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6
현질 전사
-10권 3화
후욱-
일순 바람이 뒤로 후퇴하듯 주변의 공기가 떠밀려갔다.
다음 순간, 그 바람이 다시 해일처럼 등 뒤에서부터 밀어닥쳤다.
정대식이 자신의 마력을 기철민에게 전송함에 따라, 주변의 기류가 그 흐름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다.
정대식의 마력량이 워낙에 방대하다 보니 거의 기상이변이 아닌가 싶을 만큼 세찬 바람이 성벽 위를 휩쓸었다.
"으윽!"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음에도 기철민은 놀란 듯 잠시 휘청거렸다. 그러나 곧 중심을 바로잡고 자신을 열어 정대식의 마력을 받아들였다.
금세 허용치를 초과해버리는 그 막대한 마력을 티르브링어에 쏟아붓자, 티르브링어가 발작이라도 하듯 그 날이 길게 솟구쳐 나왔다.
콰아아아아아아!
마치 불의 기둥과 같이 뻗어 나온 티르브링어를 기철민은 가누는 것조차 힘겨워했다.
밀어닥치는 정대식의 마력을 받아들이는 것도, 그 마력을 티르브링어로 집중하는 것도, 그로 인해 거대한 힘을 내포하게 된 티르브링어를 가늠하는 것도 힘에 부치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길지 않았다.
몇 미터나 되는 거대한 불길이 된 티르브링어를, 한계점에 이르러 기철민이 있는 힘껏 휘둘렀다.
"하아아아아아앗!"
길게 내지르는 기합성을 따라 티르브링어가 하늘로 솟구쳤다가, 아래로 내리꽂혔다.
굳이 시동어를 외치거나 기술을 쓰거나 할 필요도 없었다. 정대식의 마력으로 인해 거대해진 티르브링어가 단 한 번, 성문을 후려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꽈------------------------아아아아아앙!
굉음이라고 하기보다는 어떤 충격에 가까운 소리가 천지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티르브링어의 불길과 같은 날에 얻어맞은 성채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우르르르 떨렸다. 그러자 성벽 위에 즐비하던 각종 무기며 쇠붙이들이 아래로 쩌렁쩌렁 소리를 내며 굴러떨어지기 시작했다.
곧, 티르브링어에 직격당한 성문이 폭탄이라도 다량 투하한 것처럼 폭발하듯 완전히 터져버렸다.
쿠콰와와아아아아아아아앙!
콰과과과광!
쾅쾅쾅!
지브리니스는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린 불벼락에 괴성을 지르며 자빠졌다. 그 머리 위로 폭발한 성문의 잔해가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곧 그 폭발이 전이되듯 성벽 곳곳이 터져 오르며 곧,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산사태라도 일어난 것처럼 성채의 외벽을 구성하고 있던 온갖 것들이 땅 위로 굴러 내렸다.
거기에는 성채 밑에서 공간 분리에 갇혀 꼼짝을 못하고 발악하던 몬스터 떼가 있었다. 그러자 서지원이 재빨리 능력을 거두어들였고, 성채의 잔해가 고스란히 몬스터 떼의 머리 위로 덮쳐들었다.
"꾸에에에에엑!"
"뀌아아아악!"
"캬아아아아아악!"
인간으로 따지자면 사람 살려와 마찬가지일 몬스터 떼의 비명이 성채의 단말마와 뒤섞여 울려 퍼졌다.
그 광경을 기철민을 부축한 채 허공에 뜬 정대식이 지켜보고 있었다.
기철민은 몸에 진이 다 빠졌는지 그 광경을 지켜볼 정신도 없는 것 같았다.
정대식의 마력을 받아들이는 게 어지간히도 벅찼던 모양이라, 그에게 간단히 각성 스킬을 써주고 지상으로 내려가 그를 부대원들 사이에 떨어트려 놓았다.
그런 뒤 서지원의 노고를 칭찬해 주었다.
"네 역할을 잘해주었다."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사력을 토해낸 서지원도 어지간히 기력이 빠져 보이는 모습이었으나 얼굴은 아까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사람이라기보다는 몬스터에 더 가까워 보이는 모양새였는데 지금은 원래의 기색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정대식은 그의 어깨를 한번 두드려주고 몸을 돌렸다.
