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1
현질 전사
-10권 18화
차마 그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었으므로 정대식은 내뱉었다.
"계획은 수정한다.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떻게든 체르노보그를 처치하겠다."
그러자 기철민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외쳤다.
"대장님! 지금 우리의 전력으로는 체르노보그를 없앨 수 없습니다. 마기전을 가져와야 합니다! 여신급 무기가 있어야 합니다!"
기철민의 말이 옳았다. 정대식은 진땀을 흘렸다.
"......어쩔 수 없군. 기동력이 좋은 고덕화, 네가 가야겠다. 네가 가서 마기전의 나머지 파츠를 가져와라."
그 말에 고덕화가 미간을 찌푸렸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란 걸 아시지 않습니까. 마기전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것도, 그것을 가져올 수 있는 것도 대장님뿐입니다."
정대식은 자신이 횡설수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렇게까지 전투 중에 제정신이 아닌 적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영문 모를 두려움으로 인해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니, 영문을 모르지 않았다.
자신이 내뱉은 말로 인해 벌어질 일이 두려운 거였다.
정대식은 이를 갈며 소리쳤다.
"지금 나더러 저놈을 여기 놔두고 자리를 비우란 말이냐?"
그러자 허미래가 그녀답지 않게 지극히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야 합니다. 그래야 승산이 있습니다."
"가십시오. 대장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반드시 버티고 있겠습니다."
김송근까지 그리 말을 하는데 눈앞이 캄캄했다.
이건 무모한 짓이었다. 이들은 정대식이 자리를 뜨는 즉시 죽는다.
정대식은 그것 말고 다른 결과를 기대할 수가 없었다.
제아무리 펜리르 부대원들의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10성급 몬스터도 쓰러트릴 지경이라 하더라도 저건 다르다.
체르노보그를 상대할 수준은 안 됐다.
하지만 모두가 말하듯이 마기전의 완성 없이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리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야마환까지 말을 듣지 않는 이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다.
여기서 애먼 싸움을 벌이다 마기전도 얻지 못하고 체르노보그에게 목숨을 잃는 상황이 된다면 다 같이 죽는 셈이다.
정대식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다시 뜨고 말했다.
"알겠...... 알겠다. 내가 가서 마기전을 가져오겠다."
기철민이 곧 그에게서 눈을 돌리고 체르노보그를 노려보며 대꾸했다.
"가셔서 반드시 마기전을 가져오십시오! 그럼 우리도 반드시...... 살아있겠습니다!"
정대식은 이를 악물고 땅을 박찼다.
그의 몸이 허공으로 날아올랐고 그러자 마력석이 어디를 가리키는지가 명확히 보였다.
"엔트로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내 부대원들을 지켜라!"
<알겠습니다.>
그나마 믿을 구석이라고는 엔트로피뿐이었다.
그녀가 정대식이 가진 마력과 스킬을 공유하고 있으니 어느 정도는 부대원들을 지켜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몸을 돌려 마력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날아가는 도중에도 뒤통수가 묵직했다.
정대식은 애써 불안감을 떨쳐버리고 뒤돌아보고 싶은 기분을 억눌렀다.
'믿자, 믿는 거다! 저들이 살아서 날 기다릴 거라고 믿는 거다!'
정대식은 쏜살같이 어둠을 헤치고 마기전을 향해 날았다.
* * *
정대식은 이를 악물고 엄청난 속도로 빛을 쫓아서 날고 또 날았다.
그렇게 서두르기를 얼마간. 저만치 목적지라고 할 만한 게 보였다.
그가 서 있던 인공섬과 똑같아 보이는 구조물이 허공에 떠 있었다.
아마도 마기전이 거기에 있으리라 예상하고 가속을 더하려던 찰나.
정대식은 눈을 의심케 하는 광경을 보았다.
'저건...... 체르노보그잖아!'
처음에는 마기전에 일종의 트랩 같은 게 있어서 조금 전에 정대식이 본 광경을 거울처럼 복사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한 환영이든지.
