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8
현질 전사
-10권 5화
엔트로피는 더 이상 아동복이 어울리는 그런 여자아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소녀와 처녀의 경계에 걸쳐 있는...... 사람으로 따지자면 대략 17, 19세 정도의 나이로 보였다.
그만큼 키도 커지고 이목구비도 또렷해져 이제는 진짜로 인간 같아 보였다.
"엔트로피?"
<말씀하십시오.>
"너 정말 엔트로피 맞아? 진짜 인간 같아졌잖아."
<레벨 업에 따른 당연한 결과입니다. 제 모습은 정대식 님이 바라는 바대로 진화.......>
"그런 말은 됐고. 그보다 너, 걸칠 거 없냐?"
엔트로피의 모습이 지나치게 사람 같아져서 헐벗고 있으니 적잖이 민망했다.
원래 그녀가 걸치고 있던 옷은 크기가 안 맞아서 그런 것인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엔트로피는 정대식이 아공간에 쑤셔 넣어 두었던 방한복을 꺼내 입었다.
그때쯤엔 온몸을 휩싸고 돌았던 충격이 가셔 정대식은 제자리에 바로 설 수 있었다. 그러자 흥분으로 가슴이 벌렁거렸다.
"엔트로피, 일단 네 성능부터 확인해보자. 업그레이드가 되면서 변한 게 뭐지?"
<일단 외형부터가 정대식 님의 이상에 보다 가까워졌고.......>
"내 취향이 이렇단 말이야?"
정대식은 자긴 글래머 취향인데 하고 이상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말을 무시한 채로 엔트로피가 말을 계속했다.
<제 자유의사가 확장되어 스스로 판단하에 실체화가 가능하며, 정대식 님이 보유하고 계시는 스킬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대식은 그 말을 크게 기꺼워했다.
"그게 정말이야?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너도 할 수 있다는 소리네?"
<단, 몇 가지 제약이 따릅니다. 정대식 님과 링크가 가능한 거리여야 하고, 정대식 님의 마력량을 나누어 써야 하며, 제가 받는 충격을 정대식 님도 공유하게 됩니다.>
"잠깐만, 충격을 공유한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어찌 보면 정대식 님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으므로 제가 받는 타격이 정대식 님에게도 전해진다는 것이지요. 100%다 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만 아예 무관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네가 내 마력과 스킬을 자유롭게 공유할 수 있게 된 대신에 충격이나 아픔 같은 것도 공유하게 되었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흐음......."
여태까진 실체화한 엔트로피가 공격을 받아 사라진다거나 해도 이렇다 할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엔트로피가 정대식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존재이니만큼, 마력이 소실되는 감각만 있었지 충격 같은 걸 받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엔트로피의 자율성이 높아지는 만큼 정대식과의 의식 공유도 깊어지는 것인지 이제부터는 다를 거라 하니 좀 걱정이 되기는 했다.
그러나 엔트로피 스스로 상황에 맞춰 싸울 수 있다는 것은 그런 걱정을 날려버릴 만큼 대단한 메리트였다.
정대식이 구상하고 있는 에고 웨펀에 한없이 가까운 존재가 된 것이다.
"......그 부분은 알겠고, 그럼 내가 너랑 의식을 공유할 수 있는 거리는 얼마야?"
<대략 10km 정도입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그 외엔?"
<데모크리토스 님에 대한 정보가 새로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날 선택한 그 신이라는 작자 말이야?"
정대식은 최후의 전쟁이니 뭐니 하는 말을 떠올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엔트로피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재물과 탐욕, 대가의 신 데모크리토스 님께서는 여러 차원의 세계에 합당한 대가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정대식 님의 존재는 데모크리토스 님이 인류에 베푼 마지막 자비이십니다. 정대식 님께서 조만간 닥쳐올 최후의 전쟁에서 살아남아 레벨 10, 즉 이 시스템에 있어서의 만렙을 달성하여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신다면, 이 세계는 존속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레벨 10을 달성하지 못하고 최후의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이 세계는 멸망의 길을 걸을 것입니다.>
"살벌한 내용이구만. 그런데 꼭 내가 그놈의 최후의 전쟁에 대비를 해야 하는 거야?"
