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1
현질 전사
-10권 8화
우우우우우우웅-----------
그의 마력이 합쳐진 주먹으로 쏠리며 새파란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정대식은 블랙 드래곤 스킨 아머가 녹는 모양을 보면서 조바심을 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충분히 마력을 집중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공격을 해봤자 무위로 돌아갈 가능성이 컸다.
공격을 흡수해버리는 포로녜치를 단번에 찢어놓을 만큼의 일격이 필요했기에, 결코 서두르면 안 됐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정대식은 진땀을 뻘뻘 흘리며 마력을 모으는 데 집중했다.
마기포가 쏘아져 나갈 자리가 새하얗게 달아오르며 팔이 몽땅 타버리는 것 같았다.
동시에 몸의 다른 곳은 녹아서 사라져 버리는 듯했다.
블랙 드래곤 스킨 아머가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싶을 무렵, 마력의 바닥까지 몽땅 끌어올린 정대식은 일거에 공격을 터트렸다.
"마기포!"
구우웅-------------------------
포로녜치의 뱃속이라 그런 것인지 폭음이나 폭광 같은 것은 터지지 않았다.
마력이 방출되는 속도가 굉장히 느렸다.
정대식은 얼굴을 일그러트렸고, 포로녜치가 자신의 공격력을 소화해내기 위해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자식! 내 공격력을 천천히 빨아들이기 위해 내 마력이 터지지 못하도록 압박을 하고 있잖아!'
사방에서 밀려드는 정체 모를 액체, 거기에서 늪처럼 끈끈하고 물렁한 사력이 느껴졌다.
그것이 마치 고무 벽처럼 정대식을 짓누르고 있었다.
정말이지 교묘한 수였다.
정대식의 공격을 가로막는 것도 아니고, 서서히 터지게 하면서 최대한 그 충격을 완화해 흡수하려 하고 있었다.
'이대론 안 돼, 엔트로피!'
정대식은 외부에서의 충격이 함께 동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링크된 의식으로 엔트로피를 불렀다.
그의 뜻을 즉시 알아들은 엔트로피가 강화된 강력권으로 포로녜치의 표면을 때려왔다.
그 충격이 포로녜치의 전신을 흔드는 게 느껴졌다. 정대식을 압박하는 액체가 출렁이며 마기포의 에너지가 일순 커졌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마력이 폭발해 올라 터져야 하는데, 계속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마기포에 실은 에너지를 전부 빼앗기고 음식물 신세가 될 가능성이 컸다.
소화되어버리는 것이다.
'제기랄!'
정대식은 생존에 필요한 마력까지 다 쥐어짜 냈다.
물속에 갇혀 터질 듯 말 듯 하는 물풍선을 터트리려는 꼴이었다.
"으아아아아아!"
정대식이 발악을 하며 마력을 터트리려던 그 순간.
화악!
정대식이 느끼기로는, 별안간 수문이 열리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그의 공격력을 짓누르던 압박감이 사라지고 느닷없이 마기포의 에너지가 폭발해 올랐다.
꾸우---------------우우우-우우우웅------콰아아아아아아아!
꽈과과과과과과과광!
억눌려 있던 마력이 한꺼번에 터지자 그 위력이 경천동지를 했다.
"우와아!"
정대식은 그 여파로 뒤로 휙 날아갔다.
별안간 몸이 자유로워지며 해방된 마력이 미친 듯이 사방팔방으로 날뛰었다.
콰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그 여파가 파도처럼 몇 번을 요동치는 가운데, 정대식은 추풍낙엽처럼 이리 날리고 저리 날렸다.
그런 정대식을 엔트로피가 받아냈고, 정대식은 그녀의 팔을 붙잡은 채로 눈을 가늘게 떴다.
파파파파파파파파파!
포로녜치의 온갖 잔해들이 천지로 비상했다.
얇은 막이며 소화되다 만 몬스터 찌꺼기들, 다시 살아나느라 태아의 모습인 새로운 몬스터들, 갈기갈기 찢어진 촉수들과 수십 개의 주둥이, 그리고 덩어리진 액체들과 뭔지 모를 기관에 이르기까지.
털퍽, 철퍽!
간신히 충격이 가시자 포로녜치의 흔적들이 바닥으로 투두둑 떨어져 내렸다.
