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9
현질 전사
-12권 7화
401조 원이라.
몬스터 하나 잘 잡으면 100조 원이 넘는 돈이 단번에 들어오니 그렇게까지 엄청나다고 느껴지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봤을 때는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결코 채워 넣을 수 없는 돈이라는 말이다.
모자라는 401조 원을 달성하는 가장 빠르고도 확실한 방법은 15성급에 준하는 몬스터를 더 사냥하는 거였다.
그러나 몇 마리나 더 사냥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지금은 서울을 방어해야 하는 상황인지라 함부로 몸을 빼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서울 시내는 몬스터를 사냥하기에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정대식은 자신의 능력에 휩쓸려 애꿎은 사람을 여럿 죽였을까 봐 염려스러웠다.
15성급에 준하는 몬스터를 한 마리도 아니고, 여러 마리 처치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조건이 따라주어야 했다.
'이러다가 지금의 내 능력으로 처치할 수 없는...... 체르노보그가 우스워 보이는 지경의 신급 몬스터가 나타나게 된다면 꼼짝없이 당하는 수가 있어.'
러시아에서 무슨 참혹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그와 같은 일이 이곳 한국에서도 일어나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다.
아니, 조만간 벌어질 일이다.
그 전에 만렙을 달성해놔야 한다는 부담감이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정대식은 레벨 업을 위해 잠시 이곳을 떠나 15성급 이상의 몬스터들을 찾아다니며 사냥하는 방법을 고민해보았다.
다우징으로 잃어버린 보상을 획득하고, 부족한 부분은 서울 바깥에 득시글거리고 있을 몬스터를 처치하는 것으로 메우는 방법이 가장 현실성 있어 보였다.
그러나 사령부에서 자신이 독단으로 움직이는 것을 순순히 허락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 자신의 실력으로는 주위에 피해 없이 돈이 될 만한 몬스터, 즉 최소 15성급에 준하는 몬스터를 처치하기도 어려웠다.
최소한 대피가 어느 정도 끝마쳐지고 어떤 놈을 상대로 어떤 위치에서 싸울 것인지 사전 협의를 한 후에.......
생각에 잠긴 채 호텔로 돌아가던 정대식은 문득 로비에서 서성거리던 남자가 자신을 덥석 붙잡는 바람에 적잖이 놀랐다.
군인으로 보이는 그 남자는 서둘러 정대식을 보고 말했다.
"정대식 씨, 한참 찾았습니다! 총사령관께서 찾으십니다."
"지금 당장 말입니까?"
"예, 지금 당장. 화급을 요하는 일입니다!"
정대식은 또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인가 싶어서 불안한 기분을 안고 총사령관을 만나러 발길을 재촉했다.
* * *
정대식은 서둘러 사령부로 달려갔고 거기에는 각성자들 중에서도 최고라고 말할 수 있는 인물 몇몇만이 모여 있었다.
최희와 강영후도 당연히 거기에 끼어 있었고 김승수와 박희진, 그리고 정대식이 모르는 남자 하나가 포함되어 있었다.
40대 중, 초반으로 보이는 김승수와 박희진은 1차 몬스터 브레이크 때 활약했던 헌터들이었다.
특히 김승수는 아직도 현역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그가 남긴 업적이 어마무시했기에 아직도 공식 랭킹 10위권 내에 드는 강자였다.
박희진은 한때 공식 랭킹 5위권, 파워 랭킹 1위권에 오르기도 했었으나 지금은 은퇴해서 후배들을 양성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이름을 알 수 없었으나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범상치 않은 것으로 봐서 엄청난 실력자인 것 같았다.
계영일은 그들을 굳이 정대식에게 소개하지 않았다. 그럴 정신도 없어 보였다.
그는 즉시 위성 사진 하나를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서울 일대가 찍혀 있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상황이 매우 심각해 보였다.
"......저게, 뭡니까? 설마......."
정대식이 미간을 찌푸리고 하는 말을 듣고 계영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모조리 몬스터들이지."
서울 시내 곳곳에는 지난 파괴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한강 다리 중 두 개가 끊긴 것이 위성 사진으로도 적나라하게 보였고, 그 일대가 물방울로 번지기라도 한 것처럼 형체가 희미하게 지워져 있었다.