성채가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많은 수의 몬스터가 깔려 죽거나 도망쳤다고는 하지만, 아직 남아있는 놈들이 있는 것이다.
곧, 성채가 무너진 충격에서 회복한 몬스터들이 펜리르 부대원들을 발견하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울부짖었다.
"키이이이이이!"
정대식은 사방팔방에서 덤벼드는 몬스터 떼를 보고 주먹을 말아 쥐었다.
"무적권!"
* * *
사방팔방에서 덮쳐드는 몬스터 떼를 정대식과 펜리르 부대원들, 그리고 미하일 소령은 무아지경으로 해치웠다.
놈들의 기세가 전과 같지 않았고 많은 수가 도망간 터라 몬스터를 처치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대강 정리가 되어 간다 싶어 성채 너머에 자리하고 있는 포로녜치의 둥지를 눈여겨보고 있던 그때.
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천지를 찢어발기는 둔중한 피어가 그들을 내리 덮쳤다.
"으으윽!"
"우와아아!"
다들 기겁해 귀를 틀어막으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실로 강력한 피어였다. 부대원들의 전력이 전과는 비할 바 없이 상승한 터라, 어지간한 피어는 잘 견뎌내는데도 이 피어에는 맥을 못 췄다.
심지어는 몬스터들마저도 식겁한 모습이었다.
오래지 않아 주위의 몬스터들이 하나둘씩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주변에 남은 몬스터가 한 마리도 없게 됐다.
무언가 심상찮은 기운을 느끼고 정대식은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자 온몸이 짜릿짜릿하게 떨리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기묘한 기분이 찾아들었다.
마치 전신의 세포 하나하나가 다 들고 일어나는 느낌이었다.
'뭐지?'
정대식의 의문은 곧 하늘을 날아드는 거대한 생물체의 모양새로 해결이 되었다.
체르노보그의 영역이라 시커먼 구름에 휩싸여 캄캄한 하늘 위를, 그보다 더 캄캄한 어둠이 날고 있었다.
화살대처럼 긴 모가지에 양옆으로 펼쳐진 엄청난 길이의 날개!
어둠 속에서 새빨간 두 눈을 불태우며 이쪽으로 날아오는 것은 다름 아닌 블랙 드래곤이었다.
'이런!'
정대식은 그 블랙 드래곤이 곧장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블랙 드래곤이 쏘아대는 살기가 온몸을 저리게 할 정도였다.
그제야 블랙 드래곤 스킨 아머를 내주며 장한나가 경고했던 말이 떠올랐다.
'동족을 만났을 때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고 그랬던가! 절대적인 호의가 아니면...... 적의!'
정대식은 부대원들에게 황급히 소리치며 날아올랐다.
"난 이 블랙 드래곤을 상대해야 한다! 너희들은 이 틈을 타서 포로녜치를 잡으러 가라!"
"대장님! 혼자서 어떻게 드래곤을 상대한단 말입니까?"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드래곤은 대부분 10성급을 웃도는 매우 강력한 몬스터였다.
드레이크나 바실리스크 등에 비해 개체 수가 적어서 보기가 힘들었는데, 개중에 블랙 드래곤은 특히 희귀했다.
블랙 드래곤을 보았다는 이야기도 드물고, 잡았다는 사람은 아예 없어서 블랙 드래곤의 공략 방법이나 그 전력이 얼마나 되는지도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정대식이 갖고 있는 블랙 드래곤 스킨 아머나 기타 블랙 드래곤의 무구들은 전부 던전에서 흘러나온 것들로, 인간이 제작한 물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만 일반적으로 드래곤의 피와 살이 마력 그 자체라 영약이 되었고, 뿔이나 가죽, 이빨과 뼈와 같은 것들이 무구로 제작할 경우 대단한 성능을 자랑하기에 블랙 드래곤 역시도 그 값어치가 굉장할 것이라 짐작되고 있었다.
물론 값어치가 있는 만큼 블랙 드래곤은 대단히 사납기로 유명했다.
