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7
현질 전사
-12권 15화
그는 곧 계영일을 찾아냈다. 강영후를 본 그는 그의 부상소식을 전해 들었는지 곧 손을 내밀어 어깨를 두드리고 말했다.
"치명상을 입었다더니만 다행이군! 두 다리로 걸어 다니는 것을 보아하니 생각만큼 부상이 심각하지는 않은 모양이야."
"그럭저럭 견딜 만합니다. 그보다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강영후는 유태훈이 파이어 드래곤을 언데드화 시켰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그러자 계영일이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드래곤이 우리 편이라면 3차 방어선은 꽤 오래 버틸 수 있겠군. 그렇다면 그 전까지는 정대식도 돌아오지 않겠나?"
"그러기를 바라야죠. 적어도 쉴드 작전이 끝장나기 전에는 나타날 겁니다."
"그건 서울을 포기하는 작전이다! 그 전에 정대식이 나타나야 해! 그자가 그것을 대가로 엄청난 보수를 받아가지 않았는가! 이 난리 통에 그런 대가가 무슨 의미가 있다고......!"
잠자코 선 강영후를 보고 계영일은 혀를 찼다. 그는 모든 각성자들이 귀환하는 대로 공격대 배치가 새로이 이루어질 거라 말했고, 강영후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 몸을 돌렸다.
그런 뒤 발길을 옮기려는데, 막 계영일을 만나러 온 송시민과 마주쳤다. 그는 강영후를 보고 알은 체를 했고, 강영후는 노파심에 그를 붙잡고 물었다.
"당신이 쉴드 작전의 중심이 될 거라 들었습니다만."
"예, 제가 하는 일이 그거니까요."
"15성급 이상이나 되는 괴물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그건 해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죠."
송시민은 담담하게 대꾸했고 그 말이 옳았다.
15성급 이상이나 되는 몬스터의 위력이 어느 정도가 되는지는 싸워보기 전에는 짐작기 어려운 법이었다.
더욱이 쉴드 작전에는 송시민 그 한 사람만 투입되는 게 아니었다. 방어막을 칠 수 있는 모든 인원이 동원되는 것이었다.
"정대식은 어떻습니까?"
현재 정대식의 정확한 위치는 공개되어 있지 않았으나 강영후는 그가 송시민의 패닉룸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송시민은 알쏭달쏭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거기에서 꼼짝을 안 하고 있습니다. 침낭을 깔고 거기 누워 있더군요."
"누워 있다고요?"
"음, 그 표현은 정확하지 않을지도...... 쓰러져있다고 해야 하겠죠? 옆에서 서번트가 지켜보는 광경이 의식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강영후는 그의 상태가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린 직후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아마 그의 준비에는 그렇게 의식이 없는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심히 염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의식이 없다면 바깥 상황을 무슨 수로 알고 깨어나 싸울 수 있겠는가?
송시민도 그 부분을 염려하는 눈치였다.
"제가 생각한 종류의 준비와는 전혀 달라서 과연 그가 시간을 맞출는지 모르겠군요."
그가 하는 말에 강영후가 대꾸했다.
"걱정 마십시오. 그는 조만간 깨어날 겁니다."
Chapter 71. 맹투
악몽같이 긴 밤이 지나고 있었다.
모든 각성자들과 피난민들이 종로로 모여들었고 종로로 진입하는 모든 도로가 폐쇄되었다.
종로로 들어찬 사람들로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거기에는 불안한 분위기가 넘쳐흘렀고 미처 통제되지 못한 공포심이 폭력사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혼란스러운 가운데 강영후는 새로운 명령을 받았다. 그와 타이탄 공격대는 북한산을 방어하고 있는 최희를 도와 탈출구를 뚫는 역할을 맡았다.
쉴드 작전이 시작되면 공격이 가능한 모든 각성자들은 북쪽으로의 활로를 열어 시민들을 서울에서 대피시키게 될 터였다. 계영일의 말마따나 서울을 버리고 도망치는 작전이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어찌어찌 포위망을 뚫고 서울 밖으로 달아난다 하더라도 다른 곳에 몬스터가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계획은 강화도로 가서 섬을 고립시켜 방어기지를 구축하는 것이었으나 서울도 지키지 못하는 판국에 거기라고 안전할는지는 의문이었다.
그러니 그 계획은 사실상 큰 의미가 없었다. 아무리 늦어도 쉴드 작전이 펼쳐지기 전까지는 정대식이 나타나야 했다.
