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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질 전사-210화 (210/297)

# 210

현질 전사

-9권 11화

* * *

정대식은 펜리르 부대원들이 러시아로 출발할 준비를 하는 동안, 차를 돌려줄 겸, 최희를 만나보기 위하여 그녀의 저택으로 향했다.

사실 펜리르 부대원들을 맞이하기 위해 비행장으로 나오지 않겠느냐 연락을 해놓았으나, 아무런 답이 없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입장의 변화가 있을 것 같아 러시아행에 관해서도 그렇고 한번 이야기를 해봐야 할 듯했다.

언제 봐도 멋들어진 대문과 정원을 지나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리자 최희가 아닌 최선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정대식 씨."

"최선 씨."

최선의 얼굴은 걱정으로 흐렸다. 그녀의 낯빛이 어두운 것을 보자 최희가 어떤 결정을 할지 이미 짐작이 됐다. 아니나 다를까, 최선은 간절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정대식 씨, 이미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예. 광필두에 대한 일 말이죠."

"그자가 이능 파괴 능력을 갖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그게 사실인가요?"

"안타깝지만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을 무력화시킬 방법을 찾을 때까진 누구도 상대할 수 없는 거 아니에요? 자칫 잘못하다간 가지고 있는 능력을 모조리 잃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더구나 7성 무구를 네 개나 가지고 있는데."

"그렇죠."

"그런데도 언니는 그자와 겨뤄보고 싶은가 봐요. 제가 말려보려 해도 이미 마음을 정한 모양인지 귀담아듣는 눈치가 아니에요. 정대식 씨가 제발 언니를 좀 설득해주세요."

정대식은 거의 울려고 드는 최선을 달래며 말했다.

"그러잖아도 그 일 때문에 온 겁니다. 최희 씨는 어디 있습니까?"

"2층으로 올라가 보세요."

정대식은 차 키를 최선에게 넘겨주고 발길을 올렸다. 저택을 반원형으로 감싸고도는 근사한 대리석 계단을 올라 2층으로 올라가자 응접실처럼 꾸며진 공간이 보였다.

뭐 묻을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새하얀 샤무드 소파 위에 최희는 편안한 실내복 차림으로 앉아있었다.

조금 나른해 보이는 얼굴로 최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대식을 반겼다.

"복장이 칠칠치 못해서 미안해."

"아냐. 그보단 내 연락을 못 받았나?"

"아니, 받았는데 어쩐지 컨디션이 나빠서......."

화장기 없는 얼굴이 답지 않게 창백했다. 정대식은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손바닥에 맨살이 닿고 보니 아차 싶었으나 최희는 그 손을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듯 이마를 붙여와 도리어 정대식의 얼굴이 붉어지려 들었다.

"손이 시원하네."

"......열이 좀 있는 것 같은데."

"이모탈 삼인방인지 뭔지 하는 놈들과 대결하느라 좀 무리했나 봐."

"무리라고? 고작 그런 애송이들과 겨루는데?"

정대식이 하는 말에 자세를 바로 한 최희가 정색을 했다.

"놈들이 애송이일지는 몰라도 타고난 능력만큼은 탁월했어. 만약 그들이 경험과 실력을 쌓게 된다면 얼마만큼 성장하게 될는지 모르지. 무려 PCC에서 엄선한 자들로만 구성된 팀이잖아?"

"그럴지도 모르지만 네 입에서 무리라는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라서."

최희는 힘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라고 천하무적은 아니야."

"그렇겠지. 그러니 나와 같이 가자."

그녀는 이미 정대식이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정대식이 국가기물금고를 지켜달라는 부탁을 거절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펜리르 부대원들까지 전부 귀환했으니 그가 무언가 다른 일을 기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을 테다. 어쩌면 강영후로부터 어떤 언질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경로가 어찌 되는지는 몰라도 최희는 정대식의 말에 섣불리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정대식은 불현듯 그녀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광필두를 막아내는데 굳이 네가 나설 필요는 없어. 국가기물금고에 있는 뢰를 빼앗기는 일은 필연적인 일이야. 그보다는 듀라한이 갖고 있는 7성 무구를 지키게 하고 우리 쪽의 전력을 갖추는 게 더 급선무야."