정대식은 팔짱을 끼고 몹시 투덜거렸다.
"내 목표는 어디까지나 잘 먹고 잘사는 것이지 지구를 구하는 영웅이 되는 게 아니라고.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왜 하필 나야?"
<그것은 데모크리토스 님의 선택에 관한 것이므로 제가 무어라 대답해드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뭐, 좋아. 어쨌든 간에 그 최후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내가 레벨 10이 되어야 한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정대식은 턱을 매만지며 의문했다.
"그런데 꼭 내가 만렙을 달성하지 않더라도, 그 어떤 몬스터도 다 쓸어버릴 수 있을 만큼 강해지면 최후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거 아냐? 왜 꼭 만렙이 되어야 해?"
정대식의 질문에 엔트로피가 정곡을 찔러왔다.
<상점 업그레이드에 드는 돈이 아까우신 것입니까.>
"아니...... 아깝다기보다는......."
내심 찔려 우물쭈물하던 정대식은 곧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쉬었다.
"사실이 그렇잖아. 1조도 운 좋게 블랙 드래곤을 잡지 못했더라면 벌지 못했을 돈이야. 무슨 수로 10조씩이나 되는 돈을 또 모아서 상점 업그레이드를 한다는 말이야? 그래 봤자 레벨 8이라고. 9가 되려면 100조, 10이 되려면 1000조 원이 필요한데 그게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돈이긴 해? 세계 1위 부자도 100조 정도의 재산을 갖고 있는 게 한계라고. 어지간한 국가 규모보다 더 큰 돈이잖아. 그걸 나 혼자서 무슨 수로 다 모아?"
엔트로피가 무심히 말했다.
<정대식 님께서는 감정 스킬을 업그레이드하실 수 있습니다.>
"갑자기 뜬금없이 웬 감정 스킬 타령이야?"
<더불어 다우징 스킬도 갖고 계시지요. 그 두 가지 스킬을 이용하신다면 100조의 값어치를 갖고 있는 몬스터, 혹은 아이템을 추적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럼 그것을 획득하여 상점 업그레이드를 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정대식 님께서 만렙을 달성하시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정대식 님께서 계속 자신의 길을 가신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일 겁니다.>
"......그리 말해주니까 마음이 놓이기는 하는데. 너 좀 이상하다?"
정대식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말했다.
"너 원래 이런 캐릭터 아니잖아? 되게 까칠하고 띠꺼운 거 아니었냐? 왜 갑자기 상냥해졌어?"
그러자 놀랍게도 엔트로피가 좀 쑥스러워하는 것 같은 기색을 드러냈다. 얼굴을 미미하게 붉히며 눈꺼풀을 내리깔았던 것이다.
<상점 업그레이드에 따라 제 성능도 향상된바, 자유의사가 확장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건 즉...... 네게도 감정이 생겼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그것참. 음."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정대식은 말을 얼버무렸다. 갑자기 엔트로피가 엔트로피가 아닌 낯선 여자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정대식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나중 일은 나중에 걱정하고, 지금 당장은 상점 업그레이드를 했으니 몇 가지 스킬을 보충해야지. 지금 내 자금이 얼마나 남았지? 아, 4200억 원 정도가 있겠군. 그럼 몇 가지 정도의 스킬은 충분히 획득이 가능하겠는데."
<그렇습니다.>
"그래, 그게 궁금했어."
정대식은 마른 입술을 한번 핥고 물었다.
"레벨 7단계에서는 획득하면 무조건 MAX를 찍는 종류의 스킬이 있나?"
엔트로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역시!"
