그런 사람들만 있는 줄 알았다.
그러지 않는 놈들은 그저 점잖은 체하거나 머리가 빈 얼간이들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가 만난 헌터들은 얼간이가 대다수였다.
눈앞에 있는 최희가 대표적이었다.
슈퍼스타인 그녀는 원하기만 한다면 세상에 둘도 없을 부를 누릴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거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미 가질 만큼 가져서 그런 것만은 아닐 터였다.
만족이라는 건 원래 끝이 없는 것이니까.
진짜로 부귀영화에는 관심이 없는 거였다.
오로지 강해지는 데만 관심을 두고 있었다.
정대식은 그런 최희가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어렴풋하게는 좀 부럽기도 했다.
자신은 돈이 아닌 다른 것을 위해서 살아가는 게 불가능한 탓이다.
정대식은 무언가 걸쩍지근한 기분 속에서 몸을 돌렸다.
"이야기 다 끝났으면 난 이만 돌아가지."
"잠깐만."
"뭐지?"
정대식은 뒤를 휙 돌아보았고, 최희가 별안간 그를 잡아당겼다.
최희는 정대식의 손목을 아프도록 꽉 붙잡은 채 불타는 눈으로 말했다.
"난 포기 안 해. 기필코 네게서 원하는 것을 받아 내고 말겠어."
정대식은 한숨을 쉬었다.
"할 수 있다면야, 맘대로 해."
그때 별안간 최희가 얼굴을 붉히며 뜬금없는 변명을 했다.
"그렇다고 내가 널 좋아한다는 소리는 아니야. 네 곁에 있으려고 핑계 같은 걸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고."
누가 물어본 것도 아니거늘, 주절주절 괜한 소릴 하는 최희를 보고 정대식은 피식 웃었다.
그러자 최희가 화들짝 놀라서 붙잡고 있던 손목을 놓고 윽박을 질렀다.
"이상한 착각을 할까 봐 말해 두는 거야!"
정대식은 억지를 쓰는 최희에게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무슨 소린지 알고 있어. 넌 날 좋아하는 게 아니지."
"그래, 아냐! 확실히 알아 두라고!"
"확실히 알아들었어. 그럼 난 이만."
정대식은 최희에게서 몸을 돌리고 유유히 걸어갔다.
웃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광대가 씰룩거리는 것이, 아무래도 최선이 한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저렇게 티를 내니 모를 수가 없었다.
최희는 자신을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아, 이놈의 인기 하곤!'
정대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잠시 자아도취에 빠졌다.
그러나 그 기분도 잠시였다.
착각에 불과하다고 생각해 논외로 두었던 문제가 현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저도 언니도, 정대식 씨를 좋아하고 있으니까요.'
정대식은 본격적으로 심각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이거 큰일이네! 두 사람 중 누구를...... 아니, 이게 누굴 택하고 말고 할 수 있는 건가? 양심적으로는 둘 다 만나면 안 되는 거 아냐?'
한 남자가 자매를 놓고 누굴 고를지 고민하다니.
사회 통념상 매우 비도덕적인 일처럼 느껴졌다.
보통은 우애 좋은 자매를 희롱해 사이를 갈라놓느니, 남자 쪽에서 깨끗이 물러나는 게 맞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막상 둘 다 놓치려니까 무지하게 아까워서 억울한 기분까지 들었다.
'......둘 다 만나면 안 되겠지?'
짱돌 맞을 생각을 하면서 정대식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두 여인이 있는데, 하필이면 자매라니.
빛 좋은 개살구, 그림 속의 떡이 아닌가?
여자 복이 있는지 없는지, 참으로 아리송한 노릇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일찍, 정대식은 미국 본토로 떠나기 위해 채비를 했다.
미국 본토까지는 앤더슨 대위가 동행하기로 되어 있었고, 거기서부터는 리즈가 정대식을 안내하게 될 예정이었다.
그녀는 정대식을 제이드 팔머에게 소개시키고 마기전 구입을 도맡아 줄 예정이기도 했다.
정대식은 비행장으로 나가기 전, 펜리르 부대원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잠시 떨어져 있을 뿐인데 부대원들은 하나같이 울상을 하고 있었다.
정대식이 내린 명령이 엄중한 탓인지, 아니면 낯선 곳에 남겨지는 것이 불안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엄마 떼 놓는 아이마냥 서러운 얼굴로 정대식에게 한마디씩을 건네 왔다.
"부디 몸 성히 다녀오십시오."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즉시 연락하시고요."
"빨리 돌아오셔야 됩니다."
"아예 미국에 눌러앉을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허미래는 심지어 훌쩍거리기까지 해, 정대식은 부러 덤덤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각자의 능력 계발에나 집중하길 바란다. 내가 돌아왔을 시, 기대에 못 미치는 대원이 있다면 스스로 펜리르 부대를 떠날 각오를 해라."
