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
현질 전사
-9권 15화
눈가에 솟아난 눈물을 훔친 대령은 곧 기억을 더듬는 표정이 되어 말했다.
「뭐, 어떻게 보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만 자네는 체르노보그를 실제로 본 적이 없잖은가.」
「자료 영상이라면 보았습니다.」
「그런 거로는 체르노보그의 힘을 느낄 수가 없지. 난 모스크바 출신이었네.」
「혹...... 체르노보그를 실물로 보신 겁니까?」
「그래. 나는 놈이 모스크바를 파괴하던 때 거기 있었다. 가족들의 희생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그곳을 탈출했지. 그 이후 일어난 일들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하지만 단언컨대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 경험했던 모든 고통과 아픔은 체르노보그를 보았을 때 느낀 절망과는 비교할 수가 없어. 놈의 이름이 왜 체르노보그겠나?」
대령은 눈을 부라리고 신음하듯 말했다.
「놈은 몬스터라고 분류할 수 없는 존재다. 그것은 암흑신이야! 감히 인간이 대적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지.」
「......저는 불과 얼마 전에 5대 거신이었던 거대 괴수 중 한 마리인 헤르보르를 처치했습니다만.」
「헤르보르 같은 것은 잔챙이에 지나지 않아. 5대 거신이니 뭐니 하는 건 다 사람들이 갖다 붙인 말일 뿐이야. 체르노보그는 헤르보르와는 급이 다르다.」
「체르노보그는 대략 15성급...... 몬스터 위험 분류도의 최상위급에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말했잖아. 놈은 몬스터가 아니라고. 말 그대로 악마, 신이다!」
블라디미르 대령은 그런 식으로 정대식을 위협했으나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리겠다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진 않았다.
그는 우선순위를 알고 있는 것이다. 반군과의 싸움도 중요하지만 체르노보그를 없애는 게 더 중요했다.
모스크바 출신이라는 말이 뒷받침하듯이, 대령은 언젠가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려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설사 정대식이 놈을 죽이는 데 실패하더라도 그것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으므로,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더욱이 정대식이 언급했던 계획, 듀라한과 광필두를 싸우게 놔두고 그 사이에서 이득을 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정대식과 펜리르 부대원들은 블라디미르 대령이 보낸 군인들과 함께 열차에 오르게 된 것이다.
「기차가 도착했습니다. 가시죠.」
대령에게 펜리르 부대의 지원을 일임 받은 인물은 미하일 소령이었다.
그의 인도로 펜리르 부대원들은 기차에서 가장 좋은 일등석에 배정을 받았다. 침대칸이라 누워서 잘 수도 있는데다가 창이 넓었으며 탁자와 캐비닛, 조그만 욕실이 따로 딸려 있었다. 더욱이 식당칸과도 가까워 이용하기 편리했다.
"왠지 시베리아 횡단 열차 하면 굉장히 궁핍할 것 같았는데, 으리으리하네."
김송근이 중얼거리는 말에 허미래가 대꾸했다.
"뒤쪽 일반석은 궁핍하겠지.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타더라고."
"그런데 이제 이걸 타고는 시베리아 횡단 못 하잖아. 이름 바꿔야 하는 거 아냐?"
쓸데없는 잡담을 나누며 열차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부대원들의 분위기는 평이했다.
그들은 군인들이 동행하게 된 데 의아한 기색을 드러내면서도 굳이 그 이유를 캐묻지 않았다.
정대식을 온전히 믿고 있었기에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다들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쩌자고 그런 약속을...... 체르노보그는 최대한 피해 가는 것 아니었습니까?"
"어차피 우리 목적은 마기전이잖아요. 굳이 그런 괴물과 싸울 필요는 없습니다."
이재우와 기철민이 차례대로 하는 말을 듣고 정대식은 지적했다.
"최대한 피해가자는 것이 우리 계획이기는 하지만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한다는 것도 우리의 계획이다. 그러니 큰 골자는 달라진 게 없어. 그리고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릴 수만 있다면, 우리는 큰 수확을 얻게 될 것이다. 그로 인해 더 이상 광필두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마기전과 또 다른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까?"
