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 전사-291화 (290/297)

# 291

현질 전사

-12권 19화

광필두는 어느 틈엔가 자신의 몸으로 날아오는 갈고리를 보지 못했다.

초대형 낚싯바늘처럼 섬뜩하게 구부러진 끝이 광필두의 몸을 긁고 지나쳤다.

그리고 찰나.

헤카테가 광필두를 공격하는 그 틈바구니에 쇠사슬의 폭풍이 가라앉았다.

놈은 갈고리 가까이 쇠사슬을 움켜쥐고 있었고 그러느라 쇠사슬의 나머지 부분은 차르르르 소리를 내며 주위로 가라앉고 있었다.

때를 놓칠 기철민이 아니었다.

그는 곧장 허공으로 도약하며 티르벵거에 자신의 온 힘을 다 실었다. 그리고 아껴두었던 필살기를 마침내 터트렸다.

"천수일도!"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하늘에서 불벼락이 떨어지듯 거대한 불의 기둥이 헤카테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흡사 허공에서 용암이 쏟아지는 것 같은 엄청난 광경이었다.

일격을 성공시킨 기철민은 공격의 여파에 휘말려 밀려나 허공을 추풍낙엽처럼 데굴데굴 굴렀다.

이윽고 폐허 위에 쓰레기처럼 처박혔다.

딱히 부상을 입은 것은 아니었으나 방금의 공격에 자신이 가진 마력을 모조리 쏟아부었기에 손가락 까닥할 힘이 없었다.

마력 회복 포션이든 뭐든 마셔야 할 것 같았지만 기철민은 그러기보다는 몸을 일으켜 기대감에 찬 눈으로 적을 바라보았다.

헤카테의 머리통이 반으로 갈라져 있는 광경을 상상하며 고개를 들자,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시커멓게 식어가는 불과 재를 뒤집어쓴 헤카테의 모습이 보였다.

놈이 꼼짝도 않고 있었기에 어찌 된 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기철민은 불안에 휩싸인 채 서둘러 마력 회복 포션을 마셨다.

'죽은 거야, 산 거야?'

의문하던 그는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광필두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설마 죽어 자빠진 것은 아니겠지 싶어서 눈을 부라리는데 저만치에 번쩍이는 갑옷이 보였다.

기철민은 서둘러 그쪽으로 달려갔고, 아무렇게나 엎어져 있는 그의 몸을 뒤집었다.

"......으음."

기철민은 그의 부상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갑옷이 처참하게 우그러져 있었다.

광필두의 몸은 거기에 끼인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브릴리언트 아우라 아머가 파손되면서 미처 소화해내지 못한 충격을 고스란히 받았는지, 그가 숨을 쉴 때마다 피가 밖으로 줄줄 새고 있었다.

기철민은 서둘러 치료 포션을 몇 병이나 꺼내어 광필두의 입에 들이부었다.

나머지도 여기저기 닥치는 대로 뿌리자 의식이 붙어있던 광필두가 눈을 떴다.

그는 "야, 정신이 드냐?"하고 소리치는 기철민을 멀거니 보다가, 별안간 그를 제치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부상을 당한 상태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민첩하고도 힘 있는 동작이었다.

광필두는 기철민을 옆으로 밀치는 데 그치지 않고 방패를 들었다. 그러자 날아오던 갈고리가 거기에 부딪혀 무시무시한 소리를 냈다.

카르르르르르릉!

"아직 안 죽었잖아!"

기철민은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쇠사슬을 끌어당기는 헤카테를 보고 절망적인 기분이 됐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날린 공격이었는데 헤카테는 온몸이 검게 그을렸다 뿐, 비교적 멀쩡한 모습으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놈이 움직일 때마다 재가 사방팔방으로 휘날렸고, 그 모습이 한층 무시무시해 보였다.

깃털 대부분이 타버렸으나 놈의 기세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별안간 광필두의 전신에서 빛이 폭발해 오른 것이다.

"으악!"

기철민은 놀라서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리고 광필두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현상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광필두의 몸 주변으로 일곱 개의 무지개색 빛이 어지럽게 휘몰아친다 싶더니만, 망가졌던 갑옷이 변모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빛이 점점 거세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기철민은 그것이 진화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잠시 후.

