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
현질 전사
-9권 2화
'광 씨 성은 보기 드문데...... 동생이나, 사촌인 건가?'
광필두는 저벅저벅 걸어와 광영식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그리고 아이의 어깨를 잡아끌고 와서 정대식 앞에 억지로 고개를 숙이게 했다.
"사과드려."
"자, 잘못했어요......."
"죄송합니다."
광필두까지 덩달아 사과를 해 정대식은 겸연쩍은 기분으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아니, 뭐. 다친 덴 없으니까 괜찮습니다."
정대식이 하는 말에 고개를 든 광필두는 어쩐지 새삼스런 눈으로 정대식을 보며 말을 이었다.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습니다."
"아,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올인원이 되셨다고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축하합니다."
무뚝뚝하게 말한 광필두는 손을 내밀었다.
정대식은 쭈뼛거리는 기분으로 그 손을 맞잡았다.
악력과 함께 뭔지 모를 열기가 마주 닿은 손바닥으로 전해져왔다.
광필두는 별 뜻 없다는 듯 그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놓으면서 말했다.
"필요한 것이 있어서 오신 거라고 들었습니다만."
"예. 광필두 씨도 필요한 게 있어서 오셨겠죠?"
광필두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7성 무구의 네 번째 물건이 필요해서 왔습니다. 제이드 팔머 씨가 소유하고 계신 갑옷 말입니다."
정대식은 왠지 모르게 입이 마르는 기분으로 입술을 핥았다.
"......벌써 7성 무구를 세 개씩이나 갖고 계시는데, 하나가 더 필요하단 말입니까?"
광필두는 말을 눙치거나 딴청을 부리지 않았다.
엉뚱한 소리를 하지도 않았고 눈을 피하거나 화제를 돌리거나 하는 대신에 솔직하게 말했다.
"앞으로 네 개가 더 필요합니다만."
"......7성 무구를 다 모으실 생각이란 말입니까?"
그 말에 광필두가 전혀 예상 못 한 말을 했다.
"정대식 씨도 마기전을 다 모으실 생각이 아닙니까?"
정대식은 말문이 막혀서 잠시 어물거렸다. 솔직히 말해서 정대식은 반드시 마기전을 다 모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 완갑 한 짝만으로도 충분히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기에 완성본이 간절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기전을 모으고 있는 이유는 광필두의 영향이 컸다. 주위에서 정대식을 광필두의 대항마 정도로 생각하고 있으니, 만에 하나 그가 7성 무구를 다 모을 경우를 대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정대식은 광필두의 반문에 대답하는 대신, 또다시 물었다.
"7성 무구를 다 모으는 게 쉽지는 않을 텐데요. 그걸 다 모아서 어떡하실 겁니까?"
정대식의 질문을 듣고 광필두의 얼굴에 요상한 표정이 떠올랐다.
마치 그걸 몰라서 묻느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정대식은 진짜로 그 이유를 모르고 있었기에 다소 얼빠진 얼굴로 그를 마주 보았다. 그러자 광필두가 이목구비를 누그러트리며 가벼운 투로 말했다.
"헌터가 강해지려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전 같았으면 쉬이 대답할 수 없었겠지만, 정대식도 그간 보고 들은 바가 있었다. 정대식은 자연스레 김태희 쪽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금 광필두를 바라보며 말했다.
"......강해지고 싶으니까?"
광필두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
원체 험악한 인상이라서 그런지 조금 웃는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대답 대신 지은 그 표정을 보고 정대식은 말했다.
"강해지기 위해서 7성 무구를 모으려 한다는 겁니까?"
