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3
현질 전사
-9권 24화
정대식은 팔만 위어울프로 변해 휘두르고 있던 미하일 소령에게 다가가 말했다.
「내 감지 능력이 듣질 않는군요.」
미하일 소령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아마 암흑 영역으로 들어온 탓일 겁니다.」
정대식이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벌써 그렇단 말입니까?」
「카잔까진 아직 거리가 있지만, 보아하니 암흑 영역이 더 확장된 모양입니다. 그리되면 사방이 사력으로 뒤덮이게 되니 몬스터를 감지하는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소용없을 수 있습니다. 주위가 온통 몬스터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렇군요. 더 주의해서 이동해야겠는데요.」
미하일 소령은 고개를 끄덕이고 근심스런 표정이 됐다.
「벌써 암흑의 기운이 이곳에까지 미치다니...... 정말로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리지 않는다면 러시아 전역이 몬스터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습니다. 이 암흑은 체르노보그가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놈이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려 드는 것이지요.」
「그럼 체르노보그가 던전 밖에 있을 가능성이 크겠군요.」
「첫 번째 몬스터 브레이크 때 모스크바를 파괴한 체르노보그가 자신의 둥지인 던전 부근을 벗어나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놈이 던전으로 돌아가 활동하지 않고 있다면 암흑 영역이 넓어질 이유도 없겠지요.」
미하일 소령의 말을 듣고 정대식은 체르노보그가 상당히 지능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닥치는 대로 주위를 파괴하고 집어삼켜 욕구를 채우기보다는 점차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가며 몬스터들을 퍼트리고 있는 것이다.
헤르보르와 마찬가지로 5대 거신이라 불리는지는 모르겠으나 헤르보르보다 더 강력할 거라는 사실이 짐작이 됐다.
'최소한 15성급인가. 어쩌면 그보다 더 강력할지도 모르지. 이 광활한 땅을 전부 자신의 둥지로 만들어버리고 있으니.'
주의 확장 스킬까지 마비되고 나자 벌써부터 체르노보그의 뱃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났다. 정대식은 불길한 기분을 떨쳐버리려고 애쓰며 말했다.
「휴식은 좀 더 가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미하일 소령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이 자리에서 하는 것이 나을 겁니다. 암흑 영역으로 들어왔다면 휴식할 만한 시간이 없으리라 보는 것이 맞을 테니까요.」
그는 두려움 섞인 표정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러시아 사람들은 이 암흑 영역을 간혹 암해(暗海)라고 부릅니다. 바닷속처럼 어둡고, 해일처럼 몬스터가 들이닥친다는 뜻이지요.」
* * *
"으아악!"
"조심해!"
함정에 걸려든 서지원이 땅속으로 쑥 꺼지는 걸 보고 누군가 소리를 쳤다. 그러나 서지원이 바닥에 촘촘히 꽂혀있는 창날 위로 떨어지기 전에 허미래가 그를 잡아챘다.
"와이어!"
"으헉, 허억!"
서지원은 십 년 감수했다는 표정으로 함정에서 기어 나왔다. 그러기가 무섭게 사방팔방에서 독침이 날아들었다.
퓨부부붓!
"놈들이다!"
"마력장!"
정대식은 고리 형태의 마력장을 날려 데스 레인저 몇 놈을 처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깊은 숲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데스 레인저를 다 잡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이건 완전히 게릴라 전이구만."
기껏 손에 넣은 티르빙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기철민이 몹시 투덜거렸다. 데스 레인저들의 공격 방식은 게릴라전이라고 말할 만했다. 이놈들은 주위에 펼쳐진 숲 곳곳에 오만 함정을 설치해 놓았다. 그물은 물론이거니와 방금 서지원이 당한 것처럼 땅이 쑥 꺼지기도 했고 별안간 뜰채나 갈퀴 같은 것들이 날아들기도 했다.