광필두는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7성 무구는 그 형태를 완전히 달리한 것처럼 보였다.

진화한 7성 무구는 광필두의 몸을 머리털 하나 보이지 않도록 온전히 감싸고 있었다.

그 크기 또한 두 배 가까이 커져 있었다.

그러나 뚜렷한 윤곽이 드러나 보이지는 않았는데, 무지갯빛 빛이 단단해 보이는 외피를 감싸 쉴 새 없이 일렁이고 있었다.

"과, 광필두?"

기철민이 말을 더듬으며 이름을 불러보자 그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대신 날카로운 빛이 눈이라고 여겨지는 위치를 감싸고 있었다.

"너 진화한 거냐?"

기철민이 질문을 던지자 광필두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해 보였다. 그리고 별안간 한쪽 팔을 옆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손이 있어야 할 자리에 기다란 창이 튀어나왔다.

곧 광필두가 그것을 헤카테에게로 겨누자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한 위력의 마력살 수천 개가 날아갔다.

화살이라기보다는 포탄에 가까워 보이는 그 마력의 덩어리가 헤카테를 두드렸고 놈이 분노에 찬 울음을 터트렸다.

---------------------------------------!

웅웅웅웅웅웅웅웅웅!

그 피어에 반발하듯 기철민의 티르벵거와 광필두의 7성 무구가 한층 더 강한 힘을 발휘했다.

기철민은 손아귀의 티르벵거에서 전에 없는 위력을 느꼈다.

헤카테에게 일격을 먹이고 아무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아야 하는데, 희한하게도 점점 마력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광필두 역시 마찬가지인지, 그가 이번엔 양손으로 마력살을 쉴 새 없이 쏴대었다. 그리고 기철민을 턱짓해 소리쳤다.

"가라!"

기철민은 다시 한 번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이미 한번 놈을 죽이는 데 실패했으나, 조금도 걱정이 되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놈을 처치할 수 있을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기철민은 티르벵거를 허공으로 치켜들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내리쳤다.

"천수일도!"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

다시 한 번 하늘이 갈라지며 불벼락이 쏟아져 내렸다.

아까보다 한층 더 강력한 공격이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

엄청난 열풍이 몰아치며 이번에도 기철민은 허공을 굴렀다.

도중에 티르벵거를 툭 튀어나온 건물의 잔해에 꽂아 넣고 간신히 구르기를 멈추었다.

그러자 세상을 갈라놓는 십자의 빛이 시커멓게 타오르는 헤카테의 가슴팍을 갈라놓는 것이 보였다.

기철민은 광필두가 자신의 공격에 연이어 일격을 먹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들이닥치는 여파에 고개를 수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금 기철민이 눈을 떴을 땐, 헤카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여신급의 무구 두 개가 힘을 합치자 제아무리 20성급 몬스터라 해도 남아나질 않은 것이다.

놈이 서 있던 자리만이 새카맣게 탄 채로 움푹 패 있을 뿐, 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뜨거운 바람만이 그 자리를 맴돌 뿐이라서, 기철민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몸을 일으키고 중얼거렸다.

"처, 처치한 건가?"

그는 그 말을 해놓고 서둘러 본인의 입을 틀어막았다.

괜한 소리일까 봐 혀를 깨무는데 저쪽에서 광필두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헤카테가 사라진 자리를 멀거니 쳐다보았고,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투구가 젖혀진 그의 얼굴이 드러나 보였다. 그리고 기철민이 묻고 싶었던 말의 대꾸를 했다.

"처치했다."

기철민의 표정에 환한 기색이 퍼졌다.

무려 20성급이나 되는 몬스터를 이 손으로 쓰러트리다니!

기철민은 경이에 차서 환희를 내지르려고 했다. 그런 기철민에게 광필두가 냉정하게 말했다.

"좋아하기엔 이르다. 다음이 온다."

그 말을 듣고서야 기철민은 퍼뜩 자신들이 처해 있던 상황을 상기했다.

적은 헤카테 한 마리가 아니었다.

또 다른 세 마리의 거체가 세 방향에서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기철민은 긴장으로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런 기철민을 보고 광필두가 말했다.

"놈들이 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간다. 한 마리씩 처치하자."