정대식이 설득하는 말에 최희는 한숨 같은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정대식의 손에서 손을 잡아 빼고 말했다.

"네 생각하고는 상관없이 정부에서는 7성 무구를 순순히 내줄 마음이 없어. 이미 랭킹 상위권에 들어있는 헌터들 중 다섯이 집행자로 선정되었다."

정대식은 눈을 크게 떴다.

"집행자라고?"

"그래. 광필두가 본색을 드러내었으니 사정을 안 봐주고 무조건 잡아들이겠다는 것이겠지. 네가 광필두를 저지하겠다고 나섰다면 일이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네게 거절을 당했으니 집행자라는 다소 강제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광필두를 막으려는 거야."

"집행자 자리는......."

"거절이 불가능해. 현실적으로는 거절을 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할 방법이 거의 없기는 하지만, 법적으로는 죄를 짓게 되는 셈이지. 각성자 총연맹과 헌터 협회에서도 제명당하게 되고, 국가로부터 받는 모든 원조가 끊기는 데다가 가지고 있는 자산이 동결되게 돼."

최희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일단 집행자로 지목이 되면 맡은 임무를 실행하는 척이라도 해야 해. 무시하는 건 그다지 현명한 일이라고 할 수 없지."

정대식은 입술을 꾹 물었다.

"하지만 넌 내 부대의 일원이기도 하다. 부대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강력하게 항의하겠어."

"소용없는 일이야. 집행자의 의무는 각성자라면 피해갈 수 없는 일이지."

"의무? 좆 까! 그딴 거 무시해버려!"

최근의 일로 여러 가지로 실망한 정대식은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최희는 그와는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대한민국 최고의 헌터로 슈퍼스타라고까지 불리며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공인인 것이다.

최희는 차분하게 정대식을 불렀다.

"부대장님."

"......무슨."

"펜리르 부대원 김태희로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오늘부로 전 펜리르 부대를 탈퇴하겠습니다."

"뭐라고?"

정대식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화를 내고 싶지는 않았으나 영문 모를 화가 치밀어 오르려고 했다. 정대식이 감정을 억누르느라 입을 꽉 다물자 최희가 그 틈을 타서 계속 말을 이었다.

"본래대로라면 김태희라는 인물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최희로서의 나는 타이탄 공격대의 일원이 아니니 펜리르 부대원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김태희의 존재는 애초부터 없는 것으로 생각해주십시오."

"잠깐만 기다려. 네가 김태희로 가장하면서까지 펜리르 부대에 들어온 데에는 목적이 있었잖아."

정대식은 서둘러 지난 일을 상기시켰다.

"내 곁에 있으면서 강해질 방법을 찾으려는 게 아니었나?"

"맞아. 그럴 생각이었지. 하지만 돌이켜 보니 그건 일종의 핑계가 아니었나 싶어."

"핑계라고?"

"네 곁에 있을 이유를 만들어내고 싶었던 거야."

최희는 당황하는 정대식을 향해 미소 지었다.

"줄곧 부정해왔지만 이제는 인정해야 할 것 같아. 넌 내게 있어 특별한 사람이야. 그게 이성적인 것인지 아니면 미지의 강자에 대한 끌림과 동경인 것인지는 나도 몰라. 단순히 남녀 사이로만 생각하기에는 네게 갖는 감정이 복잡하니까."

정대식은 입술을 들썩거렸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뭘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최희의 표현은 매우 정확했다. 정대식이 그녀에게 갖는 감정 역시도 그러했다.