광필두는 굳이 그 말에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별말 없이 몸을 돌리더니 광영식을 데리고 가면서 제이드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소란을 일으켜 죄송합니다. 파손된 것이 있으면 변상해 드리죠.」
「아, 아닙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제 동생을 잘 단속하겠습니다.」
광필두는 어린 동생과 함께 발길을 옮겨 사라졌고, 설유란도 그 뒤를 따라갔다. 그들이 사라지자 뭔지 모를 긴장이 풀리며 제이드가 놀랍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저렇게 어린아이가 이런 능력을 갖고 있다니...... 참으로 대단하군! 트랜스포머가 따로 없어!」
그 역시 정대식과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정대식이 보기에도 광영식의 능력은 놀라웠다. 변화계나 조작계 쪽의 능력을 갖춘 모양인데, 어떤 물건이든지 간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바꿔서 조종을 할 수 있는 것 같았다.
'형제가 나란히 각성자라니. 특이하군.'
감탄을 금치 못하며 제이드가 사라지고, 김태희와 리즈가 가까이 다가왔다. 김태희가 "괜찮습니까?"하고 물어와 정대식은 별일 아니었다고 고개를 젓고 물었다.
"광필두에게 각성자 동생이 있는 줄은 몰랐군."
그 말에 김태희가 뜻밖의 소리를 했다.
"저도 몰랐습니다."
"몰랐다고?"
"동생이 있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각성자인 줄은 몰랐어요."
"아직 나이가 어린 것을 보아하니, 최근에 각성했나 본데?"
한국말을 몰라 끼어들지 못하고 있던 리즈가 간신히 타이밍을 잡아 말했다.
「아무리 어린애라고 하더라도 무례하기 짝이 없군요. 자는 사람을 습격하다니! 광의 음모인 게 아닐까요?」
정대식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날 노릴 생각이었으면 디즈니 수준에서 그치진 않았겠죠.」
「디즈니 수준이라고요?」
「그런 게 있어요. 아무튼 난 괜찮으니 두 사람 다 이만 돌아가죠.」
정대식은 그들을 돌려보내고 잠자리로 돌아갔다.
그가 묵고 있던 방에 일어났던 기현상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침대는 침대대로, 탁자는 탁자대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배치가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어, 정대식은 성가신 기분으로 가구를 전부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했다.
* * *
다음날, 정대식은 일찌감치 일어났다. 밤에 그 난리를 겪고 나서는 잠이 잘 오지 않았던 탓이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저택의 정원을 돌아보았다.
산책 삼아 슬슬 걷고 있으니, 뜻밖의 만남이 있었다. 광필두도 일찍 일어나 있었던 모양이다. 정원 주변을 가볍게 뛰고 있던 그와 딱 마주쳤던 것이다.
"아. 광필두 씨."
정대식이 먼저 아는 체를 하자 그가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빼고 선뜻 인사를 건네왔다.
"일찍 일어나셨군요. 어젯밤 일이 방해가 되었습니까?"
"잠자리가 낯선 탓도 있고요. 광필두 씨도 일찍 일어나셨네요."
"저 역시 낯선 곳에 와 있으니 잠이 잘 안 와서요."
거의 적처럼 취급하고 있던 사내와 이렇듯 태평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기분이 좀 이상했다. 다른 사람들 속 광필두의 이미지는 강대한 힘을 손에 넣으려는 야심가, 그 힘으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야욕가쯤으로 여겨졌는데.
막상 눈앞에 있는 광필두는 다른 펜리르 부대원들과 아무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냥 강해지고 싶어서 7성 무구를 모은다는 것도 최희와 마찬가지 생각이지 않은가?
정대식은 굳이 광필두를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스러워하며 말했다.
"광필두 씨는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겁니까?"
"제 볼일이 끝나는 대로 속히 떠날 겁니다."
"어제 말씀하신 바대로 7성 무구를 구매하려면 상당한 금액이 필요할 텐데요."
"그렇겠죠."
"그게 어느 정도 금액일지 짐작도 안 되는군요. 어떻게 그걸 구매할 만한 자금을 마련하셨습니까?"
정대식이 질문한 것은 그뿐만 아니라 이 거래에 대해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문하는 바였다. 제아무리 광필두가 조디악 공격대를 집어삼키고 공대장이 되었다고 해도, 그가 보유한 자금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수로 제이드 팔머에게서 7성 무구를 구매한단 말인가?
