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
현질 전사
-10권 17화
처음으로 눈에 띈 것은 기묘한 살가죽이었다.
가죽이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마치 용의 비늘처럼 살갗을 무언가가 촘촘히 뒤덮고 있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석영이 자라난 것과 같아 보였다.
광물성의 표면이 뒤덮고 있는 것은 폭발할 것 같이 압도적인 힘이었다.
몸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때문에 그 형체가 온전히 보이지는 않았으나, 아래로 완만하게 굽은 팔이 보였다.
그 팔 끄트머리에는 세 개의 발가락이 붙어 있었는데 칼로 벼려낸 것처럼 날카로운 발톱이 붙어 있었다.
실제로 그 끄트머리는 크기에 걸맞지 않게 뾰족했고 마치 칼처럼 안쪽에 날이 선 것이 눈으로도 보였다.
그 발톱이 바닥을 내딛는 것만으로도 쇠가 갈리는 소리가 나면서 땅이 우두두 일어났다.
곧 놈은 앞발로 바닥을 박차며 몸을 일으켜 세웠고, 그제야 정대식은 자신이 보고 있던 게 겨우 상반신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반신에는 짐승의 뒷다리가 붙어 있었는데 마치 물고기처럼 두툼한 꼬리가 뒤쪽에서 요동을 쳤다. 그리고 놈이 몸을 일으킴에 따라 양쪽으로 펼쳐지는 거대한 날개.
아니, 펼쳐지는 게 아니라 도로 접히는 것이었다.
몸의 다섯 배는 되어 보임 직한 엄청난 크기의 날개였다.
아마도 그걸 다 펴면 세상의 끝이 찾아왔다고 느끼게 될 터였다.
달도 별도, 심지어는 태양까지도 모조리 가려 버릴 만큼이나 컸다. 그리고 새카맸다.
말 그대로 암흑이었다.
놈은 전신이 절망을 그대로 형상화해놓은 것처럼 검었으나 그렇지 않은 부위도 있었다.
산봉우리처럼 까마득히 높은 머리 위에서 불타는 눈과 앞쪽으로 굽어 나온 뿔이 그랬다.
눈은 붉은색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으며 놀랍게도 뿔은 황금으로 덧칠한 듯 번쩍이고 있었는데, 왜 그런가 하고 보았더니 그 뿔 주변으로 뇌전이 맴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하늘을 뒤덮고 있는 시커먼 구름이 몽땅 놈에게로 몰려들고 있었다.
쿠르르르르르릉!
놈의 뿔 주변으로 소용돌이치는 먹구름들이 괴성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빠지지지지직!
뿔에 고여 있던 뇌전이 주변으로 흩어지며 시퍼런 불꽃을 퍼트렸고, 모두가 살아생전에 봐서는 안 될 장면을 보는 것처럼 넋이 빠져버렸다.
이성을 뭉개는 그 압도적인 존재가 무엇인지는 뻔한 일이었다.
정대식은 신음을 흘리듯이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
"체르노보그......."
어둠과 죽음의 신.
모스크바를 파괴하고 러시아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트린 거대괴수.
실제로 그 모습을 목도하고 나니 암흑신으로 불리며 추앙받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단순히 몬스터라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공포스러웠다.
정대식은 허튼소리를 하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1차 몬스터 브레이크에 나타났던 가장 강대한 다섯 마리의 몬스터, 개중 하나가 헤르보르였고 실제로 그놈을 정대식이 처치했기에 체르노보그도 그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 강할 줄 알았다.
그러나 헤르보르 같은 것은 갖다 붙이지도 못할 만큼 강대해 보였다.
'제아무리 15성급이라 해도 그렇지...... 이게 과연 몬스터란 말인가?'
정대식이 애써 입술을 깨문 보람도 없이, 이재우가 겁에 질려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이놈과 우리가...... 싸우는 거란 말이야?"
거기에 맞장구를 치듯 김송근이 혼잣말을 뇌까렸다.
"말도 안 돼......."
체르노보그가 나타나자 그들이 선 인공섬이 손바닥만 하게 느껴졌다. 체르노보그가 발이라도 한번 구르면 그대로 인공섬이 추락할 것 같았다.
