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 전사-292화 (291/297)

# 292

현질 전사

-12권 20화

그것은 마치 혈관처럼 미세한 형태로 사각의 감옥 속으로 침입하여 기철민의 발목을 타고 올랐다.

기철민은 그게 신체 안으로 침입하지 못하도록 몸을 강화했으나 순식간에 가늘고 굵은 촉수가 그의 전신을 뒤덮고 말았다.

광필두는 그와는 약간 사정이 달랐다. 그러나 그 역시도 사각형의 구속구 안에 갇힌 것은 마찬가지였다.

다만 촉수 대신 다른 식의 공격이 가해졌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좁은 공간이 점점 축소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예 광필두를 거기 가둬놓고 짜부라트리겠다는 심산 같아 보였으나 그는 7성 무구로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는 힘으로 버티기 시작했고 오래지 않아 또 다른 방식의 공격이 가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그가 갇힌 공간 안의 압력과 온도가 엄청나게 높아지고 있었다. 만약 그가 평범한 방어구를 입고 있었더라면 벌써 찜통 안의 개구리처럼 익어 터져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광필두는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으나 아무리 힘을 발산해 봐도 쉽지 않았다. 여신급의 무구만 손에 넣으면 세상에 당해내지 못할 게 없으리라고 여겼던 제 생각이 지극히 어리석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크아아아아아!"

광필두는 괴성을 내지르며 전신에서 마력을 발산했다. 7성 무구가 발악하듯 광채를 내뿜었으나 어찌 된 일인지 광필두에게 가해지는 부담은 더해졌다.

외부에서 그를 짓누르는 힘과 그가 외부로 발산하는 힘이 서로 부딪치며 충돌하고 있는 것이었다.

광필두는 지독한 고통 속에서 이를 으드득 갈았다. 그리고 외쳤다.

"정대시이이익!"

그 외침이 밖으로 들릴 리가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대꾸가 들려왔다.

Chapter 72. 최종 진화

"불렀냐."

광필두는 너무 놀라 순간적으로 몸에 힘을 뺐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를 파괴하려던 힘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파아아아아아아앗!

광필두는 그대로 밖으로 튀어나와 바닥을 굴렀다. 엄청난 열기가 솟구치며 그의 주변에 있는 것들을 녹여놓았다.

광필두는 식식거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촉수에 휩싸여 미라 같은 꼴이 된 기철민이 풀려나는 광경이 보였다.

광필두는 나뒹구는 기철민에게서 고개를 돌렸고,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한 사람을 보았다. 광필두는 눈을 크게 떴다.

"정대식......!"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그의 등장이 빌어먹게 반가웠다.

한 박자 뒤늦게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느냐는 원망이 찾아들었다.

그가 늦어지는 바람에 서울 일대는 완전히 아작이 나버렸다.

기철민과 광필두는 최선을 다했으나 시간을 버는 데만 그쳤을 뿐, 도시가 파괴되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 바람에 사방은 문명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네 거신과 싸운 자리에는 남아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고, 그들의 등 뒤로 폐허와 북한산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곧 정신을 차린 기철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장님! 드디어 오셨군요!"

정대식은 한가하게 그를 돌아보며 고개를 까닥였다. 그리고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좀 늦었지?"

"좀 늦은 게 아니라 많이 늦었습니다."

기철민이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을 하자 정대식이 그를 보고 말했다.

"그래도 여태까지 잘 버텨주었다. 보아하니 무구를 여신급으로 진화시키는 데 성공한 모양이군."

"그러면 뭐합니까. 저놈들에게는 통하질 않는데."

기철민이 낙담한 투로 하는 말에 정대식이 물러서라는 식으로 손짓을 했다.

"이제 됐다. 고생했으니 좀 쉬고 있어라."

"대장님...... 저놈들은 엄청나게 강합니다! 게다가 세 마리씩이나 있으니 체르노보그를 상대할 때와는 또 달라요! 거기다 아직 피난민들이 남아 있는지 어떤지도 모르고......!"

