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 전사-217화 (217/297)

# 217

현질 전사

-9권 18화

정대식이 베푼 친절에 남자가 연신 감사를 표시하며 말했다.

「여러분은 러시아 사람이 아닌데 어디서 오셨습니까?」

「저흰 한국 사람들이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오는 길입니다.」

「거기서 여기까진 어인 일로......? 몬스터 사냥을 온 겁니까?」

「그렇습니다. 혹, 체르노보그에 대한 목격담이나, 최근 정보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까?」

정대식의 질문에 남자가 헉하는 소리를 삼켰다.

「체르노보그라고요? 그걸 잡으러 가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그걸 잡을 생각을 다.......」

남자는 곧 그들을 호위하고 있는 군인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군대와 함께 있는 거군요.」

그자는 우려 섞인 감탄사를 몇 마디 내뱉다가 쓸 만한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사실 모스크바로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라 체르노보그가 목격되지는 않았습니다. 일단 거기까지 가야 뭘 보든지 말든지 할 테니까요. 하지만 체르노보그가 만들어내는 암흑이 점점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죠. 카잔과 소치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영역에 낮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낮이 사라진 상태라고요?」

「24시간 깜깜하고 춥다는 뜻이죠. 그리고 카잔을 넘어가면 거기에 피의 왕자 포로녜치가 버티고 있습니다.」

「포로...... 포로녜치?」

「예. 7성급은 되는 아주 강력한 몬스터입니다. 이놈이 카잔에 자신의 둥지를 틀었는데 이게 성채와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어 접근하기조차 쉽지 않습니다. 바바야가라는 세 명의 마녀들이 그 성벽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어서 쉴 새 없이 끓인 시체를 들이붓거든요.」

「끓인 시체.......」

「성채 안에는 이두나 삼두 트롤이 득시글거리고요,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성입니다. 거기 가장 깊숙한 곳에 포로녜치가 있다고 하는데, 이놈이 여왕개미처럼 끊임없이 몬스터를 생산해낸다고 하지요. 일단 그놈을 잡아야 모스크바로 갈 수 있을 겁니다.」

「우회하는 길은 없습니까?」

「포로녜치의 성채 주변은 즈메이라는 땅속 괴물이 엉망진창으로 헤집어 놓았습니다. 놈들이 쉴 새 없이 땅을 찢어놓으니 위험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지요. 포로녜치의 성채를 통과하는 게 가장 빠른 길입니다.」

「그렇군요.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화를 마치고 남자는 자리로 돌아갔다. 그때 잠시 자리를 비웠던 미하일 소령이 돌아와 말했다.

「차가 준비되었습니다. 식사를 끝마치셨으면 이동하시죠.」

펜리르 부대는 마련된 지프 두 대에 나눠 탔다. 그 외에 군인들이 탄 지프가 세 대 더 따라붙었고 총 다섯 대의 차량이 나란히 달려서 도시를 벗어났다.

시가지를 벗어나기가 무섭게 황폐화된 농가와 도로가 보였다. 아스팔트가 보수가 되지 않아 곳곳이 깨어지고 갈라져 무너졌으며, 가로등이나 전신주가 맥없이 쓰러져 있었다. 텅 비어버린 건물들이나 폭격을 맞아 부서진 종탑 같은 것도 심심찮게 보였다.

그야말로 세상의 종말에나 봄 직한 울적한 광경이 계속 이어져, 정대식은 창밖 풍경을 보는 대신 잠을 청했다.

* * *

덜컹덜컹.

차가 심하게 흔들리는 바람에 정대식은 잠에서 깨어났다. 어느새 주위에 비가 오고 있었고 바닥의 길이 콘크리트로 바뀌어 있었다.

사정이 안 좋기는 콘크리트 길도 마찬가지라, 차가 요동을 쳐댔다. 도무지 잠을 잘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억지로 깨어있는데, 문득 이상한 것이 보였다.

'이 벌판에 웬 사람들이지......?'

