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 전사-244화 (243/297)

# 244

현질 전사

-10권 21화

다음 순간.

일그러진다 싶던 암흑 검신의 몸체가 확 무너지며 정대식을 단번에 집어삼켰다.

그리고 엄청난 파동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힘과 힘이 격돌한 여파가 번지며 허공이 마치 유리 조각처럼 깨지기 시작했다.

파직, 파직, 파바바바밧!

그야말로 세상이 무너지는 광경이었다.

차원 하나가 완전히 박살나며 일순 다른 차원들이 어지럽게 뒤엉켰다.

검은 회랑과 발록의 용암지대와 블리자드가 몰아치는 빙원과 모래밖에 없는 사막 등이 어지럽게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가 이윽고, 마침내 체르노보그의 몸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모래성처럼 흩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놈의 흔적이 어둠 속으로 흩어지자 던전을 구성하고 있던 다중의 차원들도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체르노보그의 요람이자 그의 영향력으로 유지되었던 던전 자체가 붕괴하는 것이다.

쿠구구구구구구궁!

여러 개의 차원이 부서지며 거기서 쏟아져 나온 파편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거기에서 정대식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암흑 검신에 집어 삼켜져 영영 사라져 버린 듯했다.

그러나 그를 부르는 목소리는 붕괴하는 차원의 틈바구니에서 생생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대장님-!"

서지원의 것이라 짐작되는 목소리였다.

"대장니임-!"

Chapter 62. 이능 파괴자

"후유......."

듀라한은 델라니포스에서 내려온 채, 자신이 이루어낸 위대한 업적을 바라보았다.

그의 앞에는 몬스터의 시체가 그야말로 산을 이루고 있었다. 개중에서도 가장 볼만한 것은 게게네이스의 사체였다.

온몸이 난도질 된 채 죽어 있는 게게네이스의 사체를 밟고 서서 듀라한은 전에 없이 유쾌한 기분을 느꼈다.

아직도 그에게로 수많은 몬스터들이 끊임없이 밀려들고 있었으나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모처럼 이런저런 책임과 추적에서 자유로운 탓인가 보았다.

"하-아아앗!"

듀라한은 다시금 델라니포스에 올라타 박차를 가했다. 그러자 델라니포스가 한점의 빛처럼 떼거리로 몰려오는 몬스터들에게로 솟구쳐 나갔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은 SS등급의, 단순하기 짝이 없는 기능의 장창이었다.

별다른 공격력이 추가된 것도 아니고 진화를 하거나 마력을 생성하지도 못했지만 로물루스의 창이라고 불리는 그것은 절대로 파괴되지 않는 절대 무적의 방어력을 자랑했다.

설령 용의 비늘을 찌르거나 아다만티움을 친다 해도 이가 빠지거나 하지 않았으므로 날을 갈아줄 필요도 없었다.

히드라의 독이나 산성 핏물에 던져두어도 결코 녹이 슬거나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듀라한은 로물루스의 창을 막 다루었다.

날붙이에 엉겨 붙은 피딱지를 한번 닦는 일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기는 몬스터의 목숨을 빼앗기에 충분히 날카로웠다.

특히, 로물루스의 창은 델라니포스 위에서 제 위력을 발휘했다.

델라니포스가 광속이라고 일컬어도 무리가 없을 만큼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움직였고, 듀라한 역시도 그 속도에 맞추어 짧은 시간 동안 수십 차례 적을 공격하는 관계로 어지간한 무기는 툭하면 부러지거나 이가 빠지거나 했다.

그러나 로물루스의 창은 한결같이 멀쩡했으므로 듀라한은 부담 없이 적을 찌르고, 두드리고, 후리고, 내리치고, 가르고, 쪼갰다.

그렇게 얼마를 싸우고 있었을까.

듀라한은 천천히 즐겁던 기분이 가시는 것을 느꼈다.

서서히 피로가 몸에 젖어 들고 있었다.

사실 게게네이스와 싸울 때 많은 전력을 소모한 상태였다.