기철민이 늘어놓는 우려를 묵살한 채 정대식이 몇 발짝 앞으로 나섰다. 광필두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의문을 품었다.

그의 모습은 매우 평안해 보였다.

마기전을 두르고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별다르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았다.

특이하다고 할 만한 무기를 갖추고 있는 것도 아니라 도대체 무슨 준비를 했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였다.

정대식이 오른손을 뻗었다. 그리고 에리스를 가리키고 말했다.

"사라져라."

그러자 놈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각형을 구성하고 있던 몸체가 거세게 진동하더니, 별안간 마구잡이로 변화했다.

그것은 발작하듯 온갖 모양으로 극심하게 변화하더니 이윽고 폭발하다 만 것 같은 형체로 굳었다.

그러더니만 갑자기 일그러져 조그만 구체가 되어버리더니, 어처구니없게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 광경을 보고 기철민과 광필두는 믿기지 않아서 입을 쩍 벌렸다.

에리스가 마치 지우개로 지우듯이 없어져 버리자 나머지 리비티나와 케레스가 동시에 정대식에게로 공격을 가했다.

외눈이 붙은 수천 개의 머리통으로 이루어진 리비티나가 닥치는 대로 광선을 쏴댔고, 거대한 나무 같은 형상을 한 케레스가 지하에서 단번에 촉수들을 끌어올려 정대식을 휘감았다.

정대식은 어떤 반격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광선은 그를 빗겨나갔고 촉수들은 그를 붙잡지 못했다.

마치 그가 안 보이는 것처럼 전부 엉뚱한 데를 겨냥하고 있었다.

정대식은 평온한 얼굴로 이번엔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내뻗어 리비티나와 케레스를 동시에 겨냥했다.

"흩어지고, 불타올라라."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리비티나가 지닌 수천 개의 머리통이 피를 뿜으며 터지기 시작했다.

마치 피로 만들어진 불꽃놀이를 보는 것 같았다.

그 머리통들이 남김없이 파괴될 동안 케레스의 몸에서는 열화가 치솟았다.

놀랍게도 그것은 외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었다.

케레스의 몸속에서부터 이글거리는 용암과 화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정대식이 한 말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어, 어떻게 이런 일이."

기철민은 자신의 눈앞에서 보이는 기적을 믿지 못하고 망연히 뇌까렸다.

넋이 나가기는 광필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멀거니 선 채로 싸움이라 할 수 없는 싸움을 바라보았다.

정대식은 강했다.

말도 안 되게 강했다.

손끝과 말 몇 마디로 순식간에 놈들을 다 없애버린 정대식은 별일 없었다는 듯이 몸을 돌렸고, 기철민은 도무지 안 믿긴다는 표정을 하고 물었다.

"다...... 처치한 것입니까?"

정대식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한 마리가 남았지."

"예?"

"북쪽의 네메시스가 있다."

"아!"

그쪽은 최희가 상대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인간의 몸이었고, 호라갈레스도 SSS급 수준이었다.

과연 아직 목숨이 붙어있을지 의문스러워하는 가운데 정대식이 말을 바꿨다.

"음, 지금 처치했군."

"뭐라고요?"

어처구니없어하는 기철민을 보고 정대식은 허공을 눈짓했다.

기철민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북한산 쪽에서 날아오는 형체가 보였다. 기철민은 그 모습을 알아보고 경탄성을 올렸다,

"엔트로피!"

그녀는 사뿐하게 정대식의 곁에 착지했다.

기철민은 엔트로피의 모습이 미묘하게 달라진 것을 느꼈다.

인간에 한없이 가까워 보이기는 전에도 그랬는데, 지금은...... 지금은 뭐랄까. 전에 없던 존재감이 생긴 느낌이었다. 늘 화면에서만 보던 사람을 실물로 보는 것 같았다.

"어, 어떻게 된 겁니까?"

기철민이 묻는 말에 정대식이 대꾸했다.

"내 능력이 향상됨에 따라 엔트로피도 새로워진 것이다."

"새로워졌다니......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음. 좀 이상한 말이긴 하지만...... 인간이 됐다고 해야 하나?"

"예?"