차라리 추락하는 편이 나은지도 모르겠다.
허공에 떠 있다는 위태로움에 더해 체르노보그와 같이 강대한 존재감을 코앞에서 마주하고 있으려니 그 압박감에 숨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정대식은 정신을 차리고 스킬을 사용했다.
"각성!"
파아아아아아아아!
그는 혼몽해진 부대원들의 의식을 일으켜 세우고 의욕을 고취하려 각성을 썼다.
그의 마력이 파문처럼 번져나가고 잠시 부대원들의 창백해진 얼굴에 혈기가 돌아오는 것도 같았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후우우우우우우우우욱-!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 자리에 바로 선 체르노보그가 한숨을 내뱉자 각성 스킬도 소용없이 모두가 꽁꽁 얼어붙어 버렸다.
딱히 피어를 내지른 것도 아니고 어떤 술수를 쓴 것도 아닌, 그저 숨을 내뱉었을 뿐인데도 거기에 스며있는 피와 죽음, 그리고 절망의 냄새가 맡아졌던 것이다.
정대식은 어금니를 부서지라 꽉 깨물었다.
지금 이 자리, 이 순간 자신의 생과 사가 나누어질 거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래, 마기전을 찾으러 러시아에 오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이 순간을 어렴풋이 예감해왔다. 그리고 이때를 맞이하기 위해 내 모든 것을 준비해왔어! 그러니 이건 안 되겠다고 주저앉긴 이르다! 내 전부를 쏟아붓겠어!'
정대식은 모스크바로 오면서 체르노보그를 상대하기 위해 갈고 닦아 왔던 스킬을 한 번에 풀어놓았다.
"변화!"
정대식이 목청 높여 시동어를 외치자 그의 마력이 체르노보그가 뿌리는 어둠을 밀어내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것은 곧 각 부대원에게로 스며들었고 오래지 않아 그들의 모습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착용하고 있던 방어구가 정대식의 마력으로 뒤덮이며 은은한 푸른빛을 띠는 백색의 장갑으로 변했다.
또한, 그들의 무기 역시도 정대식의 마력으로 휩싸였다.
"조작!"
정대식이 연이어 다음 스킬을 외치자 펜리르 부대원들이 들고 있던 무기가 일괄적으로 변모했다.
그것은 정대식이 던전 입구에서 몬스터 군단을 쓸어버릴 때 썼던 마력산탄포와 같은 형태로 변화했다.
수많은 사출구가 일제히 체르노보그를 향했고, 정대식은 정신을 집중해 그가 구상하는 공격의 형태를 완성해 나갔다.
"강화!"
파아아아아아아아아아!
정대식의 마력으로 각각의 공격력이 몇 배로 높아졌으나 정대식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마력 접속!"
그가 자신의 마력을 모든 부대원에게 일괄적으로 쏟아부었다. 그러자 정대식의 마력이 그들의 몸으로 흘러 들어가 개개인의 마력과 융합하여 막대한 에너지로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그 힘을 단번에 쏟아내는 일이었다.
"방출!"
쿠----------------------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
눈부신 이글거림이 사출구의 끄트머리에 맺힌다 싶더니 그것이 일제히 앞으로 뛰쳐나갔다.
곧 사출구에서 폭포수처럼 강력한 공격력이 틈 없이 쏟아져 체르노보그를 강타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설령 용이라 하더라도 이 공격 앞에서는 무사하지 못할 터.
뼈나 남길 수 있으면 다행이다.
그동안 정대식은 부대원들과 자신의 능력을 한데 묶어 얼마만큼의 공격력을 낼 수 있을지 줄기차게 연구해왔다.
그 결과, 자신의 마력을 개입시켜 부대원들을 엔트로피처럼 무기화시킬 수 있다면, 편차 없이 강력한 일격을 먹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모스크바로 오는 길에 이 방법을 한번 시험해 본 적이 있었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마력의 효율을 최대한 높이면서 별도 아작낼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공격력을 한 번에 터트리는, 그야말로 펜리르 부대의 비기라고 할 만한 일격이었다.