돈 문제라서 대놓고 묻기에는 민망한 감이 있었으나, 역시 광필두는 정대식의 짐작대로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의 야망은 둘째치고서라도 개인적으로 보면 소탈하고 솔직한 성격임이 분명해 보였다. 정대식이 묻는 말에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을 했던 것이다.
"달리 자금을 마련한 것은 아닙니다만, 7성 무구를 구매할 수는 있을 겁니다."
"자금이 없다면서 무슨 수로......."
다음 순간, 광필두는 정대식이 헉할 만한 소리를 했다.
"조디악 공격대를 팔 겁니다."
정대식은 깜짝 놀라 반문을 했다.
"조디악 공격대를요? 제이드 팔머에게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니......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가능하지 못할 것은 뭡니까."
그 말이 맞았다. 가능하지 못할 것은 없었다. 사실 조디악 공격대를 매각한다는 것은 광필두에게 있어 유리한 일이었다. 전 공대장인 강철우를 죽이고 강탈한 공대장 자리가 아닌가.
당연히 조디악 공격대 내부에서 반발이 극심했고, 그로 인해 조디악 공격대는 와해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사분오열되려는 공격대를 붙잡고 있는 것보다 차라리 대가를 받고 팔아버리는 게 더 나은 일 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것은 순전히 이해득실을 따져보았을 때의 이야기이고, 도의적으로 보았을 땐 참담한 일이었다.
광필두는 순전히 7성 무구를 빼앗기 위하여 조디악 공격대의 공대장이었던 강철우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랬으면 강철우 못지않은 카리스마로 조디악 공격대를 장악하고 전보다 나은 성과를 이루어내야 했다. 그래야지만 강철우를 거꾸러트리고 그 무기를 강탈한 것을 속죄할 수 있는 것이다.
한데 광필두는 조디악 공격대를 내팽개쳐놓고 있다가 또 다른 7성 무구를 얻기 위한 대가로 그걸 통째로 팔아버리겠다는 것이다.
응당 조디악 공격대원들 입장에서는 배신과 분노에 치를 떨 만한 일이었다.
이런 식으로 조디악 공격대를 팔아버릴 거라면 강철우를 살려두었어야 했다. 최소한 무기만 가지고 조디악 공격대를 떠났어야 했다. 그럼 팀장들 중에서 부대장으로 거론될 만큼 우수한 사람이 조디악 공격대를 맡아서 꾸려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럴 기회조차 박탈하고 공대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종내는 조디악 공격대를 물건처럼 팔아버리려 하다니. 도의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 예전의 정대식이라면 이런 부분을 깨닫지 못했을 터였다. 그러나 펜리르 부대장이 되고 휘하에 부하들을 거느리게 되면서 리더라는 입장이 가지는 책임감을 어느 정도나마 실감하게 되었다.
그렇다 보니 공대장이 직접 공격대를 팔아치운다는 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인지 체감이 되어, 절로 만류하는 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갔다.
"조디악 공격대를 넘긴다니, 그럼 휘하의 공격대원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들은 제이드 팔머의 지시에 따라 새로운 공대장을 맞이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조디악 공격대의 공대장은 다름 아닌 광필두 씨 당신인데......."
"대부분은 제가 공대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반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물러난다면 오히려 좋아하겠지요."
"아닌 사람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엄밀히 말해 물러나는 게 아니라 팔아버리는 거지 않습니까. 각성자도, 헌터도 아닌 일반인의 소유가 된다는 것인데......."
"거기에 불만이 있는 자들은 계약서를 찢어버리고 공격대를 탈퇴하면 될 일입니다. 어차피 공대장이 바뀌는 이상 조디악 공격대는 예전 같은 모습일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도 그렇지, 조디악 공격대는 평범한 곳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가장 규모 있는 공격대가 아닙니까? 그걸 하루아침에 보통 사람의 손에 넘긴다니."
광필두는 주절주절 떠드는 정대식의 말을 멀거니 듣고만 있었다. 정대식은 그가 자신의 말을 귀담아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정대식이 이러쿵저러쿵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