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
현질 전사
-9권 1화
Chapter 50. 함정
이윽고 미국 본토에 당도해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는 밤늦은 시각이었다.
정대식은 그를 위해 마련된 리무진에 몸을 실었다. 리무진을 타보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영화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좋았다. 최고급 가죽 시트가 이미 침대에 누운 것 같이 편안했다.
리즈는 샴페인을 따서 정대식과 김태희에게 따라주며 건배를 권했다.
「미국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원래대로라면 큰 환영을 받으셨을 텐데, 비공식적인 일정이다 보니 이렇게 밖엔 모실 수가 없네요.」
정대식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닙니다. 이 정도로도 충분합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무엇이든 제공해드릴 테니까요.」
싱긋 웃는 리즈와 잔을 부딪치고 정대식은 샴페인을 한 모금 마셨다. 반면 단번에 샴페인을 마셔버린 김태희가 빈 잔을 내려놓으며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는 거죠?」
리즈는 즉시 답했다.
「팔머 가의 저택으로 가는 중이에요.」
김태희는 인상을 찡그렸다.
「팔머 가라고요?」
「호텔에 묵을 수도 있겠지만 팔머 씨가 정대식 씨를 직접 대접하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섰거든요. 어차피 자선 경매도 그곳에서 열리는 데다가, 무엇보다 미스터 광 역시 그곳에 머물기로 되어 있어요.」
「그는 언제 도착하는 겁니까?」
「오늘 아침에 입국했으니 이미 팔머 가에 당도해 있을 거예요.」
리무진은 화려한 라스베이거스의 야경을 지나쳐 얼마간을 달렸다. 오래지 않아서 정대식은 사막 한가운데 자리한 으리으리한 저택을 볼 수가 있었다.
「대단하네요.」
정대식이 감탄하는 말에 리즈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여기는 팔머 가가 소유하고 있는 수많은 부동산 중 하나일 뿐이에요. 전 세계 곳곳에 팔머 가의 저택이 자리하고 있는데, 여기에 있는 코멧 저택은 가장 최근에 지어진 건물이라 최신식이에요. 보기 힘든 신기술이 많이 적용되어 있죠. 예를 들자면.......」
저택으로 이어진 도로로 접어들자 순식간에 주변의 풍경이 변했다. 사막이던 길가가 갖은 꽃이 피어난 들판으로 변모했고 하늘에선 오로라가 춤을 추었다. 그 광경을 보고 김태희가 중얼거렸다.
「환영석인가요?」
「그래요. 근사하죠? 참고로 이 풍경은 계속해서 바뀌어요.」
리즈의 말대로 얼마 있지 않아 들판은 숲으로 변했고 사방팔방 반딧불이 날아다녔다. 그것은 곧 눈으로 변하더니 사방이 눈 쌓인 원시림이 되었다. 그런 식으로 계속 변하는 풍광에 넋을 잃는 사이, 리무진이 철책 앞에 당도했다. 철책 양옆에는 스캐너가 달려있었는데, 리즈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안면인식이 자동으로 됐다.
- 코멧 저택을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캐서린 엘리자베스 가렛님. 두 명의 동반자를 대동하셨습니다.
곧 철책이 열리며 리무진이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환영이 아닌, 잘 꾸민 정원이 펼쳐지는 가운데 저만치 커다란 분수가 보였다. 사막 한가운데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리무진이 분수가 놓여 있는 광장을 크게 돌아 저택 앞에 멈춰 서자 에메랄드를 통째로 깎아 만든 것처럼 커다란 문이 열리며 안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오! 드디어 왔군!」
집사처럼 보이는 고용인을 제치고 버선발로 달려 나오는 남자는 새치가 섞인 회색 머리에 근사한 턱수염을 달고 있는 중년 남자였다. 그는 리무진에서 내리는 리즈와 가볍게 악수를 하며 포옹을 했다.
「오랜만이군요, 리즈.」
「그러게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나야 늘 똑같지. 그럼 이쪽 분이.......」
남자의 시선이 정대식을 향하자 리즈가 그를 소개했다.