그러나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체르노보그뿐만 아니라 놈과 싸우고 있는 부대원들의 모습까지도 다 보였던 것이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지?'
정대식은 마력석의 빛이 뻗어 나가는 장소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 빛은 펜리르 부대원들이 체르노보그와 격전을 벌이고 있는 인공섬에 닿아 있었다.
정대식이 그 빛을 따라 홀린 듯 인공섬 위로 내려앉자 그를 발견한 부대원들이 놀란 기색으로 환호성을 올렸다.
"대장님!"
"빨리 돌아오셨군요!"
"다행이야, 마기전은 획득하신 거지요?"
그들의 질문에 정대식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시야에 그를 보고 반가워하는 서지원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자 다시금 인공섬 너머 저쪽 허공으로 뻗어 나가는 빛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정대식은 낙담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은 채 차분한 기색으로 말했다.
"마기전은 획득하지 못했다."
"예?"
부대원들의 얼굴이 낙심으로 물드는 것을 보고서도 그는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아무래도 마기전은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리고 나서야 획득할 수 있는 모양이다."
정대식은 이 던전 안이 다른 여타의 던전과는 다르게 여러 개의 차원으로 나뉘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들은 두 다리로 걸어서 공간과 공간 사이를 이동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차원 이동 장치, 포탈이나 공간 마법과 같은 방법을 통해서 발록이 있던 용암지대로, 검은 암석으로 만들어진 회랑으로, 그리고 다시 허공에 뜬 이 인공섬으로 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이 공간 역시 왜곡되어 있어, 어느 방향으로 가도 결국 제자리, 즉 이 전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즉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리지 않는 한은 여기를 벗어날 수도, 마기전을 획득할 수도 없는 것이다.
정대식은 그 말을 설명하지 않고 외쳤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지금은 우물쭈물할 때가 아니야, 온다!"
콰가가가가가가각!
체르노보그가 한번 손을 휘두르자 그 발톱이 바닥을 긁으며 부대원들을 덮쳐왔다.
그들은 날쌔게 그 공격을 피하며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으나 체르노보그에게는 그 어떤 공격도 먹히지 않았다.
수정 비늘로 뒤덮인 살갗은 티르브링어조차 생채기를 입힐 수 있을 뿐이었으며, 이재우가 구현화 해낸 종이 병사들이나 김송근의 거대 분신도 체르노보그를 훼방 놓는 정도의 역할 밖에는 하지 못했다.
그들이 회랑의 석상들과 싸우고 획득한 아이템들도 큰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체르노보그를 성가시게 만드는 것으로 그들의 목숨을 연장할 수는 있었으나 그게 다였다.
더욱이 많은 양의 마력을 잡아먹고 있으니 쓰면 쓸수록 불리해지게 되어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마력이 바닥나 죽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을 터.
정대식은 다시 한번 펜리르 부대원들의 전력을 모조리 모아보기로 했다.
"여태까지의 방법으로는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릴 수 없어! 우리의 힘을 전부 모으는 수밖에는 없다!"
"무슨 좋은 수가 있겠습니까?"
정대식은 미하일 소령과 엔트로피를 포함해 펜리르 부대를 전부 모이게 했다. 그리고 그 모두를 이어주는 스킬을 사용했다.
"마력 전이!"
파아아아아아아앗!
마력이 빛이 사슬처럼 엉기며 그들을 모조리 엮었다. 그러자 서로가 가지고 있는 마력의 특성, 즉 그들의 능력이 전부 하나로 통합되었다.
덕분에 엔트로피하고만 쓸 수 있었던 링크가 그들에게로 모조리 이어지며 다들 별다른 말 없이도 정대식의 작전을 이해하게 되었다.
시작은, 김송근이었다.
"1분형, 거대 분신!"
쿠우우우우우웅!
김송근의 능력으로 체르노보그에 맞먹을 정도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놈의 3분의 2 정도 크기가 되는 엄청난 크기의 분신이 나타났다.
곧 미하일 소령의 변신 능력으로 그 분신은 더욱 큰 덩치의 위어베어로 변했다.
