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4
현질 전사
-12권 12화
곤충은 제아무리 그 수가 많아 봤자 곤충일 뿐이었다. 사람을 잡아먹고 건물을 무너트리는 무시무시한 괴수들을 상대로는 별 힘을 쓰지 못했다.
정확히는 어떤 식으로 자신의 능력을 써야 하는지를 몰랐다.
그가 유명세를 떨치게 된 것은 몬스터 브레이크의 여파가 가라앉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각성자들이 던전의 탐사를 시작하고 거기에서 온갖 보물을 발굴하던 그 무렵, 장재원은 자신의 능력이 던전 안에 있는 곤충들에게도 통용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어느 던전에서 인간에게나 몬스터에나 치명적인 해를 입히는 독충을 발견했고, 그것의 번식에 성공했다.
그 이후 그는 여러 던전을 돌아다니며 독충으로 몬스터들을 사냥했다.
그는 남들처럼 무리를 지어 돌아다닐 필요도 없었고, 값비싼 무구를 차리지 않아도 되었다.
독충 한 마리가 몬스터의 살갗으로 침을 찔러 넣거나, 아니면 몸에 난 구멍 안으로 기어들어가기만 하면 그냥 픽픽 쓰러져 죽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몬스터를 숙주로 삼아 기생하는 곤충을 찾아냈다. 그 곤충은 몬스터들의 중추 신경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장재원은 그놈들을 이용해 몬스터들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번식에 실패하여 독충처럼 다량을 쓸 수는 없었지만, 단 한 마리로도 어느 놈을 숙주로 삼느냐에 따라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했으므로 아쉽지 않았다.
그렇게 던전을 돌아다니며 돈을 벌어들인 장재원은 곧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사업을 벌였다.
건물 안에 있는 곤충을 박멸해주는 환경위생사업이었다.
확장 현실 세계가 시작되면서 전에는 없던 종류의 벌레들이 생겨났기에 그의 사업은 그야말로 대박을 쳤다.
그는 떼돈을 벌어들였고 사업을 막 해외로까지 확장하려던 참이었다. 그 와중에 이 난리가 일어나 모든 것을 올스톱한 상태로 몬스터와 싸우게 생겼으니 불만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역시도 헌터였기에 내가 왜 싸워야 하느냐는 둥의 바보 같은 소리는 하지 않았다. 이 몬스터들을 처치하고 인간 세상을 지켜내지 못하면 자신의 사업도 아무 소용이 없어질 터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재원은 겉옷 안쪽에 매달아둔 여러 개의 호리병을 만지작거렸다.
관건은 어떤 몬스터를 숙주로 삼느냐였다.
쓸 만한 놈이어야 할 텐데, 생각하며 그는 마른 침을 삼켰다. 실전은 오랜만인지라 적잖이 긴장이 됐다.
그때였다.
쿠우우우우.......
쿠르르르르르르르!
땅 울림이 극심해지며 살갗이 따끔따끔해지는 살기가 밀려들었다.
정체불명의 소리가 귓속을 가득 메우고 심장이 흥분과 긴장으로 폭발할 것 같던 그 순간.
파캉-콰과과과과광!
IC 입구를 막고 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터져 올랐다.
뭔가가 폭발한 건 아니었다.
순전히 힘으로 그 벽을 뚫어버린 것이었다.
쾅! 콰르르르! 콰아앙! 쾅! 쾅!
사방팔방으로 차와 콘크리트 잔해가 떨어져 내리는 가운데 거대한 미노타우로스 한 마리가 끔찍하게 큰 해머를 휘두르며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동시에 몬스터 떼들이 벽을 무너트리며 안으로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그 광경을 보고 8, 12 연합대가 양쪽에서 한꺼번에 덤벼들었다.
콰르르르르르르르!
가장 먼저 폭렬헌터 이창준의 불 쇼가 몬스터 떼를 휩쓸었다.
그는 그야말로 화룡처럼 온몸에서 불길을 토해내며 불의 파도로 몬스터 떼를 후려쳤다.
거기에 휘말려 미노타우로스를 따라오던 잡몹들이 모조리 타죽었다.
"키에에에에!"
"키아아아아!"
"카르르르르!"
그러나 그 와중에도 미노타우로스 중에서도 유난히도 거대한 덩치를 가진 놈이 해머를 휘둘러 이창준을 내리치려 했다.