「이분이 다름 아닌 정대식 씨입니다. 그 옆의 분은 동료인 김태희 씨고요.」
정대식은 그와 악수를 하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정대식입니다.」
「반가워요, 하하! 반갑습니다. 내가 바로 제이드 팔머요. 편하게 제이드라고 불러요. 미스터 정이라고 부르면 될까?」
「편하신 대로 불러주시죠.」
김태희와도 인사를 나눈 제이드는 앞장서 가며 말했다.
「올인원이 탄생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꼭 한 번쯤은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지요. 미스터 정을 초대할 수 있다면야, 내 컬렉션 중 아껴두었던 몇 점을 선물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는데, 이렇게 먼저 발길 해줄 줄이야!」
제이드는 싱글벙글하며 정대식을 크게 환영해주었다. 정대식은 그의 들뜬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말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제이드 씨가 갖고 계신 무구 중 제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아! 그거 말이죠. 마기전이라고 했던가?」
「예.」
「그러잖아도 내가 가진 것은 한 짝뿐이라, 필시 다른 부위가 있을 거라고 예상을 하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그걸 정대식, 당신이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어느 파츠를 갖고 있다고 했죠?」
「레프트 뱀브레이스와 라이트 퀴스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맘 같아선 당장 보고 싶지만...... 일단은 밤이 늦었으니 좀 쉬는 게 좋겠지요.」
제이드는 으리으리한 저택의 내부를 가로질러 손수 게스트룸까지 안내를 했다. 최신식으로 만들어졌다는 리즈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저택의 자재 대부분이 던전 자원으로 만들어져 있어 대단히 색달랐다. 바닥엔 대리석 대신 야광석이 깔려있었고, 화병엔 살아있는 보석 꽃이 장식되어 있었으며 천장에는 새하얀 깃털로 둘러싸인 와이번의 박제가 떠다니고 있었다.
「오늘 밤엔 여기서 주무시고, 내일 아침에 다시 만나도록 하죠.」
정대식은 잠자리에 들어가기 전 확인하고 싶은 바를 물었다.
「죄송하지만 이 저택에 또 다른 손님이 와 있을 텐데요.」
「내일이 자선 경매인지라 손님이라면 많이들 와 있죠.」
「저와 같이 한국에서 온 헌터 말입니다.」
「아~! 미스터 광? 예. 그도 와 있습니다.」
제이드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였다.
「그 또한 제게 필요한 것이 있다더군요. 구체적인 내용은 프라이버시니, 내일 아침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괜찮으시다면 함께 아침 식사를 하지 않겠느냐고 전갈을 보내놓도록 하죠.」
광필두가 이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한 정대식은 일단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오신 동료분은 바로 옆방에 묵으실 겁니다. 그럼 푹 쉬시죠.」
* * *
전용기에 리무진을 타고 이동했다지만 어쩐지 피곤해서 정대식은 침대에 눕기가 무섭게 곯아떨어졌다. 정신없이 푸하푸하 자고 있는데, 문득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본능과도 같은 예감이 들어, 정대식은 즉시 시트를 박차며 몸을 옆으로 굴렸다. 그러자 그가 누웠던 침대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빠드드득!
와그드득!
정대식은 졸음이 남아있는 눈가를 정신없이 비볐다. 미처 제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무언가가 그에게 부딪쳐왔다.
"으악!"
오금이 부딪쳐 앞구르기를 한 정대식은 아수라장이 된 방안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마치 디즈니의 세계에 들어와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누구라도 의자가 네 발로 뛰어다니며 팔걸이를 휘두르는 광경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터였다.
의자뿐만이 아니었다. 침대는 마치 미믹과도 같이 변했고, 장식장은 촛대를 무슨 무기처럼 휘두르며 정대식을 공격하고 있었다. 정대식은 휙 날아오는 촛대를 피하며 침대를 박찼다가, 그만 매트리스 틈바구니에 발이 끼이고 말았다.
"젠장!"
정대식은 주먹을 휘둘러 침대를 쾅 부숴버리고 창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했다. 한데 창에 드리워진 커튼이 그의 전신을 칭칭 감아왔다. 그것을 부욱 찢고 창문을 활짝 열자 아래쪽 테라스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킥킥킥...... 아하하하!"