"크워어어어어어어엉!"
김송근이 만들어낸 분신이 위어베어로 변신하기까지 한 상태에서, 이재우가 종이술사의 능력으로 방어력을 더했다.
그가 그림으로 구현화 해낸 철갑이 위어베어의 사지에 둘렸고 왼손에는 엔트로피가 변화하여 만들어낸 마력포가, 오른손에는 그들이 가진 무기 중 가장 강력한 공격력을 가진 티르브링어가 쥐어졌다.
"쿠워어어어어어!"
모두가 힘을 합쳐 만들어낸 거대 위어베어가 쿵쿵 인공섬을 무너트릴 만한 소리를 내며 체르노보그에게로 달려들었다.
쿠웅!
위어베어가 마력포를 갈기며 체르노보그에게로 덤벼들자 체르노보그도 가만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체르노보그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위어베어의 머리통을 날려버리려고 했으나 그 전에 티르브링어가 섬뜩하고도 눈 부신 빛을 뿌리며 위어베어의 허리통을 베어 들어갔다.
그 공격을 날개로 쳐낸 체르노보그와 위어베어의 격투가 본격화되었다.
그 가운데, 서지원과 허미래의 디버프와 버프가 어지럽게 작렬했다.
서지원은 쉴 새 없이 공간 왜곡과 공간 분리 마법으로 체르노보그의 일격이 비껴가도록 조작을 했다.
그동안 허미래는 계속 힐을 퍼부어 거대 위어베어가 재생을 반복하게끔 도왔다.
고덕화도 거대 위어베어를 상대하느라 신경 쓰지 못하고 있는 체르노보그의 발밑을 쉴 새 없이 공격했고, 나머지 미하일 소령은 위어베어의 변신이 풀리지 않도록 거기에 온 마력을 쏟아붓고 있었다.
기철민 역시도 티르브링어의 위력이 줄어들지 않도록 이를 악문 채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 모든 상황을 총괄하고 실질적으로 전투를 이끄는 것이 정대식인지라 그 역시도 버겁기는 마찬가지였다.
바다와 같이 무한하게 느껴지던 마력이 엄청난 속도로 닳고 있다는 게 느껴졌던 것이다.
'크...... 안 돼, 이대로 가다간 마력이 부족할는지도 모른다! 그리되면 끝이야!'
마력이 바닥나기 전에 끝장을 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정대식은 품에서 발록의 심장을 꺼냈다.
붉은 보석처럼 발광하는 그것을 손아귀에 쥐고 깨부수며 정대식은 불의 정령왕을 불러냈다.
"이프리트!"
콰르르르르르르르르르!
순식간에 세상이 지옥불 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붉게 타오르며 머리 위로 엄청난 크기의 마법진이 펼쳐졌다.
그곳에서부터 유성같이 타는 불덩어리가 서서히 내려왔다.
그것은 곧 불꽃을 두르고 있는 정령왕의 모습으로 변했다. 차마 그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을 만큼 눈부시게 타오르는 정령왕, 이프리트가 말했다.
-나를 소환한 자 누구냐.
정대식은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타버릴 듯 뜨거운 걸 느꼈다. 그 생소한 통증을 참으며 정대식은 소리쳤다.
"나다, 정대식!"
-나를 소환한 이유가 무엇이냐.
"내 적을...... 체르노보그를 불태워 없애버려!"
-나를 소환한 자의 말을 들었노라.
곧 이프리트의 불꽃이 폭발하듯 확, 부풀어 오르더니 태양과 같이 눈부신 빛덩어리가 되어 체르노보그에게로 쏘아져 나갔다.
유성과도 같은 빛줄기를 본 체르노보그가 굉음을 토하며 거대 위어베어를 확 떠밀었다.
그리고 날개를 오므려 이프리트의 신성한 불길을 가로막았다.
콰르르르르르르르르!
"으아아앗!"
"크악!"
그 뜨거움을 참지 못하고 미하일 소령과 몇몇 이들이 비명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