그러자 누군가의 방어막이 그 공격을 막아내었고 이창준은 미노타우로스를 완전히 구워버리겠다는 심산으로 한층 더 열을 올렸다.
"하아아아아아아!"
콰르르르르르르!
그가 몸에서 피워올리는 불꽃이 미노타우로스를 태우다 못해 하늘로까지 치솟아 올랐다.
이윽고 불의 회오리가 빙글빙글 돌며 뒤따라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몬스터들을 사방팔방으로 날려버리며 불태웠다.
실로 대단하다 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이창준의 놀라운 능력을 본 헌터들은 일제히 기대했다. 이창준이 만들어낸 불 회오리의 가공할 위력이 이 전투가 승리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이창준의 불 회오리가 휩쓸고 간 자리에 8, 9 연합대의 각성자들이 진입해 들어왔다.
그들은 기세 좋게 고함을 내지르며 흩날리는 재 위를 뛰었다.
불 회오리가 잦아들고 다시금 달려들어 오기 시작하는 몬스터들을 상대하기 위해서였다.
"싸우자!"
"놈들을 밀어버려!"
"가자!"
서로를 독려하는 외침들이 오가는 가운데 여기저기서 마력의 빛이 번쩍이고 타격음과 폭발음이 연이어 터졌다.
방어막이 몬스터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디버프가 놈들의 발을 묶는 가운데, 눈부시고도 위력적인 공격이 난무했다. 그러던 순간에 누군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아이스 슬라임이다! 슬라임 떼가 온다!"
무너지다 만 벽 위에 올라서 먼 곳을 내다본 헌터 한 명이 내지르는 소리였다. 곧 그 말대로 창백한 빛을 띤 아이스 슬라임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보통 슬라임들은 구체나 물방울 모양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기 마련이었는데 이놈들은 더욱 납작했다. 바닥을 흐르듯이 움직이며 일대의 모든 것을 얼려버렸다.
닿는 즉시 얼음 덩어리가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딜러들이 일제 후퇴를 했다. 대신 디버프들이 나서 놈들의 속도를 늦추었다. 그 틈을 타 이창준이 한 번 더 능력을 발휘했다.
"타올라라!"
콰르르르르르르!
불의 장막이 아이스 슬라임을 뒤덮었고 폭발음에 가까운 굉음이 울리며 엄청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그 수증기에 시야가 온통 가려 잠시 공격이 그쳤다. 그러자 그 수증기 사이로 우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아이스 켈피들이 들이닥쳤다.
"으아악!"
아이스 켈피들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8, 12 연합대 사이를 돌파했다. 그러면서 날카로운 아이스 스피어를 발사했다.
그것은 물리적으로도 위력적이라 한번 맞으면 그대로 몸이 꿰뚫릴 뿐만 아니라, 바닥으로 채 넘어지기도 전에 제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순식간에 여러 명의 헌터들이 아이스 스피어에 꿰인 채 얼어붙어 절명했다.
아이스 켈피 떼들은 그 기세를 몰아 나머지 공격대들이 있는 도로로 뛰어들었다.
강영후는 침착하게 명령을 내렸고 그 지휘를 따라 디버프들이 일제히 아이스 켈피들의 발을 묶었다.
"슬로우!"
"포스 오브 그래비티!"
"마력 사슬!"
아이스 켈피들이 멈칫하는 새 스크롤을 동원한 속성 공격이 쏟아졌다.
내리치는 불벼락에 아이스 켈피들 대부분이 죽었으나 이미 8, 12 연합대는 상당한 데미지를 입었다.
여기저기 구멍이 뚫린 것을 보고 강영후가 신속히 빈자리로 공격대들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연합대들을 잠시 물러나게 하려는데 갑자기 몬스터 떼의 진격 속도가 늦춰졌다.
놈들의 뒤쪽에서부터 소란이 일어나며 서로 뒤엉켰다. 막 벽을 넘어 안쪽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만티코어 놈들이 별안간 같은 몬스터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만티코어는 아무리 작은놈도 최소 5성급은 되는 위력적인 몬스터였다. 그런 놈이 한 마리도 아니고 여러 마리가 미쳐서 날뛰니 몬스터 떼의 대열이 흐트러지며 혼란스러워졌다.
그러자 검은 먼지 같은 게 요란한 날갯소리를 내며 허공으로 피어올랐다.
다름 아닌 곤충왕 장재원이었다.