마을이 있을 만한 장소가 아닌데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 저편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서 있는 게 보였다. 정대식은 운전대를 붙잡고 있는 군인을 향해 물었다.

「저 사람들은 저기서 뭘 하는 겁니까?」

그러자 군인이 힐끗 그쪽을 보고 나서 무성의한 태도로 말했다.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신경을 쓰지 말라니.......」

저도 모르게 주의 확장으로 그쪽에 신경을 쏟고 있던 정대식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으아아아아앙!

'아기 울음소리?'

귀청을 찢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에 불길한 예감이 들어 정대식은 엔트로피를 날려 보냈다.

"가서 무슨 일인지 살펴보고 와."

<알겠습니다.>

엔트로피가 즉시 날아가고 링크된 시야로 그곳의 상황이 보였다. 사람들은 메마른 들판 한가운데 있는 바윗돌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 바위 위에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발가벗겨진 채 누워 있었고 머리를 산발한 여자가 그 앞에서 무어라고 중얼거리며 몸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비수를 꺼내어 아이의 팔을 베었다.

"엔트로피!"

정대식은 저도 모르게 차 문을 벌컥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자 엔트로피가 즉시 여자를 후려치고 칼을 빼앗아 들었다.

의아한 것은 여자가 아이를 해치려 하는데도 주위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멀거니 엔트로피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정대식은 곧장 그 사람들을 헤치고 가서 아기를 품에 안아 들었다. 비를 얼마나 맞았는지 아기의 몸이 몹시 차가웠다.

정대식은 웃옷을 벗어서 그 아기를 싸면서 여자를 향해 소리쳤다.

「지금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엔트로피에게 밀쳐졌던 여자는 비틀비틀 일어났다. 그리고 비통한 듯 소리쳤다.

「오오! 마왕께 바칠 제물이 더럽혀지고 말았어!」

정대식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마왕이라고?」

그러자 두려움에 찬 사람들이 바닥에 엎드리며 마왕의 이름을 울부짖었다.

「용서해주십시오, 마왕이여!」

「위대하신 마왕, 체르노보그시여!」

「체르노보그! 체르노보그!」

정대식은 그 기이한 광경을 보고 몸을 떨었다.

'뭐라는 거야 이 사람들은? 미쳤나? 왜들 이래?'

도무지 상식 밖의 일이라 받아들일 수가 없는 가운데, 뒤늦게 그를 쫓아온 부대원들과 군인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정대식은 미하일 소령을 보고 따지듯이 물었다.

「이 사람들이 지금 왜 이러는 겁니까? 왜 체르노보그를 마왕이라 부르는 거죠?」

미하일 소령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자들은 이 근방에서 성행하는 암흑 교도들입니다. 다름 아닌 체르노보그를 마왕으로 추앙하고 제물 같은 것을 바치는 광신도들이죠.」

그는 곧 비에 젖어가는 입술을 깨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제물은 핑계일 뿐이고 단지 먹을 것이 없어 입을 줄이려는 것뿐입니다. 짐승 같은 놈들.......」

미하일 소령은 땅바닥에 엎드려 울부짖는 사람들을 걷어차고 주먹질해 내쫓으려 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수가 꽤 많았다.

대략 6, 70여 명쯤 되었기에 그들이 흩어지기는커녕, 주변으로 모여들자 왠지 모를 위기감이 들었다.

그것은 미하일 소령도 마찬가지였는지 그가 품에서 비수를 꺼내 들었다. 보통 물건이 아닌 듯 마력의 빛이 흐르며 파르스름하게 번뜩이는 날이 야수의 이빨처럼 보였다.

미하일 소령은 그것을 사람들에게 휘두르며 위협했다.

「물러서!」

하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그들은 이미 어떤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다.

결국 미하일 소령이 잇새로 소리를 내뱉으며 비수를 휘둘렀다. 그걸 보고 정대식이 황급히 그의 팔을 붙잡아 제지했다.

「뭐하는 겁니까? 보통 사람들이잖아요!」

「당신 눈엔 이 사람들이 보통으로 보입니까?」

「그렇다고는 하나 일반인입니다. 능력을 써서 해치는 것은.......」

그때였다.