기가 막혀 묻는 말에 정대식은 설명하기가 몹시 난감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실은 엔트로피의 존재 자체를 설명할 수 없었다.

본디 엔트로피는 정대식에게 주어진 현질 시스템의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원래는 자아나 감정도 없었고, 입력된 정보만을 전달하는 한낱 말풍선일 뿐이었다.

그러나 업그레이드가 거듭됨에 따라 나날이 그 성능이 발전하여 이윽고 인간에 한없이 가까운 모습을 갖게 되었고, 정대식과 능력을 공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레벨 10이 되었을 때, 마침내 엔트로피는 온전한 '객체'가 된 것이다.

정대식이 정신을 차리자마자 엔트로피는 정중히 정대식에게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막 의식이 되돌아온 정대식은 상황을 퍼뜩 판단하지 못했다.

그저 몸 안에 감도는 기이한 느낌에 잠시간 사로잡혀 있었다.

그의 외형은 여전히 인간의 형태를 띠고 있었으나 그 전과는 무엇인가가 확연히 달랐다.

애써 설명을 해보자면 현실 세계와 자신의 존재가 한 발짝 어긋나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2차원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3차원의 인물이 된 기분이었다.

정대식도 모르는 어떤 힘의 통로가 열려, 그를 여태까지와는 다른 존재로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게 어떤 식인지는 정대식도 정확히 알 수 없어, 그는 주의를 엔트로피에게로 돌렸다.

"감사하다고?"

그러고 보니 엔트로피가 말하는 방식이 이상했다.

전에는 의식이 온전히 링크되어 있어 그녀가 하는 말이 머릿속으로도 동시에 울렸다.

말을 한다기보다는 텔레파시를 하는 느낌에 더 비슷했다. 그런데 지금은 오로지 음성으로만 그녀의 생각을 알 수가 있었다.

"예. 저를...... 저로 만들어 주셨으니까요."

"뭐?"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라 정대식은 깜짝 놀랐다. 그러자 엔트로피가 설명했다.

"본디 저는 정대식 님과 같이 온전한 자아와 육체를 갖고 있는 하나의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막대한 힘을 빌리는 대가로 시스템의 일부가 되었지요. 그 후로 오랫동안 저는 시스템에 존재하는 도우미로서만 존재를 해왔습니다. 숱한 자들이 데모크리토스 님의 선택을 받았으나 만렙에 달한 자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정대식은 의혹을 품었다.

"아무도 없었다고? 이건 레벨 100이 아니라 겨우 레벨 10이야. 마음만 먹는다면 달성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을 텐데?"

"대부분은 레벨 5, 6 정도...... 심하면 3, 4 정도에서 만족해버리기 때문입니다."

"만족을 한다고? 그게 가능하기는 해?"

엔트로피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종족의 특성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모든 우주의 생명체들이 인간처럼 탐욕스럽지는 않지요. 보통은 자신이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얻게 되면 거기에 만족하고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만렙에 달성한 것은 데모크리토스 님께서 현질 시스템을 창조한 이후 최초입니다."

"허...... 그래? 전혀 몰랐네."

"현질 시스템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데모크리토스 님께 걸맞은 완전한 존재의 창조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위한 도구로 오랫동안 이 시스템에 종속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저 또한 시스템에 속한 존재이기에, 정대식 님이 상점을 업그레이드할수록...... 즉, 현질 시스템을 발전시킬수록 저 또한 발전할 수 있었고 궁극적으로는 다시금 저라는 존재를 되찾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금의 저는 정대식 님과 완전히 같고도 다른 존재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좀 이해할 수 있게 말해봐."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을 드리자면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이브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저는 정대식 님으로부터 만들어졌기에 정대식 님과 완전히 같은 능력을 갖추게 되었으나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더 쉽게 설명해 드리자면 정대식 님의 마력을 빌리지 않고도 정대식 님과 같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정대식은 간신히 이해했다.

"그러니까...... 지금의 넌 그냥, 엔트로피인 거네?"

"그렇습니다. 저는 그냥 저입니다."

"이거 참, 놀라운 일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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