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1
현질 전사
-9권 12화
Chapter 53. 하이에나와 하이에나
이튿날, 펜리르 부대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원래대로라면 이곳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거나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오르거나 했겠지만, 현재로썬 모스크바로 가는 모든 교통편이 마비된 상태였다.
몬스터 소굴이 되어버린 그곳으로 가고자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에, 시가지로 가서 차편을 따로 알아봐야 했다. 그래서 펜리르 부대는 시내로 들어가 하루 머무르며 모스크바로 갈 방법을 찾는 한편으로는 러시아 내 상황을 알아보기로 했다.
모스크바를 잃어버린 후로 러시아의 주요 정치와 경제는 전부 동부권으로 옮겨온 상태였다. 그렇기에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사회의 중심지가 되어 굉장히 번영해 있었다.
물론, 러시아 다른 지방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지 옛 영광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1차 몬스터 브레이크 때 몰린 피난민들로 인해 도시는 무질서하게 성장했으며 내전으로 인한 전쟁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시가지 한복판에서도 어렵지 않게 탱크나 총기를 찾아볼 수 있었으며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대부분 몸이 말랐고 안색이 나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무리의 동양인들을 보고도 무관심했으나 군인들은 달랐다.
「어이, 거기!」
거친 음성으로 부르는 군인들에게 붙잡혀 세워진 펜리르 부대원들은 모조리 여권 검사를 당했다. 공항에서도 이미 취조 아닌 취조를 당한 후였기에 다들 그러려니 하고 여권을 넘겨주었다.
정대식은 엔트로피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어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헌터입니다. 몬스터 사냥을 위해서 입국했습니다.」
「......뭐라고?」
안타깝게도 정대식은 러시아어 발음이 굉장히 나빴다. 영어까지는 엔트로피의 번역 기능으로 거의 실시간 대화가 가능했으나 러시아어로는 무리인 듯했다.
정대식은 잠깐 기다리라 손짓하고 엔트로피를 실체화했다. 허공에 갑자기 어린 소녀가 나타나자 군인들이 깜짝 놀라 총부리를 겨누었다.
"엔트로피, 통역해. 겁먹을 필요 없다고."
엔트로피는 앞으로 나서 약간 기계적이지만 유창한 러시아어로 말했다.
「우린 헌터입니다. 몬스터 사냥을 하기 위해 왔습니다.」
군인은 그들이 헌터라는 말을 듣고 흥미를 드러냈다.
「헌터라고? 어디서 왔지?」
「한국에서 왔습니다.」
「한국에도 몬스터 사냥을 할 곳은 많을 텐데.」
「한국은 땅이 좁으니까요. 크게 한탕 하기에는 이곳이 낫겠지요.」
「어디로 가려고?」
「모스크바 쪽으로 가볼까 합니다.」
엔트로피가 하는 소릴 듣고 군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모스크바라고? 자네들 죽고 싶어 환장했나?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어.」
「몬스터 둥지가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게 아무것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지. 제 발로 죽으러 가겠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글쎄.」
군인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여권을 돌려주었고, 정대식의 의식을 전달받은 엔트로피가 질문했다.
「모스크바로 가기 위해선 어떡해야 합니까? 차를 빌릴 만한 데가 있습니까?」
「차라면 빌릴 수 있겠지만, 모스크바까지는 무리야. 필요한 정보가 있으면 광장에 있는 헌터 협회에 가봐. 거기서 도움을 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대식은 부대원들을 이끌고 광장 주변에 숙소를 잡았다. 거기서 짐을 풀게 하고 서지원과 함께 헌터 협회에 방문했다.
헌터 협회라고는 하지만 외관은 초라했다. 다 쓰러져가는 건물에 제대로 알아볼 수조차 없는 간판을 달고 있었다.
내부도 사정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전형적인 러시아 남자처럼 생긴 얼굴이 붉은 중년 사내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여긴 무슨 일이냐!」
러시아에 있는 것치고는 얇은 옷차림이라 어쩐지 추워 보이는 엔트로피가 나서서 말했다.