대원들이 그 함정에 혼이 쏙 빠져 있으면 어디서 나타나는지 모를 데스 레인저들이 곳곳에서 습격해왔다. 이들은 주로 원거리 공격을 했는데 독이 발린 침이나 화살 따위를 날렸다. 근접전에도 강해서 시미터와 비슷해 보이는 짤막한 곡도를 기가 막히게 휘둘렀다. 사냥칼과 정글검 그 가운데쯤 되어 보이는 이 무기는 대단히 날카로워 닿기만 하면 살이 쩍쩍 갈라졌다.
정대식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데스 레인저를 보고 짜증을 느꼈다. 이 숲은 평범한 숲과는 그 모양이 한참이나 달랐다. 암흑 영역을 타고 번진 던전의 식물들이 자라나 있어 해괴망측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군데군데 식인 식물이 섞여 있는 데다가 보통 숲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해충에 함정까지 도사리고 있으니 짜증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대식은 미하일 소령을 돌아보고 물었다.
「이 숲을 벗어나려면 얼마나 걸립니까?」
「글쎄요, 알려진 바로는 최소 반나절은 더 가야 합니다.」
「반나절이라.」
가뜩이나 이런저런 몬스터와 씨름하느라 카잔으로 가는 발길이 느려지고 있는데, 이 엿 같은 숲을 반나절이나 더 가야 한다니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정대식은 대원들을 훈련하느라 마력을 아끼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말했다.
「너무 오래 걸리는군요. 이 숲은 이미 던전 생태에 장악되어 버렸으니 정상적인 곳이라 볼 수 없습니다.」
「그렇지요.」
미하일 소령은 당연한 소리를 왜 갑자기 하느냐는 듯 의아해했다. 정대식은 그를 향해 놀랄 만한 말을 했다.
「그러니 이 숲을 몽땅 없앤다 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솔직히 러시아의 자연환경은 몬스터들과 내전으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으나, 한국에서 이능으로 숲을 파괴하거나 강을 오염시키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는 고로 숲을 몽땅 날려버리겠다고 작정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숲의 규모가 꽤 커서 숲과 함께 여기에 서식하고 있는 몬스터들을 죄다 날려버린다면 마력의 소모가 극심할 게 뻔했으므로, 가급적이면 무난하게 숲을 통과하려고 했다.
그런데 데스 레인저들의 수작이 몹시 짜증스럽고, 숲도 제대로 된 숲이라 할 수 없어 그냥 모조리 없애버리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미하일 소령은 큼지막하게 눈을 뜬 채로 중얼거렸다.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숲을 없앤다고요? 이걸 전부 다요?」
정대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부대원들과 함께 잠시 자리를 비키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대식은 마력장을 넓게 펼쳐 부대원들과 미하일 소령을 뒤덮을 만한 구체를 만들었다. 그걸 허공으로 띄워 보내고 엔트로피를 불러내었다.
"엔트로피. 아무래도 이 숲을 쓸어버려야 할 것 같다."
엔트로피가 정대식을 힐끔 보고 말했다.
<무슨 방법을 쓰실 겁니까?>
정대식은 손에 끼고 있는 야마환을 내려다보며 대꾸했다.
"아무래도 제일 간편한 건 이거겠지? 요정의 빵은 충분히 준비되어 있나?"
<약 다섯 개 정도가 남아있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그걸 미리 꺼내 가지고 대기하고 있어."
정대식은 야마환을 낀 주먹을 펼쳤다.
"야마환! 숲을 모조리 삼켜라!"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야마환에서 무형의 괴수가 튀어나와 숲을 휩쓸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것은 마치 거센 바람이 부는 것과 같아 보였다.
하지만 단순한 바람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허리케인이 특정한 형태를 띠게 된다면 마치 이런 모습일 것이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찬 무언가가 휩쓸고 지나가는 자리마다 나무가 뿌리 뽑히고 흙이 엎어졌다. 동시에 여기저기 숨어있던 함정들이 파괴되고 데스 레인저들이 허공을 날았다. 그들은 곧 공중에서 발기발기 찢어졌으나, 피나 살점 어느 한 조각도 남지 않았다. 마치 다른 차원으로 사라져버리듯이 순식간에 없어져 버렸다.
콰아아아아아아!