비처럼 쏟아지는 잔해 속에서 정대식은 포로녜치가 있던 자리 저편에 나타난 인물을 보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저 사람은......!'
Chapter 59. 모스크바로
갑작스레 마기포가 해방되었을 때 어렴풋이 짐작하기는 했다.
누군가 외부에서 도움을 주었기에, 억눌려 있던 공격력이 폭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데 그 상대에 대해서는 전혀 유추하지 못했다.
그저 부대원들이 힘을 합했든 어쨌든 방법을 찾아서 도와주었을 것이라 여겼지, 이 불모지에서 제삼자가 나타났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그 제삼자가 누구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더더욱 무리였다.
그런데 막상 그 인물을 두 눈으로 마주하자, 전에 본 적 없는 상대임에도 누구인지를 단박에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마치 고대의 신처럼 풍성한 금발 머리라든가, 인자하면서도 위압감 넘치는 표정이라든가, 사자 갈기처럼 풍성한 턱수염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자가 뜬금없이 말에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자의 말은 허공에 떠 있었다. 페가수스처럼 날개가 달리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떠 있을 수 있는 것은, 그자의 말은 형체가 없었다.
그것은 마치 일렁이는 불꽃이나 연기처럼 보였는데, 유일하게 제대로 된 형체를 갖추고 있는 것은 그 말을 둘러싸고 있는 마갑이었다.
정대식은 비주얼만으로도 놀랍기 짝이 없는 그 신물을 보고 입을 크게 벌렸다.
"델라니포스!"
저도 모르게 그 아이템의 이름을 내뱉어 버린 정대식은 델라니포스에 올라탄 남자가 인자하게 미소 짓는 것을 보았다.
7성 무구 중 하나인 마갑에 타고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는 묻지 않아도 뻔한 사실이었다.
정대식은 마른 침을 삼키며 엔트로피를 물리고 말했다.
"당신이 듀라한?"
듀라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되돌려 왔다.
「자네가 바로 정대식이겠군.」
듀라한은 러시아 억양이 섞인 영어로 대꾸를 해왔다.
그제야 자신이 한국어로 말했다는 사실을 알고 정대식은 영어로 물었다.
「당신이 도대체 여기엔 어떻게......?」
듀라한은 그 말에 대꾸를 하려다가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블랙 드래곤 스킨 아머가 다 녹아버려 너덜너덜한 상태인 정대식과 포로녜치의 잔해를 뒤집어쓰고 몰골이 엉망진창인 부대원 등을 돌아보고 말했다.
「아무래도 지금 이 상황에서 이야기하기엔 무리가 있는 것 같은데.」
그건 듀라한의 말이 맞았다.
그가 지적하는 말을 듣자마자 자신이 기진맥진했다는 게 느껴진 것이다.
포로녜치를 공격하는데 전력을 다했더니 마력이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정대식은 주섬주섬 아공간에서 회복 포션을 꺼내 마시고 말했다.
「그 말에 일리가 있군요. 일단은 이 성채를 벗어나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 전에 저것을 먼저 챙겨야 하지 않겠나?」
정대식은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바닥에는 좀 이상하게 생긴 돌멩이 같은 것이 떨어져 있었다.
그것은 쪼그라든 불가사리처럼 보였는데 크기가 제법 컸다.
손바닥 두 개를 붙인 것만 한 크기에 엄청나게 무거웠다.
"이게 대체......? 아무래도 감정을 해봐야겠네. 감정."
스킬을 써서 살펴보니 그것은 진화한 포로녜치의 말린 위장이라는 물건이었다.
'허허, 이거 대단한데? 부활의 명약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재료라고? 죽은 사람도 살리는 약이라니...... 꺼림칙하긴 해도 굉장한 포션임이 틀림없다. 거기에 들어가는 재료라니, 당연히 값비싸겠지?'
정대식은 재빨리 진화한 포로녜치의 말린 위장이 상점에서 어느 정도 가격으로 거래되는지를 살펴봤다.
그리고 기절할 뻔했다.
좋아서 기절할 뻔했다는 소리다.
'이 가격 실화냐? 3...... 3...... 3조라고?'
자신의 눈이 미친 게 아니라면 3조가 확실했다.