나머지는 그럭저럭 상대할 만한 놈들이라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으나, 사방에서 밀려드는 몬스터들이 끝도 없었다.

게게네이스가 쓰러졌을 때 놈들이 잠시 주춤하는 것도 같았지만, 곧 전열을 다시금 갖추고 그를 압박해 들어오고 있었다.

대군 하나를 혼자 몸으로 상대하고 있으니 멀쩡한 게 이상한 노릇이다.

듀라한은 여기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거기에는 던전의 입구가 있었다. 체르노보그를 상대하러 간 정대식이 돌아와 자신을 도와주기를 기대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정대식이 멀쩡한 채로 살아서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헛된 일이었다.

처음 한국에서 온 올인원이 체르노보그가 있는 모스크바로 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만용이 지나치다 싶었다.

제아무리 올인원이라 해도 그렇지 어떻게 감히 암흑신을 상대할 생각을 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헤르보르와 시서펜트를 어렵지 않게 쓰러트렸다는 이야기를 듣자 일말의 기대가 생겼고, 블라디미르 대령이 그를 지원하기까지 했다는 소리를 듣자 가만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낯모르는 외국인의 손에 조국의 운명을 맡기는 것도, 거기에 블라디미르 대령의 공이 들어가는 것도 마뜩잖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블라디미르 대령이 마련한 무대- 광필두와의 일전도 내키지 않았기에 델라니포스를 타고 정대식을 쫓아왔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 정대식은 그의 생각보다 더 강했으며, 침착했다.

체르노보그가 어떤 상대인지 모르는 것 같지는 않은데 별 두려움이 없었고, 무언가를 준비해두고 있는 인상이었다.

그래서 그를 거들기로 작정을 했으나, 해일처럼 밀어닥치는 몬스터를 상대하고 있으려니 던전 안의 상황인들 이보다 낫겠나 싶었다.

어쩌면 체르노보그를 마주하기가 무섭게 재가 되어 사라져 버리고 자신도 여기서 몸을 빼내지 않는 이상은 애꿎은 죽음을 맞이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때였다.

푸욱-!

눈앞에 있던 만티코어의 아가리에 로물루스의 창을 쑤셔 넣던 듀라한은 멈칫했다.

갑자기 놈의 움직임이 멎어버린 탓이었다.

뿐만이랴, 다른 몬스터들까지도 일제히 동작을 그쳤다.

그놈들은 별안간 찬물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더니,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군대 못지않게 질서정연하던 모습을 돌연 잃어버렸다.

하늘을 감시하고 있던 하피 떼는 여기저기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버렸으며, 여러 종류의 몬스터가 뒤엉켜 있는 지상에서는 혼란이 일었다.

몬스터들이 서로가 서로를 물고 뜯거나 자리를 피해버리거나 몸을 숨기기 위해 지하로 파고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듀라한과 싸우던 만티코어가 물러갔다는 뜻은 아니다.

만티코어는 목을 꿰뚫린 채로도 사납기가 그지없었다.

델라니포스가 발굽으로 놈의 안면을 몇 번 걷어차는 사이에 창을 빼낸 듀라한은 이번에는 정확히 미간을 노렸다.

그리고 그 공격이 성공하여 만티코어가 혀를 길게 빼물고 죽었다.

그러고 났더니 상황을 살펴볼 여유가 생겨, 듀라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듀라한은 얼굴 위로 쏟아지는 재 덩어리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늘을 자욱하게 뒤덮고 있던 검은 재가 굵은 눈발처럼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멈추었던 바람이 불기라도 하듯 높은 하늘에 자욱하던 먹구름이 걷히고 있었다.

듀라한은 그 광경을 보고 입을 멍하니 벌렸다.

「설마...... 설마......?」

소집되어 있던 몬스터들이 흩어지고 하늘이 갠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밖에 없었다.

「체르노보그의 영향력이 사라진 것인가? 정대식이...... 해냈다는 말인가?」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기뻐 환호하는 대신 눈만 끔뻑거리고 있는데, 느닷없이 등 뒤에서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정확히 무슨 소린지는 알 수 없었으나 등골이 섬뜩해지는 소리였다.