기철민의 질문에 정대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우리가 공략하는 던전에서 나오는 마정석에 대해 합의한 바를 다들 인지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정대식은 말을 이었다.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리고 나서 획득할 마정석은 그 값어치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로 인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능력 또한 비약적으로 성장하겠지. 그냥 마정석을 정산한다고 하더라도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다. 아마 죽을 때까지 던전에 들어가지 않아도 될 만한 돈일 거다. 그만하면 목숨을 걸어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겠나?"
정대식이 하는 말에 침묵이 흘렀다. 침묵은 긍정의 뜻. 정대식은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리는 것은 여태까지 해왔던 그 어떤 사냥보다 위험한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직 우리에겐 놈을 맞닥뜨리기 전까지 시간이 있어. 모스크바에 있는 놈의 던전에 당도하기까지는 험로일 것이다. 러시아 영토의 절반이 둥지화 되어 몬스터가 버글버글하니까. 체르노보그에게 다다를 때까지 충분한 훈련을 거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잠자코 있던 고덕화가 불쑥 내뱉었다.
"그것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그 말에 부대원들이 다들 씨익하고 사나운 웃음을 지었다.
정대식은 그들의 얼굴에 자신감이 되돌아온 것을 보았다. 그러나 어느 상황에서고 냉철한 기철민은 다른 동료들이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는 사냥 이후의 일을 지적했다.
"하지만 용케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린다고 하더라도 외적인 위험이 아예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러시아 놈들이 하이에나와 같은 짓을 우리에게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죠."
기철민은 체르노보그를 사냥하고 기진한 펜리르 부대를 러시아 군인, 혹은 각성자들이 급습하여 획득한 것을 빼앗고 살해할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대식은 열차 칸 바깥쪽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군인들을 힐끗 눈짓하고 말했다.
"저들이 우리를 따라 체르노보그의 영역까지 들어와서도 살아남는다면 그럴지도 모르지."
정대식은 그들이 제 명을 다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원 이야기가 나왔을 때도 완강하게 거절했다.
지원 부대를 딸려 보내 주겠다는 블라디미르 대령의 속셈이야 뻔한 것이고, 무엇보다 애꿎게 희생당할 목숨들이 아까웠던 것이다.
「체르노보그 사냥이라면 내 부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군인들을 데리고 가봤자 죽임당할 뿐입니다.」
「내 부대는 보통 부대가 아니야. 각성자들로만 이루어진 특별한 부대지. 몬스터와 이능자인 반군을 상대로 신물 나게 싸워온 놈들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어지간한 헌터 뺨치는 실력들이니까. 도움이 되면 됐지 방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대령의 말을 거절하지 못하고 미하일 소령이 이끄는 특수지원부대와 동행해야만 했다.
그들의 인원은 총 쉰 명이었는데, 과연 개중에 몇이나 살아남을지 의문이었다. 그리고 그 우려는 오래지 않아 현실로 나타났다.
Chapter 54. 마왕
철컹철컹...... 철컹철컹.......
기차 달리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어 있던 정대식은 다른 침대칸에서 수런거리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일단 눈을 뜨고 나니 순식간에 의식이 맑아져 밖으로 나가자 허미래와 이재우가 복도 차창에 달라붙어 있었다.
"무슨 일이지?"
정대식이 밖으로 나온 것을 보고 두 사람은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밖을 가리켰다. 별다른 것이 보이지 않아서 고개를 기울이자 허미래가 난감한 듯이 말했다.
"아까부터 열차 달리는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지 않아요?"
"거의 고속수준으로 달리고 있는데요."
그러고 보니 차창 밖의 풍경이 쌩쌩 지나치는 게 평균적인 속도보다 훨씬 빨랐다. 승객들이 잠든 시간을 틈타 속력을 내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째 점점 더 빨라지는 것 같았다.
결국 다른 부대원들까지 모조리 잠에서 깨자 밖에서 군인 한 명이 들어와 상황 설명을 했다.