다름 아닌 정대식의 파괴력이 남긴 흔적이었다.
그러나 시선을 끄는 것은 그보다 더 남쪽에 있었다. 서울 시내로 진입하는 주요 길목에는 전부 MFP가 설치되어 있었고 도로도 철저히 통제되는 중이었다.
서울로 도망쳐 온 피난민들을 위해 몇몇 도로가 열려 있기는 했으나 밀려 있는 차들의 수가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았다.
온 사방이 몬스터였고 고속으로 움직이는 차량은 놈들의 시선을 끌기에 쉬웠으므로 피난을 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인 것이다.
어찌 되었건 MFP의 효과로 인해 서울에는 몬스터라고 할 만한 얼룩은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그것이 서울 인근 한정이라는 사실이었다.
위성 사진은 점점 줌아웃 되고 있었고 그로 인해 서울의 크기가 작아지며 서울 주변 도시들의 상황이 드러나 보였다.
길이라고 할 만한 곳이 전부 곰팡이처럼 새카맣게 얼룩져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계영일은 그 얼룩이 전부 다 몬스터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계영일은 신음을 토하고 싶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서울이 포위되었다. 곧 놈들이 바로 코앞에까지 닥칠 거야."
계영일이 하는 말에 박희진이 질문했다.
"하지만 MFP가 있잖습니까?"
"몬스터 방어 개발 본부에서는 MFP가 놈들을 막아내 줄 거라고 했지만 내 생각은 회의적이야. 그건 지나치게 급하게 만들어졌고 몇 등급 몬스터까지 막아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정밀하게 실험된 바가 없어. 미국 측에서 보내온 자료를 믿는 수밖에는 없는데, 거기에서도 10성급 이상 몬스터를 상대로 성능을 시험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 게다가......."
계영일은 애써 한숨을 삼키며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화면이 바뀌면서 드론으로 촬영한 동영상이 재생됐다.
드론이 그다지 오래 날지는 못했는지 동영상은 매우 짧았다. 그러나 닥치는 대로 도로와 건물을 파괴하며 모여드는 몬스터들의 수가 셀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확인할 수가 있었다.
"보다시피 놈들의 수가 끔찍하게 많다. 몬스터들이 잠시나마 잦아들었던 이유가 헌터들의 활약 덕분이 아니라 일종의 전략적 행동이 아니었나 의심스러울 정도다. 한강을 따라 수생형 몬스터가 습격한 것도 계산적인 냄새가 난다. 우리가 문어 대가리를 달고 있는 괴수들로 정신이 없는 동안 놈들이 저들끼리 규합해 서울로 진격하기 시작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야."
계영일이 하는 말에 김승수가 믿을 수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몬스터들이 매우 지능적으로 군대와 같이 행동을 하고 있다는 뜻인데, 그건 불가능합니다! 놈들은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고 종류에 따라서 불가사의한 힘을 행사하거나 지능적인 행동 패턴을 보이기도 합니다만, 그뿐입니다. 놈들은 철저한 영역 생물이고 보통은 종류에 따라 각 던전에 나뉘어 있습니다. 즉 서로가 소통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지요. 놈들은 고블린이나 리자드맨들과 같이 동류끼리 무리를 짓기는 해도 오크나 고블린이, 리자드맨이나 켈피가 어울리지는 않습니다. 우연히 영역이 겹치거나 운이 나빠서 놈들을 한꺼번에 상대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기는 해도 거기까지죠."
김승수는 1차 몬스터 브레이크 때 던전에서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와 재난이 일어나기는 했으나, 그들의 움직임이 체계적이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던전에서 뛰쳐나온 놈들은 배를 채우는 데 열을 올렸을 뿐, 여러 던전에서 뛰쳐나온 온갖 몬스터들이 서로 연합을 하거나 지능적인 작전을 벌이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김승수의 말을 박희진이 곧장 반박했다.
