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0
현질 전사
-12권 18화
어쨌든 일대의 몬스터들이 모조리 날아가 버린 덕분에 잠시 숨 돌릴 겨를이 생겼다. 기철민은 광필두를 돌아보고 말했다.
"이 틈을 타서 나머지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해! 송시민도 언제까지 버틸 순 없을 테니까......."
그때였다.
"피해!"
광필두가 별안간 기철민을 확 떠밀었다.
그는 앞으로 요란하게 자빠졌고 곧 머리 위에 섬뜩하고 충격적인 무언가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카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
고개를 들어 올린 기철민은 충격적인 광경을 보았다. 방어막 꼭대기에 엄청나게 큰 갈고리가 꽂혀 있었다.
그 날카로운 끄트머리가 방어막 안으로 파고 들어가 있었고, 갈고리는 지독하게 녹이 슨 것처럼 보이는 두꺼운 쇠사슬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 쇠사슬이 끼기기긱 하는 비명을 올리자 갈고리가 천천히 움직였고 방어막이 찢어지기 시작했다.
"안 돼!"
기철민은 즉시 몸을 일으켜 티르벵거를 쇠사슬에 겨누었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했다.
석유찌꺼기와 같이 온갖 피와 살점이 엉겨 붙어있는 쇠사슬이 자세히 보였다. 실로 섬뜩한 모습이었고 악취도 엄청났다.
하지만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기철민은 갈고리가 방어막을 다 파괴하기 전에 쇠사슬을 끊어낼 요량으로 광필두에게 소리쳤다.
"내가 먼저 내리치고 네가 바로 내리쳐라!"
"알겠다!"
"간다!"
기철민은 이를 악물고 티르벵거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가 그대로 내리그었다.
"천노참격!"
번-쩍!
타오르는 광염이 쇠사슬로 떨어지며 끔찍한 비명이 들렸다.
쇠사슬 마디마디에서 거기 달라붙어 있던 사령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거의 틈 없이 광필두의 공격이 연이었고, 반쯤 갈라져 있던 쇠사슬이 마침내 끊어져 버렸다.
카르르르르릉!
끊어진 쇠사슬이 반탄력으로 어디론가 날아가고 거대한 갈고리가 방어막에 걸린 채로 기울었다.
기철민은 그걸 올려다보며 외쳤다.
"저걸 치워야 해!"
광필두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무슨 수로?"
"무슨 수를 쓰든 간에......."
광필두를 돌아보며 말하던 기철민은 아까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날아오는 시커먼 무언가를 보았다.
본능적인 예감으로 기철민은 그를 밀치려고 했으나 이미 한 박자 늦었다.
뻐-억!
광필두는 거기에 부딪혀 허공을 날았다.
광필두를 후려친 것은 또 다른 거대갈고리였다.
그건 광필두를 치고 날아가 방어막에 한 번 부딪쳤다. 그리고 아래로 쿵! 떨어져 내렸다.
기철민은 이 갈고리가 어디서 날아오는지를 보려고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어느새 한층 가까워진 거대한 그림자가 보였다.
다름 아닌 5대 거신 중 한 마리인 헤카테였다. 놈의 두건을 뒤집어쓴 황새 같은 대가리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차르르르르르르르!
쇠사슬이 다시 감기며 갈고리가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다시 공격이 날아오려면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하고 기철민은 황급히 광필두에게로 달려갔다.
내동댕이쳐진 그는 다행히 갑옷의 보호로 치명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절대 훼손되는 법이 없다는 브릴리언트 아우라 아머의 흉갑에 큰 발톱 자국 같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아마 아머가 없었더라면 배와 가슴이 찢겨 내장이 다 튀어나왔을 것이다.
"이봐, 괜찮아?"
기철민이 손을 내밀어 일으키려고 들자 광필두가 그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비틀거리고 일어서다 피를 한 바가지 쏟았다.
제아무리 갑옷이 충격을 흡수해줬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기철민은 저 갈고리가 보통 물건이 아님을 깨달았다. 적어도 레전드급, 혹은 그 이상의 아이템인 것이다. 그러니 7성 무구에 흠집을 낼 수 있는 거였다.
"제기랄."