그가 몬스터 떼를 도로 서울 밖으로 밀어내고 장담한 대로 5대 거신을 쓰러트린다면 다시금 방어 체계를 정비하고 반격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쉴드 작전마저 실패하고 서울을 포기하게 될 경우에는 뒤따르는 희생과 손실이 지나치게 커서 다시금 회복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강영후는 서둘러 보급품을 챙기고 북한산으로의 이동을 준비했다.
최희가 혼자서 놈들을 막아내고 있었기에 그쪽 날씨가 쉴 새 없이 급변하는 게 보였다.
북쪽에도 사령부가 네메시스라 이름 붙인 15성급 이상 몬스터가 버티고 있었으므로, 말이 활로를 여는 것이지 맞붙어 싸우게 된다면 초개처럼 목숨을 내버리게 될 터였다.
그들로선 네메시스를 쓰러트릴 방법이 없었고 몸으로 놈을 막아내는 동안 일반 시민들이 안전하게 대피하기를 바라는 수밖엔 없었다.
이동할 준비를 끝마친 강영후는 어쩐지 떠나기 전에 정대식을 한번 보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타이탄 공격대를 먼저 출발하게 하고 자신은 아까 송시민에게 물어보았던 패닉룸을 찾았다.
남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자리한 패닉룸은 컨테이너로 만들어져 있었다.
희미한 빛을 내뿜고 있다는 것 말고는 겉으로 보기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내부가 보여야 할 창문 안이 암막으로 가린 것처럼 캄캄했다. 그래서 그 안에 정말로 정대식이 침낭을 깔고 누워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패닉룸 곁을 서성이던 강영후는 문득 정대식의 서번트가 그의 곁을 지키고 있다던 말을 떠올렸다.
혹시나 싶어서 그는 목소리를 높여 그 서번트를 불러보았다.
"엔트로피?"
<예, 말씀하십시오.>
생각 외로 대답은 즉각 돌아왔다. 강영후는 좀 놀라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정대식의 상태는 어떻지?"
<정신과 육체의 구조를 재조정하는 중입니다.>
"뭐라고?"
<다시 말씀드려 싸울 준비 중입니다.>
"그래......."
잠시 당혹했던 강영후는 곰곰 생각하다 다시 물었다.
"그는 언제쯤 복귀할 수 있겠나?"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다니? 몇 시간 내로 돌아오는 게 아니었나?"
<이 단계로의 레벨 업은 처음이라 정확히 몇 시간이 걸린다고 확정할 수 없습니다.>
강영후는 크게 놀랐다.
"그렇다면 며칠이나, 몇 달이 더 걸릴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강영후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끼고 잠시 비틀거렸다.
회복의 후유증으로 그런 것인지 정신적 충격으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지금 서울을 걱정할 때가 아니라는 거였다.
강영후는 정대식이 아무리 늦어도 서울 전역을 몬스터 떼에 빼앗기기 전까지는 돌아오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이 아니면 몇 달이라니?
만약 정대식이 몇 달 후에 돌아오게 된다면 한반도에서는 인간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게 될 수도 있었다.
가장 강력한 각성자들이 버티고 있는 한국이 끝장난다면 그건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라는 뜻이었다.
즉, 정대식은 멸망해버린 세계로 돌아올 수도 있었다.
'정대식!'
강영후는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엔트로피의 말을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도무지 그렇게 안 됐다.
정대식의 귀환이 늦어지는 데 따르는 대가가 너무 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정대식을 그냥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있었더라면 5대 거신을 쓰러트리고 서울을 방어할 수는 없어도 어떻게든 강화도까지는 갈 수 있었을 터였다.
거기서 방어 전선을 새로이 구축하고 난 뒤, 충분히 시간이 있다고 판단되었을 때 그 준비인지 뭔지를 시작했어야 했다.
그런데 서울을 빼앗기면 안 된다는 생각에 앞뒤를 보지 못한 것이다.
강영후는 혼미해지려고 드는 정신을 차리려고 재차 물었다.
"설마, 정말로 시간이 그렇게 걸리는 것은 아니겠지? 빠르면...... 몇 시간 내 돌아올 수도 있는 거겠지."
다행히도 엔트로피는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그렇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빨리 돌아오길 바라는 수밖에 없겠군."