기철민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은 다음 대상으로 에리스를 골랐다.

"가자!"

곧 두 사람은 가장 왼쪽에서 다가오고 있는 적, 정체 모를 삼각형의 형태를 한 적에게로 덤벼들었다.

* * *

"크악!"

기철민은 소리를 내지르며 나가떨어졌다. 그런 그의 주변으로 삼각형 모양의 미세하고도 날카로운 입자가 날뛰었다.

"크윽!"

기철민이 정신을 차리고 검기를 발산하자 그것은 일순간 흩어지며 기철민을 놔주는 듯했다. 그러나 곧장 다시금 달려들었고, 그러기가 무섭게 빗줄기 같은 포화가 쏟아져 내렸다.

사정이 안 좋기는 광필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주위로도 정체불명의 삼각 먼지가 떠돌아다녔으며 그것은 이따금 서로 뭉쳐 강력한 폭발을 일으켰다.

잠시 그게 뜸하다 싶으면 마찬가지로 포화가 쏟아지는 데다가 발밑으로도 쉴 새 없는 공격이 들이닥쳤다.

땅속에 식물인지 촉수인지 모를 뭔가가 숨어 있었는데, 그건 날카로운 비늘로 뒤덮여 있었다.

그게 땅속을 돌아다니며 기철민과 광필두가 바닥에 발을 디딜 때마다 온몸을 휘감아 잡아당겼다.

그들이 수세에 몰리는 것은 에리스와 리비티나, 케레스를 동시에 상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기철민과 광필두가 헤카테를 쓰러트리는 것을 보고 무언가 느낀 바가 있는 것인지, 놈들은 어울리지 않게 협공을 가했다.

두 사람은 놈들을 동시에 상대하는 일이 없도록 가장 왼쪽의 에리스를 먼저 처치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놈이 쏟아내는 삼각형의 입자를 상대하느라 고전하는 사이, 나머지 두 마리가 공격에 가담하자 꼼짝없이 포위당하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다행히 여신급 진화를 이룬 무구로 인해 그럭저럭 상대를 하고는 있었으나 문제는 놈들을 한꺼번에 쓰러트릴 묘안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전투는 소모적이었고 기철민과 광필두는 그저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버틸 수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인가.'

기철민은 뒤쪽을 힐끗 보며 생각했다.

그들이 시간을 끌면 끌수록 나머지 사람들은 안전해질 것이다.

대부분의 서울 시민들이 안전하게 대피했기를 바라며 기철민은 이를 악물었다.

'그래, 버틸 수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지. 이제 정대식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광필두의 심정도 비슷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냥 흘러가는 시간과 쌓이는 피로를 느끼며 도대체 정대식은 언제 오는 것인지를 의문했다.

그때였다.

카가가가가가가가가가!

괴이쩍은 소리가 들려 멈칫한 기철민은 삼각형 모양을 한 에리스가 그 형태를 바꾸는 것을 보았다.

기하학적으로 보이는 변화가 일어났고, 놈은 사각형이 되었다.

'뭐지?'

불길한 기분이 찾아들기 무섭게 주변을 떠돌던 삼각형의 입자가 서로 뭉치며 사각형으로 변했다.

그것은 납작한 판과 같은 모양새가 되었고, 곧 기철민과 광필두를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그 공격을 피해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속도로 그들을 추격해왔다.

기철민은 불길한 예감에 따라잡히지 않기 위해서 티르벵거를 휘두르며 그것을 파괴했다.

하지만 부서지는 것도 그때뿐이고, 곧 다른 사각형의 면이 그들에게로 날아들었다.

결국, 기철민은 아차 하는 사이에 사방에서 날아오는 사각형에 둘러싸였다.

그것들은 곧장 서로 단단히 맞붙어버렸고, 기철민은 꼼짝없이 거기에 갇힌 꼴이 됐다.

그는 탈출하기 위해서 재빨리 티르벵거를 모서리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마력을 불어넣으며 그것을 깨부수려고 애썼다.

파아아아아아아아-

티르벵거가 백열하며 모서리를 녹여냈다. 그러자 사각형의 틈 안으로 무언가가 꾸물꾸물 기어들어 왔다.

다름이 아닌 지하에 숨어 있던 촉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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