사납기로 소문난 레드 드래곤보다 더 위험하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레드 드래곤보다 덩치는 더 작아도 그만큼 나는 속도가 빨랐고, 마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닿는 것을 모조리 녹여버리는 강력한 애시드 브레스를 토해내 수십 명의 헌터들이 동시에 덤벼들어도 당해낼 수가 없었다.
특히 애시드 브레스는 한번 토해내면 사라지지도 않고 반영구적으로 남아있으면서 주변의 모든 것을 계속해서 녹여냈다.
실제로 어느 던전에는 블랙 드래곤의 애시드 브레스로 만들어졌다고 여겨지는 산성 호수가 있었는데, 그게 끊임없이 주위의 것들을 녹여가며 크기를 확장하고 있었기에 던전 자체가 폐쇄되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다니며 그런 브레스를 마구잡이로 쏴대는 존재라니.
제아무리 그 몸뚱이가 값어치 있다 하더라도 꿈에서도 마주치고 싶지 않을 만큼 흉악한 존재인 것이다.
그런 블랙 드래곤이 정대식을 눈에 불을 켜고 따라오고 있었다.
캬아아----------------아아아아아아아!
정대식은 양다리에 착용하고 있는 마기전을 써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러자 다시 한번 블랙 드래곤의 피어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럴 때마다 블랙 드래곤 스킨 아머의 표면에 돋아나 있는 미세한 비늘이 파르르 떨렸다.
동족을 만나 반응이라도 하듯이 블랙 드래곤 스킨 아머의 상태가 평소와 달랐다.
정대식은 사력이 뒤섞여 시커먼 먹구름 속을 날아 블랙 드래곤을 유인하려 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그 생각이 매우 어리석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블랙 드래곤의 나는 속도가 제트기 저리 가라는 수준이었으므로 금세 따라잡혔던 것이다.
정대식의 뒤통수에 닿을 듯이 바짝 날아온 블랙 드래곤이 허공에서 애시드 브레스를 토해냈다.
콰르르르르르르르르르!
상공에서 마치 구름이 피어오르듯이 산과 독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애시드 브레스가 퍼져나갔다.
그것이 정대식을 뒤덮어 와 그는 황급히 마기장을 펼쳐 자신을 스스로 보호했다.
한데 놀랍게도 자신의 마력으로 만들어낸 그 마력장조차 녹아내리는 것이 아닌가!
'놀랍군! 내 마력마저도 녹여버리는 브레스라니!'
한 방이라도 잘못 맞았다간 골로 갈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블랙 드래곤의 나는 속도가 지나치게 빨라 따돌리거나 유인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정대식은 작은 체격과 방향 전환이 자유자재인 마기전을 이용해 곡예 하듯 어지러운 비행을 선보였으나 블랙 드래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블랙 드래곤이 시전하는 마법에 걸려들고 말았다.
-프리즈!
"어억!"
별안간 몸이 단단하게 굳어버리며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단순히 신체만 굳어버린 것이 아니라 마력의 흐름까지 완전히 차단되어 순식간에 몸이 무거운 돌덩이처럼 아래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엔트로피!'
정대식은 의식으로 황급히 엔트로피를 불러내어 위기를 모면했다.
엔트로피가 정대식을 받아내기 무섭게 블랙 드래곤의 갈고리같이 거대한 발톱이 날아들었다.
퍼억!
그 발톱이 엔트로피를 후려쳐 구현이 해제되어버렸다.
엔트로피가 사라지자 다시 몸이 추락하였으나 마법의 효과가 끝난 덕분에 다시금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정대식은 은신과 교란, 신속을 한꺼번에 써서 블랙 드래곤의 시야를 피해 날아다니며 의문을 품었다.
'이상하다. 방금 블랙 드래곤의 시동어가 들린 것 같았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그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다시 머릿속으로 블랙 드래곤의 음성이 들려왔다.
-매직 미사일!
사방팔방에서 수백 개의 매직 미사일이 빗발치며 날아다녔다.
보통의 마법사들이 쓰는 유사한 마법과는 완전히 수준이 달랐다.
도무지 피할 수가 없어 정대식은 그것을 모조리 얻어맞았다.
마기장을 쓸 수도 있었겠지만 마기전은 기본적으로 마력을 많이 잡아먹었다.
그보다는 강철 신체와 블랙 드래곤 스킨 아머의 방어력을 믿는 게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