정대식의 경고에 다들 긴장한 표정이 되어 입을 다물었다.
정대식은 더 길게 말하지 않고 김시온을 향해 말했다.
"지금 이 시간부로 파견대의 임시 대장 직을 맡기겠습니다. 부디 대원들을 잘 부탁드립니다."
"염려 마십시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김시온과 짧게 악수를 나눈 정대식은 마찬가지로 배웅을 나온 아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역시 정대식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면서 말했다.
"본토에서 볼일 잘 보고 돌아오십시오. 여기 일은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대식은 뒷전에 서 있던 김태희를 손짓해 그녀와 함께 비행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비행기 앞에는 이미 리즈가 마중을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정대식은 그녀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비행기에 올랐다.
그런 뒤 기장과 짧은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곧 스튜어디스가 나와 기내를 점검하고 이륙 안내를 했다.
오래지 않아 비행기가 땅을 박차고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우우우우우웅-.
창밖으로 순식간에 방어 기지의 풍경이 멀어져 갔다.
비행기가 선회하자 본래 헤르보르가 있었던 하와이 섬도 보였다.
헤르보르가 사라지기는 했으나 그 흔적은 역력히 남아 있어 하와이 섬은 검은 숯 덩어리처럼 보였다.
아직까지 분출한 용암이 채 다 굳지 않은 채 흐르고 있었고 곳곳에서 연기와 불꽃이 솟구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서 리즈가 말을 걸어왔다.
「당신의 활약에 대해서는 익히 들었어요.」
「그렇습니까?」
「설마하니 헤르보르와 같은 괴물을 혼자서 쓰러트릴 줄이야.」
「엄밀히 말해서 혼자 쓰러트린 것은 아닙니다. 파견대와 피닉스 공격대 등,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죠.」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신의 공적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죠.」
리즈는 정대식을 보고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최초로 올인원이 나타났다고 했을 땐,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몹시 궁금했었는데, 이렇게 그 실체를 확인하고 나니 몹시 욕심이 나네요.」
「욕심이라고요?」
「당신을 꼭 우리 PCC로 스카우트하고 싶다는 욕심요.」
스카우트 이야기가 나오자 입을 다문 채 창밖을 보고 있던 김태희의 시선이 리즈 쪽으로 휙 돌아갔다.
그녀가 쏘아보든지 말든지, 리즈는 긴 다리를 꼬며 말했다.
「미 정부는 불철주야 노력한 끝에 전 세계의 인재들을 모아들였죠. 그로 인해 세계 10위권 내에도 못 들던 각성자들의 전력을 3위권까지 끌어올렸어요. 이대로라면 1위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죠.」
정대식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미국에 이미 훌륭한 능력자들이 많은데 저까지 데려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세계의 능력자들이 모인 곳이니 바로 올인원인 정대식 씨, 당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왜 그렇죠?」
「이건 아직 기밀인데...... 정대식 씨니까 특별히 말해 드리죠.」
도대체 무슨 소릴 하려고 기밀 운운하는 건가 생각하던 정대식은 리즈가 하는 말에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저희 PCC에서는 세계 최고의 능력자들을 모아 전례 없는 팀을 만들 거예요.」
「팀이라고요?」
「공격대라고 표현해도 되겠죠. 우리는 오랫동안 이 공격대를 지휘할 사람을 찾고 있었어요. 올인원의 존재가 나타났을 때부터 우리는 그 자리를 염두에 두고 당신을 주목하고 있었죠. 그런데 이제 보니 확신할 수 있겠네요. 이모탈의 캡틴은 바로 당신이에요.」
「이모탈......이라고요? 그게 그 팀의 이름입니까?」
「그래요.」
하필 팀 이름이 불사자(不死者)라니.
그냥 멋있으라고 지은 이름일 수도 있지만 상당히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세계 최강의 팀을 자신을 위해서 준비해 놓고 있다니 일순 흥미가 일기는 했지만, 힘들게 키워 온 펜리르 부대를 저버릴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정대식의 목표가 그런 데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정대식은 적당한 말로 거절을 표시했다.
「굳이 제가 아니더라도 그 자리에 걸맞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글쎄요?」
리즈는 요염하게 다리를 바꿔서 꼬며 말했다.
「어디 두고 보죠.」
「날 설득시킬 자신이 있다는 겁니까?」
「그래요. 난 한 번 점찍은 사람은 절대 놓친 적 없거든요.」
호언장담하는 리즈를 보자 어쩐지 폭풍의 예감이 들었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김태희가 살벌한 기운을 뿜어내며 리즈를 노려보는 게 느껴졌다.
꽤나 뒤통수가 섬뜩할 텐데도 태평한 것을 보니, 리즈 또한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흡사 용호상박이라, 정대식은 등 뒤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부디 이 여행이 무사히 끝나야 할 텐데.'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이 되지 않기만을 바라야 했다.
정대식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졸린 척 눈을 내리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