배를 잡고 웃는 것은 아직 열 살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어린애였다. 동양인인 데다가 한국말을 쓰는 것을 보면 한국 사람인 게 틀림없어 보였다. 정대식은 이 모든 난장을 그 녀석이 일으켰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을 부라렸다.
"너 뭐야?"
"올인원씩이나 되는 능력자가 뭘 그런 것 가지고 화를 내실까!"
빈정거리는 소리를 내뱉은 아이가 후닥닥 달려 도망을 치려고 했다. 정대식은 괘씸한 맘에 혼쭐을 내주려고 즉시 엔트로피를 불렀다.
"엔트로피, 저놈을 붙잡아!"
<알겠습니다.>
엔트로피가 허공을 붕 날아가 그 아이를 낚아채려고 했다. 그런데 엔트로피가 가까이 다가가자 테라스를 따라 늘어서 있는 가로등이 휘어지며 엔트로피를 후려치려고 했다.
'저 아이 능력인가?'
꼬마애는 재빠르게 모퉁이를 돌아 정대식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테라스로 뛰어내린 정대식은 발 빠르게 달려 코너를 돌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디즈니가 아닌 트랜스포머의 세상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억?"
정대식은 느닷없이 나타난 로봇을 보고 기겁해 몸을 날렸다. 그가 서 있던 자리로 주먹을 날린 로봇은 쿵쿵 걸어 정대식을 쫓아왔다. 차를 몇 대나 재조립해 만든 것 같은 외양의 로봇을 보고 저만치 선 꼬맹이가 신난다고 박수를 쳐댔다.
"싸워봐! 올인원은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지 한번 보고 싶으니까."
정대식은 이를 북북 갈았다.
'저자식이.......'
매운맛을 보여주겠다고 주먹을 지그시 말아 쥐던 그때였다.
건물 뒤쪽에서 누군가 뛰쳐나와 으름장을 놓았다.
"그만하지 못해?"
그 얼굴은 낯이 익었다.
정대식은 상대를 확인하고 긴가민가한 기분으로 그 이름을 불렀다.
"설유란?"
꼬맹이를 쥐어박으며 화를 내던 설유란은 정대식을 보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마법사인 그녀는 평소에 요란한 화장을 하고 다녔는데, 지금은 밤이라 그런지 민얼굴이라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오랜만이에요."
짧게 인사한 설유란은 꼬맹이의 귀를 잡고 스산하게 속삭였다.
"빨리 네 장난감을 원래대로 해놓지 않으면 발가벗겨 거꾸로 매달아 놓을 거야."
그 말에 울상이 된 아이가 손을 휘둘렀고, 그러자 놀랍게도 로봇이 우르르 해체됐다. 정확히는 원래의 차 모양으로 되돌아갔다고 하겠다.
텅! 텅!
포석 위에 떨어지다시피 내려앉는 차들은 하나같이 값비싼 것들뿐이었다. 아마도 제이드의 애마를 끌어내 가지고 온 것 같았다. 그 짐작이 맞는지, 소란을 듣고 달려온 제이드가 뒷전에서 소리를 질렀다.
「세상에, 내 차가!」
제이드뿐만 아니라 김태희와 리즈까지 몽땅 달려 나온 참이었다.
쏟아지는 질책의 시선에 꼬맹이는 약간 주눅이 든 채 변명을 했다.
"망가진 덴 아무 데도 없다고요! 다 원래대로 되돌려 놓았어요!"
꼬맹이의 볼을 꽉꽉 꼬집으며 설유란은 그 아이 대신에 사과했다.
"저희 애가 놀라게 해드린 것 같네요."
정대식은 한숨을 쉬었다.
"이게 웬 날벼락입니까?"
"올인원이 왔다는 소리에 잠도 못 자고 내내 흥분해 있었거든요. 감시를 한다고 했는데. 애 보기는 적성에 안 맞는지라."
설유란은 질세라 한숨을 쏟으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정대식은 그 말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설유란이 왜 여기에 있는지를 의심했다. 본디 그녀는 조디악 공격대였으니 광필두를 따라왔을 가능성이 컸다. 그 짐작을 증명이라도 하듯 저편에서 광필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광영식."
광필두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광영식이라는 꼬맹이가 딴청을 피웠다. 정대식은 그 아이의 이름을 듣고 혹시나 하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