"가라!"
그가 팔을 한번 휘두르자 먹구름처럼 새카맣게 일어난 독충 떼가 뒤섞인 몬스터 떼를 덮쳤다. 그러기가 무섭게 놈들이 순식간에 와르르 쓰러져 죽었다.
독충 떼가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몬스터들이 픽픽 쓰러졌고, 그를 앞세워 연합대가 전열을 가다듬었다.
강영후는 나머지 공격대들에 그들을 지원하라 말했고 반격 작전을 준비했다. 놈들을 크게 한 방 때려 후퇴시킬 작정이었다.
강영후가 막 지시를 내리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머리 위가 어두워졌다.
그는 그리폰이 다시 나타났나 싶어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제 생각이 지나치게 순진했음을 깨달았다. 그러자 말문이 턱 막혔다.
다행히도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을 누군가 목청이 터지라 외쳤다.
"용이다-! 드래곤이다-!"
곧 머리 위로 브레스가 쏟아져 내렸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
* * *
이창준은 드래곤의 붉은 몸뚱이를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거대한 불덩이를 쏘아 올렸다. 그러자 드래곤이 쏟아낸 브레스와 그가 쏜 불덩이가 서로 부딪치며 뜨거운 열기가 분수처럼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온 사방이 휘날리는 불꽃으로 지옥 불 구덩이나 다름없었으나, 드래곤의 브레스를 정면으로 맞는 것보다는 나았다. 거기에 스치기만 해도 재가 되어 사라질 것이 뻔하니 데여도 이창준의 불꽃에 데는 편이 나은 것이다.
그의 생각이 옳았던지 브레스가 쏟아졌음에도 많은 수의 연합대 각성자들이 살아남았다. 그러나 본인들의 생존을 의심이라도 하듯 얼떨떨한 모습이었다.
사실 하늘을 뒤덮는 드래곤의 위용이 어마어마하기는 했다. 현실 세계에서 드래곤을 보리라고 생각지 못했기에 다들 꿈이라도 꾸는 표정이었다.
이창준은 얼빠진 사람들에게 악을 써댔다.
"꺼져, 당장 비키라고! 놈이 돌아온다!"
이창준은 다른 사람들을 걷어차고 밀어내며 도로 밖으로 피신하라고 고래고래 외쳤다.
곧 그의 말대로 하늘 저편에서 우회한 드래곤이 다시 이쪽으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이창준은 드래곤의 보석같이 붉은 눈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고 느꼈다.
하필이면 나타난 놈이 파이어 드래곤인지라 마침내 일생일대의 적수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오냐! 와봐라! 네 불이 강한지 내 불이 강한지 어디 한번 겨루어보자!"
이창준은 전신을 불꽃으로 뒤덮었다.
그의 몸을 감싸고 도는 불길은 가까이 가지도 못할 만큼 뜨거웠으나 이창준의 머리카락 한 올도 태우지 못했다.
불길은 서서히 커졌고 점차 그 색깔을 달리해갔다. 이윽고 붉은색과 노란색으로 불타오르다가 새하얗게 변했고 종내에는 푸른색이 되었다.
그는 멸명하는 별빛처럼 차가운 색으로 불타오르며 날아드는 파이어 드래곤을 노려보았다.
곧 놈의 입이 쩍 벌어지며 그 아구창이 불타는 것을 보고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을 마주 쏟아냈다.
거의 동시에 드래곤의 주둥이에서도 브레스가 쏟아져 나왔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
콰르르르르르르르르----------!
일대가 몽땅 불길에 휩싸이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불꽃과 불꽃이 서로 만나 폭발하고 뒤엉키며 주위의 모든 것을 소진시켰다.
불길이 소용돌이치며 불의 폭풍이 사방을 휩쓸었다.
휘오오오오오오오오오--------------!
불의 야수가 울부짖는 것 같은 소란이 지나치고, 이윽고 불길이 거두어졌을 때는 열풍과 불꽃, 그리고 재가 휘날리고 있었다.
이창준이 서 있던 자리에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뼛조각 하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자신이 쏟아낸 불길과 드래곤이 토해낸 불길을 이기지 못하고 흔적없이 타버린 것이다.
타버린 것은 이창준뿐만이 아니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여러 각성자들이 재가 되어 사라졌고, 주변의 건물과 도로도 모조리 녹거나 불타버려 폐허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