정대식은 자신의 짐작이 들어맞았다고 쾌재를 올렸다. 그러나 엔트로피가 금방 그 기분에 찬물을 끼얹어 버렸다.
<단, 가격이 비쌉니다.>
"뭐? 스킬을 획득하는 건 무조건 천만 원 아냐?"
<획득하자마자 MAX인 스킬을 겨우 천만 원으로 구입 가능하실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확실히 도둑놈 심보기는 했다. 어지간한 건 죄다 비싼, 가끔 삥 뜯기는 것 같은 기분마저 느끼게 하는 현질창이 겨우 천만 원으로 그만한 스킬을 내줄 리가 없었다. 정대식은 조금 긴장한 채로 물었다.
"그럼 얼만데? 설마 스킬 하나에 막 1조 이러는 건 아니겠지?"
<그 정도는 아닙니다. 스킬의 가격은 100억입니다.>
"100억?"
정대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 다행이네. 그 정도면 그럭저럭 몇 가지 정도는 구입할 만 하겠어."
가슴을 쓸어내리던 정대식은 문득 그런 자신을 깨닫고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잠깐만, 지금 나 100억이 싸다고 생각한 거야? 10억도 엄청난 돈인데! 100억을 싸다고 생각하다니! 맙소사, 완전히 금전 감각이 마비되어버렸잖아!'
현질 창에 있어서는 1억이 1000원 정도밖에는 안 되는 기분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정대식은 자신의 씀씀이가 헤퍼진 것을 자책하다 입을 열었다.
"그럼 일단 지금 내가 획득할 수 있는 100억짜리 스킬이 뭐가 있어?"
<종류가 매우 다양해서, 원하는 바를 말씀해주시면 추천해드리겠습니다.>
"오호, 이제는 그런 것도 되나 보지?"
<그렇습니다.>
"눈 빠져라 스킬창 살펴볼 필요 없어서 좋네. 그럼......."
무엇을 구입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정대식은 자신과 자신의 부대원들이 체르노보그와의 일전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리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체르노보그를 처치한다 하더라도 목숨을 잃는다면 다 부질없는 노릇이다. 정대식은 마음을 굳히고 말했다.
"강철 신체보다 더 상위의, 그러니까 패시브 식의 방어 스킬을 추천해줘."
<강철 신체와 유사하면서도 그 성능이 더욱 우수한 방어 스킬이라면 완전 신체가 있습니다.>
"완전 신체라고?"
<이 스킬은 신체를 완전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기본적으로 방어력이 상승할 뿐만 아니라 어떤 손상을 입는다 하더라도 즉시 복구가 됩니다.>
"트롤 같은 재생력을 갖게 되는 것인가?"
<트롤의 재생력과 비교할 정도는 아닙니다.>
"뭐? 그 정도는 아니라고?"
<트롤의 재생력보다 월등히 뛰어납니다. 트롤은 다시 재생되는데 다소 시간이 걸리지만, 이 스킬은 즉각적으로 신체의 복구가 이루어집니다.>
"그거 대단한데?"
<그렇다고 이 스킬이 무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뇌가 파손되면 현질 시스템 자체가 파괴되는 관계로 사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신체 파손으로 인한 고통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즉, 지나친 고통에 노출될 경우에는 신체의 복구와는 상관없이 쇼크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 치더라도 일단은 획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스킬 같군. 고통이 감해지지 않는다는 게 좀 걸리기는 하는데...... 고통을 완화하는 종류의 스킬은 없나?"
<있습니다만, 획득을 권장하지는 않습니다.>
"왜?"
<무통 스킬의 경우, 획득할 경우 어떤 통증도 느끼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고통이 신체에 끼치는 영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정대식 님이 그것을 인지하지 못할 뿐이죠. 그러니 쇼크사의 위험은 여전합니다. 오히려 더할 수도 있습니다. 통증이라는 것은 위험을 알리는 인간의 방어기제입니다.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면 자신의 신체 상태가 어떤 상황인지 판단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어이없는 죽음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