"피스 오브 마인드!"

파아아아아아-

새하얀 마력의 빛이 깃털처럼 사방팔방으로 흩날렸다. 그러자 두려움에 질려 무표정하게 굳어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생기가 돌아왔다.

그들은 뭔가에서 깨어난 것처럼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허미래가 그들 앞에 나서서 말했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세요. 여긴 여러분이 있을 곳이 아닙니다."

희한하게도 한국어로 말했는데도 사람들이 그 말을 알아듣고 몸을 돌렸다. 곧 그들이 흩어져버리고 정대식은 허미래를 보고 물었다.

"무슨 방법을 쓴 거지?"

허미래는 생긋 웃었다.

"제가 새로이 얻은 능력이에요. 제 치유 능력은 신체뿐만이 아닌 정신에도 미치는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누그러트리거나 설득하는 게 가능해요. 하지만 그 효과가 그렇게까지 대단치는 않아요. 무언가에 강렬하게 사로잡혀 있다거나 한 사람에게는 듣지 않아요. 그 사람이 강하게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도 없고요."

허미래가 쑥스러운 듯 덧붙이는 말에 정대식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충분히 굉장한 능력이야."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네요."

약간 얼떨떨해 있던 미하일 소령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 도망치려던 여자를 가리키며 외쳤다.

「저 여잘 붙잡아!」

다름 아닌 아기를 죽이려던 여자였다.

미하일 소령은 붙잡혀 온 그 여자를 부하들에게 넘기고 명령했다.

「살인 미수다. 가서 감옥에 처넣고 중죄로 다스리라 해!」

「알겠습니다.」

미하일 소령은 정대식에게서 아기를 받아가며 말했다.

「아기는 부모를 수소문해보겠습니다. ......아마 도망친 광신도 무리 중에 있을 거라고 생각되지만요. 보호자가 없으면 시설로 가게 될 겁니다.」

아기의 상처를 치료해준 정대식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분으로 아기를 군인들에게 넘겨주었다.

시설로 가게 된다 하니 절로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다. 그 아이가 겪게 될 앞일이 걱정스러웠으나 궁극적인 문젯거리는 다름 아닌 체르노보그였다.

몬스터를 마왕으로 떠받들며 신봉하다니. 세상 말세라는 기분이 들었다.

정대식은 다시 지프에 오르며 물었다.

「저런 일이 자주 일어납니까?」

미하일 소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는 인간의 영역이 아닙니다. 몬스터들의 영역이라 해도 다름없는지라, 지옥이 따로 없죠.」

「사태가 이 정도로 심각하다면 내전을 할 게 아니라 몬스터 토벌부터 먼저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 말은 듀라한을 보고 하십시오. 그자가 항복하고 죗값을 달게 받는다면 내전은 끝날 것이고 몬스터도 토벌할 수 있을 겁니다.」

「듀라한은 아마 정부 탓이라고 말을 하겠지요. 러시아 정부의 폭정은 익히 알려진 바가 아닙니까?」

미하일은 정대식의 말을 듣고 입술을 비틀었다.

「외국인이니까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 있겠지요. 체르노보그로 인해 국토의 절반을 몬스터들에게 빼앗겼습니다. 추위와 굶주림으로부터 국민들을 지켜야 하는 상황에서 보통의 민주적인 정치가 가능할 것 같습니까?」

미하일의 말대로 외국인인 정대식으로선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미하일도 그 사실을 꿰뚫어본 듯이 차갑게 내뱉었다.

「이런 상황이 끔찍하고 안타깝다면 오로지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리는 일에만 집중해주십시오. 놈이 죽고 나면 모스크바 일대를 뒤덮은 암흑이 가시고 몬스터들의 세력은 크게 약화될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겠지요. 만일 그리된다면 우리는 그 은혜를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정대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몬스터가 나타난 것 같습니다.」

「몬스터라고요?」

미하일 소령이 움찔해 창밖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어 물안개가 짙었으므로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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