「저희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모스크바로 가려고 하는데요.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모스크바?」
그 남자는 군인과 마찬가지로 한참 동안 모스크바의 위험성에 대해 늘어놓았다. 그러나 정대식이 꿈쩍도 하지 않자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배짱 있는 헌터는 오랜만에 보는군! 이쪽으로 오지. 헌터 등록증은 가지고 있겠지?」
정대식이 한국에서 발급받았던 헌터 등록증을 내밀자 그것을 스캔해 본 러시아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그는 도무지 못 믿겠다는 듯 스캔한 정보와 정대식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별안간 큰 목소리로 외쳤다.
「올인원? 올인원이라고? 자네가 말인가!」
정대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남자는 입을 딱 벌리고 중얼거렸다.
「대한민국에서 모든 능력을 다 갖춘 각성자가 탄생했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세상에! 그렇담 그게 사실이었단 말인가?」
「제가 올인원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아니,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하와이 제도를 탈환한 것 말이야!」
남자는 느려터진 컴퓨터로 어렵사리 어떤 기사를 찾아냈다. 거기에 영어로 하와이 제도에 대한 소식이 쓰여 있었다. 자세히 읽어보지 않아도 서펜트와 헤르보르가 처치되었다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그 남자는 모니터를 뚫을 듯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이거, 자네가 한 거지?」
「예, 그렇습니다.」
「맙소사!」
남자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뒤편으로 허둥지둥 달려갔다. 덩그러니 남겨진 서지원이 말을 알아듣지 못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야기가 잘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까?"
"분위기가 나쁘지는 않아. 여기 사람들이 내 존재를 아는 것 같군."
"역시, 대단하시군요."
잠시 후, 남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우르르 몰고 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덩치가 크고 얼굴이 붉었으며 수염이 부숭부숭한 데다가 곰 사냥꾼같이 요란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덕분에 굳이 묻지 않아도 그들이 각성자임을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 사람이 진짜 올인원이란 말인가?」
「못 믿겠어. 이렇게 비리비리하게 생긴 놈이 올인원이라고?」
「랭킹 99위라기에는 지나치게 기운 없어 보이지 않아?」
정대식은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 귀를 쫑긋 세웠다.
랭킹 순위가 99로 오른 모양이었다.
아마 서펜트와 헤르보르를 처치한 일로 크게 올랐을 터였다.
「하와이 제도에 있는 몬스터 둥지들이 다 박살 났다던데.」
「그럼 모스크바에 있는 몬스터들도 끝장낼 수 있는 거 아냐?」
「내가 말했잖아! 모스크바를 되찾을 가능성이 있는 거라고!」
그들은 정대식을 도외시하고 자기네들끼리 열띤 토론을 나누었다. 그런데 온몸에서 술 냄새가 풀풀 나는 것이 좀 취한 것 같았다.
정대식은 적당한 타이밍에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어 용건을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다들 목소리가 시끄러워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처음 사무실에 있었던 남자가 갑자기 손바닥으로 이마를 딱 쳤다.
「아! 그러고 보니.......」
그는 다시 용케 기능하고 있는 컴퓨터를 작동시켜 메일함을 열었다. 그리고 거기에 도착해 있는 메일 중 하나를 열어보고 말했다.
「오늘 아침에 한국에서 메일 한 통을 받았었어. 타이탄 공격대에서 온 거였는데. 영어라서 대충 읽고 말았지.」
「어디 봐봐. ......맞잖아! 올인원이 이쪽으로 올 거라고 되어 있네! 메일 확인해놓고 도대체 뭘 한 거야?」
「아침에 숙취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거냐?」
자기네들끼리 또 한바탕 소란을 벌이던 그들은 마침내 정대식에게 주의를 돌렸다.
「아까 모스크바로 간다고 그랬던가? 거긴 왜 가려는 것이지?」
「당연히 몬스터를 잡으러 가는 것이지요.」
「거긴 하와이 제도와는 차원이 달라! 제아무리 올인원이라고 하더라도 위험해.」
「그래도 서펜트와 헤르보르를 처치한 인물이다. 8성급 몬스터를 혼자서 쓰러트렸으니 동료들과 함께라면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리는 것도 가능할지 모르지.」
체르노보그 이야기가 나와서 정대식은 서둘러 물었다.
