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5
현질 전사
-10권 22화
파래진 얼굴로 찌그러지는 던전 입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던 찰나.
파슛!
기묘한 소리를 내며 던전 입구가 짜부라지듯이 사라져버렸다.
그 광경을 보고 일동이 전부 눈을 크게 떴다.
곧, 허미래의 비명이 터졌다.
"아아아악!"
그녀는 사라져 버린 던전 입구로 몸을 날렸으나 이미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허공만이 있을 뿐이라 허미래가 울면서 몸부림을 쳤다.
"대장님, 대장님!"
기철민도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서지원이...... 성공하지 못했나?"
듀라한 역시 상황을 깨닫고 고개를 떨어트렸다.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렸으되, 결국 정대식은 살아나오지 못한 게 분명했다.
인간의 몸으로 암흑신이라 불리는 몬스터를 상대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말이었다.
아니, 정대식이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린 것만 해도 기적 같은 일이다.
적어도 헛되이 목숨을 버린 것은 아니지 않은가?
펜리르 부대원들은 전부 눈물을 흘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다들 슬픔과 고통에 겨워 차마 고개를 들어 올리지 못하고 있던 그때.
유일하게 고개를 들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미하일 소령이었다.
그는 서 있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바닥에 누워 있었고, 그렇기에 허공을 볼 수가 있었다.
검은 재가 눈처럼 쏟아지고 있었기에 공간이 벌어지는 그 광경이 아주 뚜렷하게 보였다.
미하일 소령은 그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으나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저 으으, 하는 신음만이 흘러나와, 곁으로 듀라한이 다가와 치료 포션을 입에 부어주었다.
놈의 도움을 받고 싶지는 않았으나 몸은 기쁘게 치료 포션을 받아들였다.
덕분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기 시작했고, 미하일 소령은 말문을 열었다.
「저길 보십시오.」
그가 떨리는 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모두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허공이 서서히 벌어지는 광경이 보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문이 열리듯 배경에 기묘한 위화감을 일으키며 공간이 쩍 벌어졌다. 거기로 두 명의 인영이 무거운 물체처럼 아래로 뚝 떨어져 내렸다.
"대장님!"
"서지원!"
그게 누군지를 한 번에 알아보고 펜리르 부대원들이 일제히 그쪽으로 달려갔다.
허미래가 제일 먼저 넘어지듯 몸을 날렸고, 그들은 곧 서지원과 그 품에 끌어안긴 정대식을 볼 수 있었다.
"대장님, 대장님!"
다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울고 있다가 지금은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서지원의 어깨를 두드리고 그를 얼싸안았으나, 아직 기뻐하기에는 이른 모양이었다.
"크악!"
정대식을 놓은 서지원이 동료들을 왈칵 떠밀어 뒷걸음질을 쳤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리치 써클렛이 파괴되어 있었고 그의 얼굴이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게다가 이목구비가 일그러지고 살갗이 거칠게 일어나는 중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몬스터들의 마력, 즉 사력을 과다하게 흡수한 티가 났다. 그리고 그가 무슨 몬스터의 사력을 흡수했는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크허억!"
서지원은 시커먼 피를 한 바가지는 토하며 몹시 고통스러워했다.
그 광경을 보고 허미래가 큐어 능력을 쓰려고 했으나 별반 통하는 것 같지 않았다.
허미래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로 말했다.
"독 같은 데 중독된 게 아니라 몬스터의 사력이 전신에 흡수되어 빼낼 방법이 없어! 써클렛까지도 망가져 버렸으니 어째야 할지......."
"크아아아악!"
뿌득뿌득 소리를 내며 서지원의 이마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거기에서 붉은 뿔이 솟아올랐고 그의 주위로 검은 재가 모여들어 소용돌이를 쳤다.
이대로 두었다는 체르노보그와 비슷한 몬스터가 되어버리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기철민은 허미래에게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든 해봐!"