정대식은 적어도 이 공격이 체르노보그에게 적잖은 타격을 입혔으리라고 예상했다.
그래야만 했다.
이 공격에는 연쇄적인 스킬 적용이 필요한 관계로 총을 쏘듯 연달아 쓸 수는 없었다.
체르노보그가 곧장 충격에서 회복하여 공격을 해온다면 지금처럼 한데 뭉친 채로는 상대할 수 없으니, 두 번 사용하기는 어려운 비기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앗!
공격의 여파가 무섭게 몰아치며 사방의 모든 것들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바람이 살갗을 갈가리 찢어버릴 듯 온갖 방향으로 불었고 바닥에 깔려 있던 일종의 타일이 조각조각 부서져 자갈처럼 허공으로 떠올랐다.
곧 그것이 파도처럼 물결치며 사방팔방으로 흩어지고 검은 재가 폭풍처럼 소용돌이를 쳤다.
콰아아아아아아아!
그 바람에 한껏 몸을 낮춘 정대식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는 마기장으로 보호막을 머리에 덮어쓰며 엔트로피에게 외쳤다.
"어떻게 되었지? 먹혀든 건가?"
엔트로피는 대답이 없었다.
아마도 엔트로피로서도 가늠하기가 힘이 드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엔트로피가 나지막이 뇌까리는 소리가 들렸다.
<관측.>
엔트로피와의 링크로 인해 그녀가 쓰는 스킬의 결과를 정대식도 알 수가 있었다.
정대식은 체르노보그의 상태를 보고 머리가 타버리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아니?'
체르노보그는 거의 관측이 불가능했다.
놈의 생명력이 새카맣게 불타오르는 것이 보였다. 놈의 방어력도 공격력도 수치화되지 않았다.
당연히, 방금의 일격이 어떤 여파를 미쳤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눈에 보기에도 아무런 영향이 없어 보였다.
공격의 여파가 가시고 났을 때 보인 것은 거대한 장막이었다.
체르노보그는 양쪽 날개를 앞으로 당기는 것만으로도 펜리르 부대원들의 일격을 손쉽게 막아냈다.
다음은 체르노보그의 차례였다.
놈이, 울부짖었다.
--------------------------------!
소리로는 형언할 수 없는 굉음이 전신을 강타했다.
꾸르르르르르르릉!
인공섬이 미친 듯이 떨리고 부대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부대원들보다 방어력도 한참이나 달리고 정대식의 권역에서 벗어나 있는 미하일 소령은 피를 컥 토하며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다.
정대식은 엔트로피에게 그를 보호하라 이르고 허미래를 독려했다.
"허미래!"
"예!"
허미래는 스스로 뺨을 후려치며 정신을 차리고 힐을 뿌렸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보호막을 펼쳤고 서지원도 곧 공간 왜곡으로 체르노보그와 부대원들 사이에 거리를 벌려놓았다.
그러자 이재우가 품속에서 종이 다발을 한가득 꺼내며 말했다.
"죽기를 각오하고 덤비지 않으면 물리칠 수 없겠군요."
"아껴두었던 실력을 선보여야겠는데요?"
김송근은 창백한 얼굴로도 허풍을 떨었다.
고덕화는 묵묵히 새로 얻은 아이템을 시험해 보려는 듯 몸에 두른 스트리보그의 망토를 추슬렀다.
연이어 티르브링어를 빼든 기철민이 냉철하게 말했다.
"죽기를 각오해서 뭐하게. 살아서 나가야지."
그는 원래의 목적을 망각하지 않은 듯, 정대식을 쳐다보고 물었다.
"마기전은 어떻게 된 겁니까."
마기전의 마력석은 여전히 희미한 빛을 내뿜으며 어둠 저편을 가리키고 있었다.
거기에 마기전의 나머지 파츠가 있을 터.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체르노보그를 상대하기 전에 그것을 가져와야 했다.
그래야지만 체르노보그를 제대로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상태에서 마기전을 가지러 자리를 뜰 수는 없었다.
펜리르 부대가 전력을 다한 공격도 체르노보그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그렇다면 누구 하나가 자리를 비우기 무섭게 나머지 부대원들이 전멸하는 결과가 날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