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0
현질 전사
-12권 8화
최희의 말에 정대식은 긍정해 보였다.
"그렇습니다. 체르노보그의 던전 앞에서 본 이 충격적인 광경은 누가 봐도 침공의 준비였죠. 체르노보그의 영역이 갈수록 확장되고 있었다는 것 또한 그 징조로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러시아를 떠나올 적에 여러 개의 던전이 한꺼번에 생성되는 것도 보았습니다. 거기에 우리가 전혀 모르는 새롭고도 강력한 몬스터가 있으리라고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죠. 그러니 이놈들은 몬스터를 장악하고 지배하여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것입니다."
계영일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말했다.
"그렇다면 실로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군."
그 말에 최희가 재빨리 답했다.
"어찌 보면 잘된 일일 수도 있습니다."
"뭐?"
계영일이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듣는다는 식으로 반응했으나 최희는 굴하지 않았다.
"우리가 이 엄청난 수의 몬스터들을 모조리 상대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니까요. 정대식의 말에 따르자면 놈들을 지휘하고 있는 우두머리만 처치하고 나면 이놈들의 규합은 깨질 거라는 말입니다. 인간처럼 지휘체계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거야 그렇겠지만, 그 우두머리들은 무려 18성급의 괴물들이야!"
계영일이 비명 치듯 하는 말을 듣고 최희는 입을 꾹 다물었다.
계영일은 자신이 곧 실수했다고 깨달았는지 언성을 낮추었으나 그가 절망적인 어조로 말을 하고 있다는 데는 변함이 없었다.
"현실적으로 봤을 때 세계 최강, 인류 중에 가장 강력한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정대식조차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리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데 지금 그와 같은 놈들이 한둘도 아니고 여러 마리나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18성급이라고 한 것은 낙관적인 예상이다. 놈들의 등급이 정확히 어느 정도나 될지는 아무것도 몰라. 오랫동안 15성급 체르노보그가 인간이 목격한 몬스터 중에 가장 강력한 놈이었으니까 말이야. 20성급일 수도 있다고 각오하는 것이 옳겠지."
좌중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계영일은 엄숙하게 말했다.
"제아무리 정대식이 강력하다 하더라도 이놈들을 전부 해치울 순 없는 노릇이다. 더군다나 놈들의 주변으로는 수십만 마리의 몬스터들이 떼를 이루고 있어서 접근하기조차 쉽지 않아."
그 말을 듣고 김승수가 본인도 반신반의하는 투로 입을 열었다.
"지방에 있는 각성자들을 규합하여 동시 공격을 하면......."
그러나 자신감 없는 그의 말은 도중에 잦아들었다.
스스로 판단키에도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방의 각성자들은 각자 있는 위치를 지키는 것만도 버거워하고 있었다.
일단 각성자들의 수가 서울에 압도적으로 많았고 그들 대부분이 여기 있었기 때문이다.
설령 전국의 각성자들을 다 끌어모은다 하더라도 그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스러웠다.
만약 그런 대규모 작전을 벌인다 치면 상세한 계획과 빈틈없는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놈들이 턱밑까지 당도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작전이나 짜고 있을 여유조차 없어 보였다.
그 모든 상황을 종합해보면 반격의 여지는 조금도 없었다.
계영일은 벌써부터 패배를 감지하고 절망에 차 있었다.
그 분위기는 사령부를 온통 장악하고 있었다.
무거운 정적이 흘러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 수 없는 가운데, 뭔지 모를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정대식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특히 최희와 강영후가 그랬다.
그들 두 사람은 누구보다 가까이서 그의 성장을 지켜봐 왔다.
상식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속도로 정대식은 강해졌고, 이제는 감히 인간이 도달하지 못하는 영역에까지 이른 터였다.
그라면 무슨 뾰족한 수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는 듯했다.
정대식은 이 모든 상황이 썩 즐겁진 않았다.
물론 누구라도 코앞에까지 몬스터 떼가 다다라 죽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지금 상황이 즐겁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나 정대식의 심경은 더 그랬다.
벌써 몇 번이나 죽을 위기를 넘겨가며 싸워왔다. 그리고 그 싸움은 정대식이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는 잘 먹고 잘사는 게 소원이었다. 한때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모두 누리겠다는 욕망에 불타기도 했지만 이제 와 보니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정대식은 그저 좋은 집에서 따듯한 밥 먹고 평화롭게 살고 싶었다. 커피값을 신경 쓰지 않고 가까운 거리는 택시를 타고 이동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를 누리면서 말이다.
그게 진짜 정대식이 원하는 삶이었다. 이런 피비린내 나고 격동적인 삶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데모크리토스의 선택을 받아 누구보다 강력한 힘을 갖게 됐고, 스스로 세상의 구원자를 자처하고 나선 이상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정대식은 자신이 바라는 삶이 세상이 평화로워야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걸 위해서는 싸우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체념하는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계영일은 잠시 멈칫했다.
최희나 강영후와는 달리 그는 정대식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가 이 긴급회의에 소집한 사람의 면면을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는 1차 몬스터 브레이크 때 아무것도 모르던 애송이들을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한물갔다고 할지 몰라도, 김승수나 박희진같이 인류를 덮쳤던 최초의 재앙에서 살아남은 영웅들을 더 믿었다.
그건 상대가 올인원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한강에서 그가 보인 파괴력은 실로 놀랍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두려운 구석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를 완전히 의지할 수 없었고, 상황이 악화되면 언제든지 꽁무니를 뺄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세상이 망하는 위기 순간에는 도망치는 데만도 능력이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말이다.
