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
현질 전사
-9권 3화
정대식은 입을 다물었고 주위에 침묵이 내렸다. 그러자 광필두가 다시 이어폰을 귀에 꽂으며 달려가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정대식은 황급히 그를 붙잡았다.
"잠깐만요!"
"......."
멈칫해 쳐다보는 광필두에게 정대식은 서둘러 질문을 던졌다.
"강해지고 나면 무얼 할 겁니까?"
"무얼 하다니......."
"강해지기 위해서 7성 무구를 모은다고 했죠. 그럼 그걸 다 모아서 강해지면 뭘 할 거냐는 말입니다."
광필두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요."
"글쎄요 라니...... 광필두 씨가 7성 무구를 모으는 일에 대해 불안감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건 한 사람이 갖기에는 지나치게 큰 힘인지도 모릅니다. 강해지기 위한 방법이라면 다른 수도 많을 텐데요. 꼭 그걸 다 모아야겠습니까?"
그 말에 광필두는 정대식이 반박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올인원이라는 것도 한 사람이 갖기에는 지나치게 큰 힘이 아닙니까?"
"......."
"당신은 올인원인 데다가, 마기전이라는 무구까지 모아들이고 있지요. 왜 당신은 되고, 난 안 된다는 겁니까?"
올인원이 된 것은 더욱 효율적으로 강해져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이고, 마기전을 모으려는 것도 광필두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당사자를 앞에 두고 그런 소릴 들으니 설명할 말이 궁했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정대식을 보고 광필두는 계속 말했다.
"강해져서 무엇을 할 것인지는, 일단 강해진 후에 생각해 볼 겁니다."
광필두는 다시 음악을 들으며 달려가 버렸다. 홀로 남겨진 정대식은 뜻하지 않은 오지랖을 떨었다는 생각에 머리를 북북 긁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광필두가 세상 사람들이 염려하는 것처럼 악인은 아니라는 거였다.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광필두도 최희나 기철민이나 다른 헌터들처럼 그저 강해지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 그 힘을 수단으로 여기지는 않는 것이다.
'어쩌면 광필두의 저런 생각은 자연스러운지도 모른다. 만약에 광필두가 나와 같이 별난 신의 선택을 받은 인물이라면, 그 역시도 최후의 전쟁에 대해서 알고 있을 수도 있다. 거기에 대비하기 위하여 힘을 갖추려는 건지도 모르지.'
* * *
사막에 해가 뉘엿뉘엿 기울기 시작할 무렵.
코멧 저택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정대식과 김태희도 구색을 갖추기 위하여 제이드가 준비해준 정장을 차리게 됐다.
평소와 다르게 무구 하나 없이 광필두를 마주할 생각을 하니 좀 긴장이 됐다. 블랙 드래곤 스킨 아머와 마기전 중 그가 사용하던 레프트 뱀브레이스는 호놀룰루 방어기지에 수리를 맡겨둔 상태였고, 야마환과 티르빙은 아공간에 넣어두기는 했으나 광필두를 상대하기에 적합한 무기는 아니었다.
설령 적당한 무기가 있었다 하더라도 정장 차림에 그런 걸 갖추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엇보다 저택의 주인인 제이드가 비무장을 요구했던 것이다. 손님 된 입장에서 따르는 것이 옳았고, 비무장인 것은 광필두도 마찬가지일 터였으므로 정대식은 애써 정장 차림에 만족하려 들었다.
준비를 다 갖추고 밖으로 나간 정대식은 드레스 차림이 된 김태희와 마주쳤다. 정대식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조금 아연해서 말했다.
"드레스는 예쁜데......."
"예쁜데?"
한쪽 눈썹을 치켜드는 김태희를 향해 정대식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안경은 좀 벗지 그래?"
진줏빛의 드레스에 두껍고 시커먼 뿔테안경은 패션테러리스트라고 할 만큼 안 어울렸다. 그러나 김태희는 자신의 정체가 들통 나는 게 싫었는지 끝까지 그 안경을 고집했다.