"예외의 경우도 있잖아요? 드래곤과 같이 매우 강력한 힘을 갖고 있고 피어로 정신을 조종할 수 있으며 마법을 쓸 수 있을 만큼 지능적인 몬스터의 경우에는 다른 놈들을 장악해서 다스릴 수도 있어요. 간혹 뛰어난 능력자들이 그러는 것처럼요."
그 말에 정대식이 끼어들어 질문했다.
"아무래도 사령관님께서 하실 말씀이 남은 것 같은데요. 저 몬스터들 사이에 매우 강력한 놈들이 있지 않습니까?"
계영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정확한 수가 확인되지는 않았으나 최소 15성급, 최대 18성급은 된다고 짐작되는 거대한 괴수들이 여러 개체 확인되었다. 그들 역시도 서울로 가까이 접근하고 있는 중이지."
"그럼 그 괴수들이 몬스터들을 지휘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최희의 질문에 계영일은 몹시 긍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할 순 없지만 정황상 그런 것 같군."
그러자 김승수가 경악해 소리를 내질렀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때 정대식이 입을 열어 하와이와 모스크바에서 겪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실은 제가 미국과 러시아에서 지금과 같은 일이 벌어질 거라는 징후를 여러 차례 보았습니다. 당시 저는 하와이 방어기지를 지원하기 위해 시서펜트와 헤르보르를 처치하기 위한 작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 두 개체는 1차 몬스터 브레이크 때 나타났던 놈들이고 특히 헤르보르는 5대 거신이라고 이름 붙여졌던 놈이지요."
정대식은 엔트로피를 불러냈다.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난 그녀를 보고 움찔 놀랐으나 곧 그녀가 정대식의 서번트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제지하지 않았다.
정대식은 엔트로피의 도움을 받아서 하와이에서의 기록을 사람들에게 공개했다.
레벨 9로 업그레이드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정대식이 모종의 시스템에 속하게 되면서, 즉 현질 능력을 가진 각성자가 되면서부터 보고 듣고 겪은 일은 전부 저장되어 있었다.
"저것은 제가 하와이에서 확보한 영상입니다. 1인칭이라 그다지 많은 내용을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만, 놈들의 움직임에 일종의 흐름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실제로 제가 하와이 방어기지에서 줄곧 몬스터들과 싸워왔던 피닉스 공격대의 공대장은 그들이 서로 작전이라도 짠 것처럼 번갈아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가 러시아로 날아가 체르노보그의 영역을 지나치며 본 바에서도 그렇습니다."
정대식은 곧 체르노보그의 던전 바로 앞에서 보았던 광경을 재생시켰다.
그 광경을 보고 모든 사람이 신음성을 내뱉었다.
"보다시피 모든 종류의 몬스터가 한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역할에 따라 분류되어 있죠. 헌터 식으로 말을 하자면 탱커라고 여겨지는 중장갑병...... 그러니까 트롤이나 타탄과 같은 놈들이 전방에 늘어서 있고 근딜이라고 할 수 있는 경장보병, 오크나 고블린 같은 놈들이 대열을 맞춰서 모여 있습니다. 그들 사이사이로 보이는 것은 힐러나 버퍼 역할을 하는 주술사, 뱀파이어, 네크로맨서들이고...... 뒤쪽으로 원딜 역할의 궁수, 마법사 등등이 있습니다. 더불어 미노타우로스나 만티코어 같은 기동병들도 보이고요. 하늘에는 하피들이나 가고일, 그리폰들이 들끓고 있고 지하에도 뭐가 있을지 모르는 일이죠. 누가 봐도 전례 없이 훌륭한 군대가 아닙니까?"
김승수는 도무지 안 믿긴다는 투로 말했다.
"그럼 이 몬스터 군대를 지휘하는 게 바로 체르노보그였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듀라한의 도움도 있었지만, 이놈들이 흩어진 결정적인 계기가 체르노보그의 소멸이었으니까요. 만약에 체르노보그가 소멸하고서도 놈들이 군대와 같은 전략을 가지고 우리를 덮쳐들었다면 제아무리 올인원인 저라도 살아서 여기 있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체르노보그가 사라지고 듀라한의 저지로 놈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렸죠."
그러자 최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떻게 최후의 전쟁, 즉 라스트 몬스터 브레이크가 조만간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했는지 알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