단순히 여자로만 보기에 그녀의 존재감은 지나치게 강렬했다. 아스모데우스와 싸웠을 때 정대식이 가장 두려워하는 상대가 최희로 나타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동경과 흠모, 시샘과 불가해함 같은 것이 뒤섞여 있었다.

정대식이 해야 할 말을 찾지 못해 헤매는 사이, 최희의 표정이 일변했다.

그녀는 정대식에게 갖는 말랑말랑한 감정을 지워버리고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야수와 같은 살기를 드러냈다.

그러자 화사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하면서 주위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하지만 그 감정에 휘둘리고 싶지는 않아. 광필두라는 강자를 눈앞에 둔 지금으로써는 그를 대적해야겠어."

정대식은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끼고 물었다.

"광필두와...... 싸우겠다는 말인가?"

최희는 입술을 들어 올려 이를 드러냈다.

"당연한 일 아닌가?"

그녀는 열병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이글거리는 눈을 하고 뇌까렸다.

"광필두는 너와는 또 다른 강함을 갖고 있지. 이능 파괴의 능력이라...... 듣도 보도 못한 능력이지."

정대식은 다급히 말했다.

"잘못하다간 네가 가진 능력을 모조리 잃어버릴 수도 있어! 그런 위험을 감내하고 광필두와 싸울 필요가 있다는 말이야? 적어도 어떤 준비가 된 다음에......."

"한계 없이 성장하고 있는 너라면 어떤 준비를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아니야."

최희는 한숨을 토해냈다.

"내가 네 비밀을 파헤치면서까지 강해지기를 열망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그건......."

"내 성장은 이미 멈췄어. 난 벌써 정점에 이르렀고 그 이후로는 무엇도 이룰 수 없었지. 어쩌면 네게서 일말의 희망을 엿보았는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눈앞의 적에 집중하고 싶군."

최희는 이미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그 눈에 흔들림이 없어 어떤 말을 해도 설득할 수 없으리라는 게 강하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순순히 물러날 수가 없어 정대식은 확신하지 못하는 약속을 언급했다.

"나라면 가능해. 나는 네 능력을 지금보다 더 강하게 끌어올릴 수 있다. 펜리르 부대원들의 경우를 봤잖아? 그건 네게도 해당이 가능한 이야기라고! 조만간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내어 널 훈련할 수 있어!"

최희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원하는 건 훈련이 아니야. 강해지는 것이지."

"광필두와 싸우는 것은 강해지는 게 아니라 위험을 자초하는 거야!"

정대식이 그렇게 소리를 치자 최희가 묘한 표정을 했다. 마치 정대식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듯 희미한 질책이 섞인 표정이었다.

"나는 단순히 신체 기능의 향상이나 마력량의 증가나 그 효율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니야. 나를 능가하는 적과 상대하여 사선을 넘어야지만 획득할 수 있는 강함에 대해서 말을 하는 거야."

정대식은 이번에야말로 말문이 딱 막혔다.

정대식은 그런 식의 강함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는 여전히 부와 명예를 내팽개쳐가면서까지 강해지려는 헌터들이 어리석다 생각했고, 헌터가 가지는 의무나 책임에 대한 자각도 희미했다.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의 모든 것은 일신의 영달과 관련이 있었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무형의 가치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최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고 그녀를 설득할 말도 궁했다.

정대식이 입을 다물자 최희가 그를 달래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광필두와 싸워 이긴다면 그 훈련이라는 것을 하면 좋겠네."

정대식은 심통이 나서 안 해도 될 말을 내뱉어 버렸다.

"그건 내 부하들에게만 베풀어줄 수 있는 혜택이다. 김태희라면 또 모를까......."

최희는 웃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대식은 내심 나중에라도 다시 펜리르 부대로 돌아오겠다고 말하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그런 말을 하지 않았고, 정대식은 부대원 한 명을 잃어버린 채 그 저택을 떠나오는 수밖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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