"여기서 제가 누구인지 드러나면 곤란해지는 건 대장님이에요."
"그거야 그렇지만."
"준비 다 됐으면 이만 나가죠."
정대식이 김태희를 에스코트해서 복도로 나가자 마찬가지로 정장을 한 채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리즈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미스 김, 그 안경은 너무하지 않아요?」
「이게 없으면 안 돼요.」
리즈는 몇 마디를 투덜거렸으나 더 이상 참견하지 않고 앞장서 발길을 옮겼다. 그녀를 따라 자선 경매가 열리고 있는 홀을 지나쳐 갔다.
얼핏 보아하니 정확히 누구인지는 몰라도 유명인사라 짐작되는 사람들이 여럿 앉아있었다. 그들은 별 시답잖아 보이는 물건에 큰돈을 지불하고 있었다.
홀을 지나쳐 저택 깊숙한 곳으로 들어간 정대식은 응접실 같은 장소에 앉아있는 제이드를 보았다. 마찬가지로 턱시도를 차려입은 그는 느끼한 미소를 지으면서 정대식을 반겼다.
「잘 오셨습니다.」
제이드의 인사는 정대식 한 사람만을 향한 게 아니었다. 정대식이 뒤를 돌아보자 광필두와 광영식, 그리고 설유란 세 사람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서로 눈이 마주친 정대식과 광필두는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제이드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제이드가 태평하게 어깨를 으쓱여 보이면서 말했다.
"어차피 두 분이 원하는 물건들은 같은 장소에 있습니다. 굳이 따로 갈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손님이자 구매자 입장으로 와 있는 것이었고, 7성 무구라는 것을 정대식도 한 번쯤 보고 싶었기에 군말하지 않았다.
광필두도 정대식이 방해하리라 생각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훼방 놓아도 상관이 없는 것인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무표정으로 되돌아간 두 사람에게서 몸을 돌린 제이드가 곧 앞장서 갔다.
「제 보물창고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가 신전처럼 꾸며진 복도를 저벅저벅 걸어가자 자동으로 스캔이 되면서 그의 신분이 증명되었다. 곧 차례차례 복도에 깔려 있는 갖은 보안 장치들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이쪽으로 따라오시지요.」
복도 끄트머리에 다다른 제이드는 입구를 지키고 있는 두 명의 보디가드에게 눈짓을 보냈다. 곧 그들이 보물창고의 문을 열었고, 널찍한 엘리베이터가 보였다.
그 엘리베이터에 다 같이 몸을 싣자 엘리베이터가 빠른 속도로 하강하는 것이 느껴졌다. 곧 띵, 하는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고, 정대식은 앞에 선 제이드의 어깨너머로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광경을 보았다.
"우와!"
광영식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서 가감 없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제이드는 자신이 수집한 보물들을 전시하는 데 상당한 공을 들인 것이 틀림없었다.
마치 고대의 유적지처럼 꾸며놓은 지하 곳곳에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무구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제이드가 무구 중에서도 특히 갑옷에 관심이 많다고 하더니, 온갖 종류의 갑옷들이 마치 그곳을 수호하듯 늘어서 있어 장관이 따로 없었다.
「굉장하군요. 이걸 다 제이드 씨가 모으신 건가요?」
리즈가 놀란 표정으로 묻는 말에 제이드는 우쭐거리며 답을 했다.
「물론이죠. 하나같이 상당한 값어치를 가진 것들입니다. 이 중에는 값을 따질 수 없는 물건들도 있죠. 예를 들자면 마기전과 같은 것 말입니다.」
제이드는 허공에서 손가락을 딱 튕기며 말했다.
「미확인 23번 무구, 레프트 퀴스 소환.」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허공이 우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이지러졌다. 곧 공중에 제이드가 불러내고자 했던 무구가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다름 아닌 마기전의 한 파츠인 레프트 퀴스였다.