「체르노보그는 자신의 영역이 있는 던전으로 돌아간 것 아니었습니까?」
그러자 서로를 쳐다본 남자들이 난처한 표정으로 저마다 말을 이었다.
「그것이 확실하지가 않아.」
「모스크바 일대는 완전히 죽음의 땅이 되어 인간이 들어간 지 오래되었다고.」
「그런데 최근에 자꾸만 소규모 몬스터 브레이크가 일어나고 있으니.......」
「다시 체르노보그가 나타난다 해도 이상하지 않지.」
그들의 말에 따르자면 모스크바 일대가 몬스터의 왕국이 되어버린 데는 이유가 있다고 했다. 그 일대에 정체불명의 어둠이 깔려 있어 맑은 날에도 해가 잘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 어둠이 점점 확장되고 있으니, 체르노보그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게 아니냐는 거였다.
「몇 번이나 우리 쪽 헌터들이 그곳에 진입해보려 했으나 실패했어.」
「부정한 프리스트와 비숍이 좀비 떼처럼 버글거리는 곳이니까.」
「엄청난 정화력이 있지 않으면 안 되는데, 성녀가 희생된 후로는 누구도 그곳에 가까이 가지 못해.」
과거 모스크바를 수복하기 위한 노력이 몇 차례나 있었다. 개중 가장 유명한 것이 북구의 성녀, 루나를 위시해 유럽 연합의 유명 헌터들이 총출동했던 모스크바 성전대였다.
루나는 그 당시 고작해야 열일곱으로,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정화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크비숍과 맞닥뜨린 결과는 참혹하여 아무도 살아나오지 못했다.
정대식은 온갖 흉흉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남자들을 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각오는 이미 한 바입니다. 그곳까지 갈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는데요.」
남자들은 더 이상 정대식을 말리려 들지 않았다. 대신에 모스크바까지 갈 방법을 일러주었다.
「노보시비르스크까지는 아직 열차로 갈 수 있어. 도중에 몬스터들이 습격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쨌든 철로가 이어져 있지. 거기서부터는 차를 구해서 가야 해. 운전사를 구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목적지가 목적지이니만큼 그건 어렵겠지.」
「문제는 자네가 동양인이고 현재 내전 중이다 보니 검문검색이 강화되어 이동하기가 여러 가지로 불편할 거야. 군대의 보증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괜찮으면 우리 쪽에서 적당한 인물을 소개해주겠네.」
정대식은 저녁에 다시 헌터 협회에 들르기로 약속을 했다. 그들이 블라디미르 대령에게 그를 소개하고 통행증을 받아다 주겠다는 것이었다.
정대식은 감사를 표시하고 나중을 기약해 사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고 있던 서지원에게 간단히 상황 설명을 했다.
"안전하게 모스크바까지 가려면 통행증이 필요할 거라는군. 저녁에 그것을 발급해줄 블라디미르 대령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될 거야."
"확실히 내전 중이라 군인들도 많이 보이고 분위기가 하 수상하네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아닌 널 동행시킨 거지 않나."
서지원은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대식은 여차한 경우 손쉽게 자리를 피할 수 있도록 서지원과 동행을 한 것이다.
"저녁에도 너와 같이 갈 테니까 알고 있어라."
"예."
두 사람은 찬 바람을 뚫고 숙소로 가기 위해 잰걸음을 옮겼다.
한데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미행이 따라붙은 것 같아서 정대식은 걸음을 빨리했다.
그가 별안간 속력을 빨리하자 서지원이 불안한 투로 질문을 던져왔다.
"왜 그러십니까?"
"누가 우릴 따라오고 있다. 그렇다고 뒤를 돌아보거나 하지는 말고."
"안 봤습니다. ......적당한 곳에서 따돌릴까요?"
"아니, 어쩌면 반군 쪽 사람들일 수도 있다. 듀라한을 만날 루트를 알려줄지도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