블랙 드래곤 한 마리를 판 것보다 더 비싼 것이다.
믿기가 힘든 마음에 정대식은 진화한 포로녜치의 말린 위장을 든 채로 한동안 넋이 나갔다.
'부활의 약을 만드는 재료이니 3조나 나가는 게 좀 이해가 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드래곤보다 더 비싸다니 의아하기도 하고......?'
감탄을 하다못해 경악해 있던 정대식은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
'아, 그렇군! 그냥 포로녜치의 말린 위장이 아니라 진화한 포로녜치의 것이기에 이렇게나 비싼 거구나!'
확실히 셀 수 없는 차원을 뒤져봐도 진화한 포로녜치의 말린 위장 같은 것은 또 달리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만한 가격인 게 이해가 됐다.
물론, 정대식이 3조를 주고 진화한 포로녜치의 말린 위장을 사는 입장이었더라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 길길이 날뛰었을 것이다. 그러나 판매자의 입장이었기에 이게 웬 횡재냐 싶었다.
'아니지, 따지고 보면 내 목숨값과 마찬가지지 않은가. 듀라한이 때맞춰 나타나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지도 모른다.'
정대식은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일단 진화한 포로녜치의 말린 위장을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성채가 무너지기라도 하려는 듯이 우르르 떨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포로녜치의 거대한 몸과 벽과 같던 촉수가 성채를 지탱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그게 사라지자 버티지 못하고 붕괴하려는 것 같았다.
천장에서 콘크리트 덩어리며 시체 조각, 타이어 따위가 툭툭 떨어지는 것을 보고 정대식은 서둘러 부대원들과 미하일 소령을 추슬러 그곳을 탈출했다.
* * *
성채에서 벗어난 곳은 황량했다.
황량하다는 말로는 부족해서 새카맣게 타버린 재만이 땅 위에 뒤덮여 있었고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는 몬스터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으윽...... 지옥이란 게 있다면 이런 풍경이겠네."
임시로 설치한 텐트 아래서 힐을 받으며 이재우가 투덜거렸다. 그러자 허미래가 이재우의 팔을 찰싹 때렸다.
"재수 없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야야! 아파죽겠네!"
"엄살은......."
그 옆에서는 엔트로피가 미하일 소령을 보살피고 있었다.
그는 엔트로피를 신기하다는 듯이 빤히 쳐다보았다.
잠깐 사이에 그녀의 모습이 확 달라졌으니 신기할 만도 할 테다.
정대식은 그 광경에서 고개를 돌리고 야영 준비를 거들어주고 있던 듀라한을 고갯짓했다.
「잠깐 저쪽에서 이야기를 나누실까요.」
이재우의 말에 따르자면 지옥 같은 풍경인지라 딱히 몇 발짝을 걷는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저쪽이라고 한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릴 필요가 있는 것 같아 정대식은 부대원들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걸어갔다.
그렇게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발밑에서 검은 재가 풀풀 날렸다.
마침내 이만하면 됐다 싶은 자리에 멈춰 서서 정대식은 아까 했던 질문을 다시 했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습니까.」
정대식의 물음에 듀라한은 신비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북구의 신 같은 용모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가진 강대한 힘 때문인지 표정 한번, 몸짓 한번에도 뭔지 모를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한국에서 온 올인원이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리러 간다는 소문을 들었지. 응당 러시아가 거들어야 하지 않겠나? 그리하여 내가 온 것일세.」
「러시아의 도움이라면 미하일 소령만으로도 충분합니다만.」
「과연? 내가 아니었다면 포로녜치를 쓰러트리는 일이 적잖이 힘들었을 텐데?」
「그 점에 있어서는 감사하다고 말씀을 드려야겠지만, 왜 진즉에 포로녜치를 쓰러트리지 않았는지 의문이 드는군요.」
「한번 계획을 세운 적은 있지만 군대의 기습에 본진이 파괴되어 그럴 여력이 없었네. 그 후로는 갈수록 불어나는 몬스터 떼로 인해 포로녜치가 있는 성채까지는 와 볼 수도 없었지. 반군의 규모로는 점점 확대되는 암흑 영역을 따라 전염병처럼 번져가는 몬스터를 소탕하는 것만으로도 무리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