깜짝 놀란 듀라한이 뒤를 돌아보자 던전 입구가 일렁거리는 게 보였다.

「아니?」

던전 입구가 저런 현상을 보이는 것은 난생처음 보았다.

던전 입구는 날씨가 어떠하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크기나 모양, 상태에 있어서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당장이라도 그 공간이 닫힐 것처럼 격심하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필시 안에 이변이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듀라한은 안절부절못했다.

만약에 체르노보그가 쓰러졌다면 안에 정대식과 그 일행들이 아직 살아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그들을 구하러 가는 게 옳았다.

그러나 던전 입구가 저러다 사라지기라도 한다면 영영 현실 세계로 돌아올 길을 잃어버리게 될 수도 있었다.

차라리 누구라도 살아있다는 확신이 있으면 구하려는 시도라도 해보겠는데, 체르노보그와 폭사했을 수도 있는 노릇이니 섣불리 행동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그때.

파앗!

던전 안에서 누군가가 왈칵 튀어나왔다.

듀라한은 서둘러 델라니포스에서 내려 그들에게로 달려갔다.

그것은 기진맥진한 미하일 소령이었다.

뒤를 이어 펜리르 부대원들이 줄줄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격전을 치른 기색이 역력했다.

다들 상처투성이에 몹시 지쳐 보였다. 몇몇은 큰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럼 당장에 스스로 몸을 돌보아야 하건만, 그들은 듀라한에게도 일말의 관심을 보이지 않고 언성을 높이며 무어라고 고함을 쳐댔다.

보아하니 제일 중요한 사람, 정대식이 보이지 않았다.

"지원이 혼자서 뭘 어쩔 수 있겠어! 지금이라도 던전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이재우가 하는 말에 기철민이 냉정하게 말했다.

"우리가 간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다고? 지금은 서지원의 능력을 믿는 수밖에는 없다. 몇 안 되는 공간 마법 능력자들 중 하나이니 어떻게든 대장님을 데려올 수 있겠지."

그러자 허미래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자신의 염려를 그대로 드러내 보였다.

"만약에 대장님을 찾지 못한다면? 당신도 봤잖아!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러니까 우리가 가봤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거야."

기철민의 대꾸에 고덕화가 불쑥 중얼거렸다.

"엔트로피도 보이지 않는다."

"엔트로피......."

그러고 보니 그렇다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린 김송근이 말했다.

"대장님이 무사하시다면 엔트로피도 멀쩡할 텐데 안 보이잖아."

"대장님 곁에 있을 수도 있지."

고덕화의 대꾸를 듣고 허미래가 외쳤다.

"우리를 무사한 곳으로 옮긴 게 엔트로피란 말이야! 그런데 갑자기 사라져버렸어, 그건 대장님이 엔트로피마저 운용하지 못할 만큼 위험하다는 뜻이라고!"

그렇게 소리친 허미래는 느닷없이 던전 안으로 뛰어들려고 했다.

그런 허미래를 붙잡아 기철민이 가볍게 뺨을 때렸다.

"정신 차려. 독단으로 행동할 때가 아니다. 여기에 네 힐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는 게 안 보여?"

허미래는 기철민의 지적에 옆구리가 뚫린 이재우나 한쪽 팔이 덜렁거리는 고덕화, 전신의 뼈가 부서지다시피 한 미하일 소령을 보고 통곡을 했다.

"으흐으윽!"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부상자가 있는 것을 보고 듀라한은 자신의 품속에서 포션을 몇 개 끄집어냈다.

그걸 그들에게 건네자 허미래가 눈물을 닦으며 힐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부상이 심한 사람부터 한 명씩 붙잡고 치료를 하고 있는데 던전 입구가 천천히 좁아지는 게 보였다.

거기에 정신을 파느라 통 집중하지 못하는 허미래를 기철민이 윽박질렀으나 그 역시도 침착함을 잃은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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