"방법이 없단 말이야!"
"큭......!"
입술을 사려 문 기철민의 눈에 독한 기색이 떠올랐다.
현재 그는 티르브링어를 잃은 상태였기에 이재우에게로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재우, 네 무기를 내놔. 페룬의 돌도끼라면 저 녀석을 일격에 보낼 수 있겠지."
"뭐라고? 미쳤어?"
이재우가 질겁하는 것을 보고 기철민이 고함을 쳤다.
"그러면 저 녀석이 괴물로 변하는 걸 구경만 하고 있자는 말이야? 다른 몬스터도 아니고 체르노보그의 사력을 먹고 변하고 있잖아! 자칫 잘못하다가는 또 다른 체르노보그가 탄생하게 될는지도 모른다고!"
차마 무기를 건네지 못하고 망설이는 이재우에게 기철민이 덤벼들려던 그때.
듀라한이 그들을 밀치고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구슬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집어던졌다.
파앗!
그러자 순식간에 서지원의 모습이 사라져버렸다. 대신에 검게 변한 구슬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듀라한은 그 구슬을 집어 들고 말했다.
「이것은 속박의 구슬이라고 하는데, 본디 몬스터들을 산 채로 잡아 가두는 물건이지. 자네 동료를 가두게 되어서 미안하지만 상황이 급해 보여서 어쩔 수 없었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나?」
당연히 러시아어라 알아듣지 못했다. 미하일 소령만이 알아들을 수가 있었는데 그도 한국어는 못하는 상황이었다.
듀라한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뒤통수를 긁적거리는 사이, 펜리르 부대원들은 대충 눈치로 상황을 파악했다.
"지금 듀라한이 서지원을 저 구슬에 집어넣은 것인가?"
"죽인 건 아니겠지?"
"설마! 죽였다면 가만 안 두겠어!"
기철민과 허미래의 대화를 듣고 이재우가 이를 갈았다.
곧 그가 으름장을 놓듯이 주먹을 치켜들어 보이자 듀라한이 두 손을 들어 보이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였다.
<죽인 게 아닙니다.>
모두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그리고 쓰러진 정대식 옆에 나타난 존재를 보고 그 이름을 불렀다.
"엔트로피!"
* * *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엔트로피는 인간이 아니라는 느낌이 물씬 났다.
다른 부대원들은 검은 재 속에서 뒹굴며 격전을 치르느라 몰골이 말이 아니었는데, 그녀는 검댕이 하나 묻지 않은 채 깨끗했다.
아마 재구성되어 나타난 탓이겠지만 하얗게 도드라져 보이는 모습이 참 이질적이었다.
정대식의 곁에 나타난 엔트로피를 보고 다들 그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정대식은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무장도 하나 안 갖추고 있었는데 딱히 다친 데는 없어 보였으나 정신을 놓고 있는 모습이 죽은 사람처럼 불길해 보였다.
그런 정대식을 바로 눕히고 엔트로피는 하던 말을 마저 이었다.
<서지원 님께서는 속박의 구슬이라는 아이템 안에 일시적으로 갇힌 것입니다. 그 안에서는 생체 활동이 멈추게 되어 있으니 서지원 님이 변화하는 것도 늦춰지게 될 것입니다.>
"그럼 서지원은 당분간 무사한 것이지?"
이재우의 질문에 엔트로피는 모호하게 말했다.
<완전히 무사하다고 할 수는 없는 상태이겠으나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럼, 대장님은?"
허미래의 말을 듣고 엔트로피는 정대식을 한번 내려다본 뒤 대꾸했다.
<정대식 님께서는 현재 의식의 재조정 중에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기철민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못 알아먹겠다는 식으로 말을 하자 엔트로피가 말했다.
<부상을 입고 정신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체르노보그와의 일전에서 목숨의 위협을 받기는 하셨으나.......>
엔트로피가 이어 하는 말을 기다리지 못하고 김송근이 도중에 끼어들었다.