무엇보다 이런 종류의 일에는 희생이 필요한 법이었다.
계영일은 1차 몬스터 브레이크 때 역사에도 남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바쳤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의 확장 현실 세계는 그러한 사람들의 피와 살 위에 살아남은 세상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일을 알지 못하는 애송이가 그처럼 고귀한 정신을 계승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정대식은 누가 강요하지도 전에 먼저 나서서 입을 열었고, 계영일은 다시 물었다.
"뭐라고 했지?"
정대식은 침착하게 말했다.
"제가 하겠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저 몬스터들을 처치하는 일을요."
계영일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의 의도를 의심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건 희생의 문제이기도 했으나 능력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는 15성급 문어 괴수를 어렵잖게 처치했으나 그렇다고 확인도 안 된 여러 마리의 20성급에 준하는 몬스터들을 혼자서 죽일 수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계영일이 정대식이 장담하는 말을 반신반의하며 질문을 던지려 하자, 그 전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반문하는 계영일을 보고 정대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하기 시작했다.
* * *
정대식이 요구한 것은 당혹스럽게도 보수였다.
"제가 세상을 구하는 대신에 돈을 주십시오."
"도, 돈이라고?"
계영일은 적잖이 놀랐는지 조금 말을 더듬었다.
정대식은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돈이요."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입을 다물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정대식은 어깨를 으쓱하고 말을 이었다.
"20성급 몬스터를 한 마리도 아니고 여러 마리를 상대하는데 공짜로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마땅한 대가를 받아야겠습니다. 한 마리당 100조 원씩, 어떻습니까?"
그것도 금액이 어마어마했다.
100조 원이라니!
한 광역시나 지방자치단체의 일 년 치 예산과 맞먹는 수준의 금액이었다.
아무리 세상에 큰 부자들이 많아도 100조 원대 부자는 손에 꼽을 만했다.
각성자들의 등장으로 그 수가 늘었다고는 해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10조 원대 부자도 보기가 힘들었다.
1조 원만 해도 하루 100만 원씩을 써도 2740년을 쓸 수 있는 돈이다.
그 정도도 엄청난데 100조 원이라니!
게다가 그건 한 마리의 가격이다.
서너 마리 잡는다면 3,400억 원, 10마리만 잡아도 1,000조 원이다.
계영일도 재산이 적다 할 수 없었으나 그 정도 금액을 가질 수 있으리라 상상해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정대식이 세상을 구하는 대가로 그 돈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일차적인 충격이 지나가고 나자 일종의 배신감 같은 게 찾아들었다.
그에게 모종의 기대를 걸고 있었던 최희나 강영후도 그렇고, 계영일이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싸움은 인류의 존속이 걸린 중대한 문제였다.
만약에 서울을 포위하고 있는 놈들을 처치하지 못하면 단순계산으로도 대한민국 인구의 5분의 1이 죽는다.
또한, 서울에 대부분의 각성자들이 머무르고 있으므로 전력은 절반 이상으로 깎인다고 봐야 했다.
부산이 다소 버틸 수 있을지는 몰라도 바다를 끼고 있으므로 불리하다.
서울이 낙성하면 사실상 대한민국은 끝이었다.
아니, 전 지구가 끝장난다고 보는 게 옳았다.
한국은 뛰어난 각성자가 많기로 유명한 나라다.
비록 이능에 관한 연구 개발이나 무구에 대한 기술력은 미국이나 유럽을 따라가지 못했으나 전투력만큼은 최고였다.
즉, 서울에 모여 있는 각성자들이 지구 최고의 전투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전부 당해버려 한반도가 몬스터들에게 집어삼켜 진다면 다른 나라들의 운명도 다를 바 없을 터였다.
그러니 세상을 구한다고 말하는 정대식의 표현은 결코 과장된 게 아니었다.
인류의 존속을 건 필요불가결하면서도 신성한 전쟁인 셈이었다.
누구든 그럴 능력만 된다면 마땅히 나아가 싸워야 할 일이었다.
한데 정대식이 보수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그 말인즉슨, 합당한 대가가 없으면 싸우지 않겠다고 공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머지 사람들이 충격을 받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정대식의 요구는 합당했다.
만약 그가 세상을 구할 수 있다면 인류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받아야 했다.
그게 금전적인 부분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목숨을 내거는 일인데 그만한 대가가 있어야 할 터였다.
계영일은 재빨리 흐트러진 정신을 수습했다.
그는 이 일이 자신 혼자서 판단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얼른 머리를 굴려서 이 일을 논의할 만한 사람을 생각하며 말했다.
"......그 보수란 걸 지불하면 20성급이나 되는 놈들을 처치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정대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정말인가? 아무리 자네라 하더라도 쉽지 않을 텐데."
"할 수 있습니다."
"일단 알겠네. 그 문제는 좀 생각해봐야 할 것 같군. 잠깐만 기다려주면 그 일을 의논할 만한 사람을 보내겠어."
총사령관은 회의를 끝냈고 정대식은 나머지 사람들과 함께 사령부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최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 중요한 순간에 요구하는 게 고작 돈이라니."
정대식은 그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
"고작 돈이라뇨? 돈이 얼마나 중요한 건데."
"물론 중요하지. 중요하겠지만 지금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따로 있지 않아?"
"제게는 이게 더 중요합니다. 제가 보수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무 대가도 없이 맨몸으로 그런 위험한 일을 할 수는 없잖아요? 단지 제가 할 수 있다는 이유로 대가 없는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렇게 말을 하니 최희도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좀 황당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