그 광경을 보고 마력장 안에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는 미하일 소령은 입을 쩍 벌렸다. 여태까지 펜리르 부대의 이런저런 활약을 계속해 보기는 했으나 정대식의 진면목이라고 할 만한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정대식은 부대원들의 전력 상승을 위해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정말로 긴급한 상황에만 조금씩 실력 발휘를 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정대식이 실제로 그 능력을 발휘하는 광경을 보니 놀랍다 못해 무시무시하기까지 했다.
「이것이 한 인간의 능력이라는 말인가!」
가장 기가 막힌 것은 이렇게나 강력한 정대식의 랭킹 순위가 99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미하일 소령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정대식의 랭킹 순위는 수정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사실상 50위권...... 아니, 최소한 30위권 안에는 드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아니, 파워 랭킹은 10위권 이내가 분명해 보였다.
왜냐하면 듀라한의 파워 랭킹이 항상 10위권 안쪽이었는데, 미하일 소령이 보기에는 정대식의 위력 또한 그 못지않았던 것이다. 광활한 숲 하나를 제자리에서 파괴해버릴 정도의 광범위한 힘이라면 혼자서 군단 하나와 맞먹는다는 듀라한과 비견될 만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려도 들었다.
왜냐하면 파워 랭킹 10위권의 그 듀라한조차 체르노보그를 상대할 수 없다 판단하고 모스크바로 진격하기를 꺼렸다. 그가 정부군보다 몬스터와의 싸움에 열을 올리고 있으니, 응당 체르노보그의 처단을 우선해야 했다. 만약 그가 체르노보그를 처치하고 모스크바 수복에 성공한다면 러시아 정부에서도 마냥 그를 반란군 취급할 수가 없어져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 성전대가 처참한 결말을 맞이하는 바람에 듀라한도 몸을 사리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과연 정대식이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릴 수 있을지, 걱정과 기대가 어지럽게 얽혔다.
"으헉!"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정대식의 주변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숲을 모조리 집어삼킨 야마환이 사그라지고 남은 것은 극심한 허기였다.
말이 허기지 자칫 잘못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기아였다.
뼈에 가죽밖에 안 남은 정대식은 서둘러 요정의 빵을 섭취했다.
"우걱우걱...... 으으음...... 야마환이 간편하긴 한데 역시 후유증이 만만찮아...... 이걸 어떻게 완화할 방법이 없을까?"
정대식의 질문에 엔트로피가 태연히 대답했다.
<제게 물으신 것이라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 내가 너한테 뭘 기대하겠냐? 그보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는데 야마환이 좀 더 커진 것 같지 않아?"
정대식의 질문에 엔트로피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게 어떻게 커진단 말입니까?>
정대식은 답답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커진다는 게...... 그러니까 느낌상 더 강력해지는 것 같지 않으냐고. 처음엔 눈앞에 있는 뭔가를 잡아먹는 정도의 느낌이었는데. 브세슬라브 잡을 때까지만 해도 그랬단 말이야. 그런데 헤르보르를 먹여서 그런가, 어째 위력이 세진 것 같아."
엔트로피는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정대식 님이 야마환에 꼬박꼬박 먹이를 주고 있으니까요. 그게 M급 이상의 아이템이라면 성장하는 것도 가능하겠지요.>
"그런가?"
보통 M급 이상의 아이템은 성장이나 진화가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모든 무구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마기전처럼 현재 성능이 별 볼 일 없어도 특정 조건을 갖출 경우 그 위력이나 형태가 변모한다면 M급 이상으로 쳐주는 것이다. 티르빙이 M급 이상의 무구라고 감정된 것도 그 이유가 컸다.
그러니 애초부터 M급이라 감정되어 있던 야마환이 성장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유였다.
'갈수록 위력이 커진다니 좋긴 한데...... 그만큼 후유증이 무기다 보니 좀 찜찜한데?'
정대식은 걸쩍지근한 기색으로 야마환을 한번 쓸어 만지고 말했다.
"아무튼 이거로 골치 아픈 구간은 통과할 수 있게 됐군."
정대식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마력장을 바닥으로 내리고 그 안에 있던 부대원들과 미하일 소령의 안전을 확인한 뒤 말했다.
「그럼 가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