「이것이 레프트 퀴스로군.」
당연한 말이지만 그것은 라이트 퀴스와 똑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갑옷의 골격만 있는 것 같은 다소 허술해 보이는 외양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만 한 위력을 갖고 있는지 잘 알고 있기에, 다리 쪽 파츠를 완성하게 된 것이 자못 기뻤다. 뱀브레이스와는 달리 퀴스는 짝이 안 맞아 정대식이 이미 갖고 있는 것도 사용을 못 하고 있었는데, 실전에 투입하면 얼마만 한 효과를 낼지 기대가 됐다.
「제 소장품을 올인원께 드리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닙니다.」
「이것을 얻기 위해 하와이에서 큰일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괜찮으시다면 세계 유일의 올인원인 정대식 씨에게 몇 가지 선물을 더 하고 싶습니다.」
제이드 팔머의 선물이라 하면 무구일 가능성이 컸다. 그러잖아도 탐나는 물건이 많아 보였기에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헤르보르를 쓰러트리느라 고생한 대가라고 생각해 정대식은 얼른 대답했다.
「그래 주신다면야 저야 감사하지요.」
「그럼 레프트 퀴스는 포장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정대식이 목적한 물건을 확인시켜 준 제이드 팔머는 곧 광필두를 돌아보았다.
「당신에게도 보여드릴 것이 있지요.」
그는 다시 한 번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다.
「브릴리언트 아우라 아머 소환.」
7성 무구는 마기전과는 전혀 다른 식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제이드가 소환 주문을 쓰자 허공에서 눈부신 빛이 어지럽게 춤을 추었던 것이다. 프리즘과 같이 현란한 광선이 공중에서 뒤엉키더니 곧 불꽃처럼 타올랐고, 그게 갑옷과 같은 형체를 띠더니만 구현화되어 나타났다.
그것을 본 광필두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그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면서 중얼거렸다.
「이게 바로 7성 무구에 속해 있는 갑옷, 브릴리언트 아우라 아머로군요.」
제이드는 고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정말로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 갑옷은 광필두 같은 거한보다는 호리호리한 여인에게 더 잘 어울리겠다 싶을 만큼 아름다웠다. 전체적인 모양새는 중세의 풀 플레이트 아머와 비슷해 보였으나 관절 부위가 따로 없었고, 대신 그 자리에 일렁이는 불꽃 같은 빛 덩어리가 붙어있었다. 은백색으로 발광하는 몸체의 뒷부분에는 마찬가지로 너울 치는 빛 덩어리가 달려 있어 그게 갑옷을 허공에 띄우고 있었다.
광필두는 흡족한 기색을 입가에 띤 채 제이드를 돌아보고 말했다.
「좋아. 계약서에 사인하지. 조디악 공격대와 이 갑옷을 맞바꾸겠다.」
그 말을 듣고 잠자코 있던 설유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잠깐만요, 공대장!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정대식은 그 반응을 보고 설유란이 아무것도 들은 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유란은 광필두의 팔을 붙잡고 영문을 캐물었으나 광필두는 그 손을 뿌리치며 짧게 말할 뿐이었다.
"들은 바대로다."
"조디악 공격대와 저걸 맞바꾸겠다는 것은...... 조디악 공격대를 버리겠다는 것입니까?"
"거기에 내가 죄책감이라도 느껴야 하는 것인가?"
"당연하지요! 당신이 조디악 공격대에 저지른 짓을 생각해보세요! 이럴 거면 왜 조디악 공격대의 공대장이 된 것입니까? 7성 무구를 손에 넣은 즉시 그냥 떠났으면 됐잖아요! ......설마, 7성 무구와 맞바꾸려고 조디악 공격대까지도 손아귀에 넣었던 겁니까?"
"제이드 팔머의 소유가 되는 것은 조디악 공격대도 반길만한 일이다. 저자가 갖고 있는 재력과 무구라면 범국제적인 단체가 되어 지금보다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과는 상관없어요! 가까스로 당신이 공대장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는데...... 배신자라 손가락질받아가면서 당신을 편들었던 대원들은 어떡할 겁니까?"
"난 편 들어달라고 한 적이 없다. 이 이야긴 그만하지. 끝난 결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