욕설을 지껄인 광필두가 입가의 피를 닦으며 고개를 들었고 기철민도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헤카테가 갈고리를 도로 끌어가 그걸 머리 위로 빙빙 돌리고 있었다.
그 소리가 섬뜩하게 하늘을 수놓는 가운데 놈이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강철 같은 깃털로 뒤덮인 몸은 사람 같은 이족보행형이었는데 그 몸에 쇠사슬이 칭칭 감겨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사로잡힌 원혼들이 오라처럼 주위를 맴돌며 검은 그림자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지옥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다소 거리를 둔 곳에 다른 세 마리의 모습도 어렴풋하게 보였다.
놈들은 아직 강 가까이에 있는 것 같았으나 하도 거대해서 마천루들 사이로도 머리가 솟아 있는 게 보였다.
뿌연 안개에 휩싸여 아직까지는 형체가 불분명했으나 공포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하필 날도 밝아 그 모습이 비교적 뚜렷하게 보여서 더 그랬다.
기철민은 문득 생각했다.
'오늘 밤까지 내가 살아 있을 수 있을까.'
여신급 무기를 획득했으니 자신만만, 의기양양해야 할 텐데 별로 그런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저놈은 자신이 상대할 수준이 아니라는 생각만이 찾아들었다.
아마 던전에서 마주쳤더라면 뒤도 안 돌아보고 다리야 날 살려라 도망쳤을 테다.
평생토록 강해지길 바랐고 오로지 그것을 추구하며 살아왔는데, 압도적인 존재 앞에서는 꼬리를 다리 사이에 말고 도망치는 개가 된 기분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던전을 내달리던 쩌리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잡것들이."
거칠게 내뱉은 광필두가 피가 섞인 침을 바닥에 퉤 내뱉었다.
그리고 분노에 활활 타오르는 눈을 하고 궁니르를 빼 들었다. 기철민은 저도 모르게 그런 광필두를 보고 물었다.
"뭐하려고?"
광필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투포환이라도 던지듯, 어깨를 한껏 뒤로 젖히고 허리를 비틀었다. 그리고 궁니르를 헤카테를 향해 날렸다.
"이거나 먹어라!"
파파파파파파파--------------쐐애애애애애애애액!
허공을 핑글핑글 회전하며 날아가던 궁니르에 가속이 붙으며 곧 그것이 새파랗게 타올랐다.
마치 추락하는 운석이나 우주를 일주하는 혜성처럼 빛을 발하며 궁니르가 헤카테의 안면으로 날아들었다.
그러자 놈이 갈고리를 이쪽으로 던지면서 팔뚝으로 궁니르를 막아냈다.
콰과과과곽!
"헉!"
기철민은 숨 막히는 소리를 냈다.
궁니르가...... 놈의 팔뚝을 꿰뚫은 것이다!
검은 깃털이 사방팔방으로 날렸고, 놈의 팔뚝을 뚫고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 궁니르가 새처럼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갈고리가 날아들었다.
카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
광필두와 기철민은 몸을 날려 그것을 피했으나, 불행히도 갈고리는 방어막에 걸려 있던 또 다른 갈고리에 걸렸다. 그리고 쇠사슬이 있는 힘껏 당겨지자, 방어막이 맥없이 찢어져 버렸다.
연이어 방어막을 구성하고 있던 마력들이 산산조각이 나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파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방어막은 완전히 사라졌고, 쉴드 작전은 실패했다.
남은 것은 대출혈뿐이었다.
쿵!
쿵!
쿵!
기철민은 광필두와 나란히 놈의 진로를 막아서 섰다. 사람들이 전부 대피할 때까지 방어막을 치고 버틴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송시민이 무너진 이상 서울은 이미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광필두가 7성 무구의 방패로 버틴다고 해봤자 얼마나 시간을 벌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승산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무익한 싸움이었으나 기철민과 광필두는 물러서지 않았다.
광필두는 궁니르로 헤카테에게 한 방 먹여놓고도 분이 안 풀리는 모양이었다. 헤카테를 죽여 놔야 속이 시원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반면, 기철민의 얼굴에는 묘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조금 전, 광필두가 한 점 망설임 없이 헤카테를 상대하는 광경을 보았기 때문일까? 그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던 두려움이 깡그리 사라져 있었다.