"체르노보그는 어떻게 됐지?"
<완전 공략되어 사라졌습니다.>
"던전이 없어진 것도 그 때문인가?"
<예. 이 던전은 온전히 체르노보그의 영역으로 그의 영향력 아래 유지되던 공간이었던지라 체르노보그가 소멸하자 같이 소멸하게 된 것입니다.>
"역시! 대장님이 해내실 줄 알았어!"
체르노보그가 완전히 죽었다는 사실에 다들 짧게 안도를 했다.
정대식도 아직 의식이 되돌아오지는 않았으나 엔트로피의 말에 따르자면 무사하다니 걱정할 필요가 없는 듯했다.
"그럼 다들 치료를 하는 대로 이 빌어먹을 곳을 벗어나자. 아직 사방에 몬스터가 깔렸으니 조금이라도 안전한 곳을 찾아서 휴식을 취해야 해. 그럼 대장님이 깨어나실 테니 그때 다음 일을 의논하자고."
기철민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고, 기철민은 엔트로피를 돌아보고 물었다.
"부상을 입은 게 아니라면 대장님은 조만간 깨어나시겠지?"
엔트로피는 고개를 저었다.
<정대식 님이 언제 깨어날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모른다고? 다친 게 아니라며?"
<의식의 재조정 중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뜻이야?"
<정대식 님께서는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리고 일종의 큰 변화를 겪으셨습니다. 그것을 재정립하여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만한 시간이 필요하여 일시적인 의식 차단 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 깨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노릇입니다.>
부대원들은 그 말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정대식이 깨어나는 게 아주 늦어질 수도 있다는 뜻으로 판단하고 표정을 흐렸다.
아무리 체르노보그가 쓰러졌다고는 해도 그들끼리 몬스터 밭 한가운데 떨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불안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런 부대원들을 기철민이 독려했다.
"자자, 어차피 체르노보그의 영향력이 사라졌으니 몬스터들의 기세가 예전만은 못할 거야. 이 정도는 충분히 우리끼리 헤쳐 나갈 수 있다. 적어도 대장님이 깨어나기 전까지는 몸 성히 있어야지. 체르노보그를 상대로도 살아남았는데 뭐가 문제겠어?"
그 말에 다들 기운을 얻고 자리를 털어 일어났다. 그러자 김송근이 정대식을 번쩍 안아 드는 엔트로피를 눈짓하고 말했다.
"그나저나, 대장님께선 마기전을 다 획득한 거겠지?"
겉보기로 정대식은 마기전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얄팍한 옷가지 하나만 걸친 맨몸이었고 일체의 무장이 없었다.
마기전의 흔적이 보이지는 않았으나 다들 그가 디멘션 포켓과 같은 저장용 아이템을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거기에 들어있겠거니 하고 굳이 묻지 않았다.
"그럼 다들 움직일 수 있는 거지?"
허미래의 도움으로 긴급처치가 끝이 나고 그들은 이동을 시작했다.
어느새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검은 재가 사그라지고 하늘을 까맣게 뒤덮고 있던 구름도 걷히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며 몇 겹으로 드리운 구름들 사이로, 해가 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햇살이다!"
오랜만에 보는 햇빛에 다들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지옥에서 기어 나온 것처럼 안도하는 기분으로 장막처럼 쏟아지는 햇볕을 바라보고 있던 중에, 이재우가 눈을 가늘게 뜨며 어딘가를 손가락질했다.
"저게 뭐지?"
"어어?"
빠지지직-!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도 떨어지는 것처럼 느닷없이 빛 한줄기가 저쪽에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으나 그 자리에 무언가가 나타난 것 같았다.
"몬스터인가?"
다들 웅성거리는 가운데, 마갑에 올라타 있기에 남들보다 시야가 높은 듀라한이 몬스터라는 말을 알아듣고 뇌까렸다.
「몬스터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