「몬스터들이 열차 뒤를 쫓아오고 있습니다. 놈들을 떼어버리려고 속력을 내는 중이니 신경 쓰지 말고 들어가서 주무시죠.」
「몬스터라고요? 무슨 몬스터 말입니까?」
「이 근방에 코카트리서스가 자주 출몰합니다.」
코카트리서스라면 닭과 흡사하게 생긴 몬스터로 3~4성급의 꽤 위협적인 몬스터였다. 저위험도 던전에서는 보스몹으로 등장하기도 하는데, '놈들'이라고 말한 게 신경 쓰였다.
「코카트리서스가 몇 마리나 쫓아오는 겁니까?」
군인은 이상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당연히 떼거리지요. 한 20~30마리 정도는 될 겁니다.」
그 말을 듣고 정대식은 기가 찬 표정이 됐다. 코카트리서스가 떼로 출몰하다니. 과연 러시아 스케일이라고 해야 하나. 몬스터에 점령당한 나라답다고 생각하면서 정대식은 열차가 탈선할 듯 위태롭게 덜컹거리는 것을 보고 말했다.
「놈들을 따돌릴 수는 있는 겁니까?」
「여긴 평원이라서 철로가 곧습니다. 최고 속력으로 달리면 가능할 겁니다. 설령 따돌리기 힘들다고 하더라도 용병들이 해결할 겁니다.」
열차는 몬스터로부터 승객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으로 용병들을 고용하고 있었다. 그들이 동승한 채 열차를 위협하는 놈들을 처치하는 것이다.
그들의 실력이 어떻게 되는지는 몰라도, 그로 인해서 기차 비용이 많이 비싸진 모양이었다.
제일 뒤쪽의 가장 값싼 자리를 사기 위해서도 한 가족의 한 달 생활비가 깨진다고 했다.
일단은 알겠다고 대답하고 정대식은 부대원들을 각자 잠자리로 돌려보냈다. 그 역시도 침상으로 되돌아왔으나 열차가 부서질 것처럼 달리고 있는데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정대식은 잠자코 앉은 채 주의 확장으로 몬스터가 몇 마리나 있는지 살펴보았다.
'열차 뒤를 쫓아오고 있는 놈들이 대략...... 스무 마리 정도인가? 그리고.......'
의식을 집중하고 있던 정대식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열차 진행 방향 쪽에서 몬스터가 감지되었던 것이다.
어떤 종류인지는 몰라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열차가 그냥 치고 지나갈 수도 있겠지만 워낙에 빠르게 달리고 있는데다가 덩치가 제법 있는 녀석이면 탈선할지도 모른다.
그러자 정대식의 머릿속에 절로 대참사가 그려졌다. 그때, 기관실에서도 철로를 가로막고 있는 몬스터를 알아챈 모양이었다.
삑삑-
요란하게 휘슬 소리가 울리며 별안간 지붕이 쿵쾅거렸다. 정대식이 창문을 열고 밖으로 목을 길게 빼자, 열차 지붕 위로 무장한 사내들이 여럿 달려가는 게 보였다.
그들이 다름 아닌 용병인 모양이었다.
각성자일 그들의 행색은 보통의 헌터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몸에 와이어를 매달고 있었는데, 선두에 당도하자 그 끄트머리에 달린 쇠고리를 열차 가장자리에 붙어있는 안전바에 걸어서 몸을 고정했다. 그런 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전방을 향해서 바주카포와 같은 무기를 쏘아냈다.
퍼-엉!
굉음과 함께 앞쪽에서 불빛이 번뜩였다. 차창에 머리를 내민 정도로는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다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정대식이 주의 확장으로 감지해본 바로 몬스터는 소멸하지 않았다. 놈은 아직 살아있었고 별안간 기차가 브레이크를 밟기 시작했다.
끼기기기기기기긱-!
고속으로 달리다가 브레이크를 잡으니 열차 안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으아아악!"
"꺄아아아!"
사람들이 나동그라지며 비명이 울렸고 짐칸에 올려두었던 짐들이 다 쏟아지며 소란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