강영후는 비틀거리며 물러나 패닉룸을 떠났다. 그리고 북한산으로 향하는 다른 공격대의 지프를 얻어 타고 최희에게로 향했다.
* * *
휘오오오오-
최희는 찬바람이 부는 산비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절경을 자랑하던 북한산은 그 자태를 찾아볼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있었다.
서울을 향해 앉은 북한산의 등짝은 온통 파헤쳐지고 무너지고 부서져 엉망진창이었다.
흡사 거대한 탱크가 깔고 지나간 자리에 폭탄을 수십 발이 떨어진 것 같은 광경을 하고 있었다.
산을 거대한 갈퀴가 긁어놓은 것 같기도 했다.
지난 1차 몬스터 브레이크 때도 온전했던 명산이 그런 식으로 파괴된 것을 보자 마음이 착잡했다.
최희는 어둠이 깔린 산비탈에서 몸을 돌렸고 곧 북한산 능선을 따라 채워지는 병력을 바라보았다.
도로를 타고 산으로 올라오는 지프들의 헤드라이트 불빛도 줄줄이 보였고, 바위 위를 기어 올라오는 강영후의 모습도 보였다.
"저질 체력이군."
최희가 헐떡거리는 그를 보고 하는 말에 강영후가 죽을 맛이라는 듯이 식은땀이 가득한 이마를 손등으로 훔쳤다.
"요즈음 운동을 게을리했나 보지."
사실 강영후는 자기관리에 굉장히 엄격한 사람이었다. 그는 사냥을 나가는 때가 아니면 매일매일 아침마다 5km씩 조깅을 했고 체육관에서도 2시간 가까이 근력운동을 했다.
전신이 다량의 근육과 적당량의 지방으로 뒤덮여 있어 활력이 넘쳐흘렀다. 이 정도 산을 탄다고 피곤해할 리가 없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낯빛이 창백한 것을 보아하니 1, 2차 방어선을 지켜내느라 부상을 입었던 게 틀림없었다. 컨디션이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움직인 탓이었다.
그 사실을 뻔히 짐작하고 있었으나, 괜히 걱정하는 기색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최희는 퉁명스레 말했다.
"정대식은 아직도 준비가 되지 않았나?"
강영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가 더 걸릴지 모른다더군."
"뭐라고? 지금 그렇게 한가한 소리를 할 때가 아니잖아? 저길 보라고."
강영후는 어둠에 휩싸인 시가지 저편을 바라보았다.
한강이 있음 직한 곳에서 MFP가 새파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산꼭대기에서 보니까 파랗게 타오르는 띠가 지평선을 따라 이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건 바로 몬스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놈들의 공세가 시작됐어. 1차 방어선이 뚫렸을 때 절감했겠지만 MFP 저건 장식품에 불과해. 잡몹들을 내쫓는 역할을 할지는 몰라도 이런 극한 상황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지. 놈들이 한강을 건너 상륙하는 것은 시간문제야."
"유태훈이 언데드 드래곤을 만들어냈으니 다소 시간을 벌어줄 거다."
"그렇다 해도 오래 버티지 못할 거야. 한시가 급하다고. 준비 따위를 한다고 꾸물거릴 때가 아니란 말이지. 그런데 정대식 이 자식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최희가 답답함에 가슴을 치자 강영후가 말했다.
"오기 전에 정대식이 있는 패닉룸에 가봤는데 그의 서번트, 엔트로피가 묘한 말을 하더군."
"묘한 말이라고?"
"육체와 정신을 재구성한다고 했어. 그래서 오래 걸린다는 식으로...... 업그레이드를 한다나 뭐라나......."
"그것참 희한한 말이네."
"그 서번트부터가 이상한 구석이 있지."
"이상하기로 따지자면 정대식의 모든 게 이상해. 그는 전에 없던 올인원이고 전례 없는 최강자야. 마치 이러한 일이 벌어질 것을 대비해 만들어진 존재같이 느껴져."
"그가 인간을 초월한 자라는 말인가?"
최희는 강영후의 질문에 문득 웃었다.
"정말로 인간을 초월했다면 보수로 돈 같은 걸 요구하진 않았겠지."
강영후도 덩달아 피식 웃었다.
"그건 그렇지."
"왜 그 녀석이 돈에 그렇게까지 목숨을 거는지 난 도통 이해가 안 돼. 그만한 돈을 벌어서 어디에다 쓰려고?"
최희는 금전에 대한 정대식의 욕구를 이해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