기철민은 도리어 유쾌한 기분으로 전에 없이 강대한 적을 마주 보고 섰다. 아마도 오늘 이 자리에서 죽게 되겠지만 그게 썩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별 볼 일 없는 각성자로 막공을 전전하던 자신이, 이만한 적을 상대로 당당히 맞서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하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죽을 준비를 마치고 기철민은 티르벵거를 빼 들었다.
"와라."
차르르르르르르르----------------
놈이 쇠사슬을 감는 소리가 들렸다.
광필두도 여신급 진화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죽을 각오로 날아올 공격을 기다렸다.
자신이 파괴하려던 세상을 목숨 바쳐 가며 지켜야 하는 지경에 처했으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싶었으나 그게 그다지 중요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어쩌면 정대식의 수작에 걸려들어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눈앞의 적을 파괴하는 일이었다.
광필두는 줄곧 자신을 사로잡아왔던 분노를 떠올렸다.
자신이 가진 능력이 이능 파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언제나 방향을 알 수 없는 분노에 시달려왔다.
그로 인해 압도적인 힘을 손에 넣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으나, 희한하게도 지금은 7성 무구의 진화 같은 것은 어떻게 돼도 좋다는 기분이었다. 그저 타오르는 분노에 마음껏 자신을 내맡길 뿐이었다.
* * *
기철민은 광필두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저놈은 우리 둘이 협공을 해야 한다."
그 말에 광필두가 이죽거렸다.
"여신급 무구를 손에 넣었으니 너 혼자서도 처치할 수 있지 않나?"
"새꺄, 그럼 넌 내가 헤카테를 처치할 동안 다른 놈을 처치할 수 있겠냐?"
"말대꾸할 시간 있으면 작전이나 설명해봐라."
"말대꾸시킨 사람이 누군데."
기철민은 투덜거리며 말했다.
"놈에게 일격을 먹이기 위해서는 티르벵거의 공격이 정확하게 들어가는 게 중요하다. 네가 앞서서 어그로를 끌어줘야 해. 아직 진화는 못 했다고 하더라도 명색이 7성 무구 보유자이니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그깟 걸 겨우 작전이라고 지껄인 거냐."
광필두는 끝까지 사람 속을 박박 긁어놓고 몸을 낮추더니만 땅을 박찼다.
그의 몸이 허공으로 사라지는가 싶더니 궁니르의 날카로운 빛이 헤카테에게로 날아들었다. 그러자 별안간 쇠사슬들이 어지러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갈고리가 달린 쇠사슬이 헤카테의 주변을 감싸고 미친 듯이 휘돌자 가히 재난 급의 파괴가 벌어졌다.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
쇠사슬의 폭풍 속에서 궁니르는 헤카테에게 적중하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그러자 광필두가 이번에는 케이론으로 엄청난 양의 마력살을 쏴댔다.
쉬지 않고 연거푸 공격을 가하는데 그게 단 한발도 들어맞지를 못했다. 이런 식으로는 기철민에게 틈을 벌어주기는커녕, 서울 시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판국인지라 광필두는 육탄전을 각오했다.
'어쩔 수 없군.'
그는 방패를 꺼내 들고 다른 손에는 검을 쥐었다.
그런 뒤 무모하게도 쇠사슬이 춤추는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사령이 울부짖는 폭풍 한가운데서 광필두는 몸으로 쇠사슬의 장막을 뚫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사령들은 번쩍거리는 빛을 내뿜는 브릴리언트 아우라 아머와 스비에스키에 섣불리 접근하지 못했다.
광필두는 닿기만 하면 몸이 갈려 나갈 쇠사슬 틈바구니로 헤카테의 거체를 보았다.
그는 놈이 사정권 안에 들어왔다고 판단되기가 무섭게 딜라이트 소드를 찔러 들어갔다.
"하아아앗!"
콰아아아악!
딜라이트 소드가 눈 부신 빛을 내뿜으며 헤카테의 몸체를 찔렀다. 그러자 깃털의 틈새가 확 벌어지며 놈의 살 속으로 검격이 파고들어 갔다.
광필두가 회심의 미소를 짓던 그 순간.
쉬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