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 전사-293화 (292/297)

# 293

현질 전사

-12권 21화

정대식은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만렙이라는 게 이런 결과를 낳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아라비안나이트의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디즈니에서 나온 알라딘 영화를 보면,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전지전능한 지니가 등장한다.

하지만 그 지니는 램프에 종속된 존재로 알라딘에게 마지막 소원만큼은 자신을 자유롭게 풀어달라고 말을 한다. 그리고 알라딘은 그를 자유롭게 해준다.

마치 그 이야기 같다고 생각하며 정대식은 약간 허탈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넌 이제 완전히 자유로워진 건가?"

"그렇습니다."

"그럼 더 이상 내 도우미가 아닌 거구나."

"그렇게 되지요."

정대식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래...... 현질 시스템에 오랫동안 갇혀 있었으니 이제 자유를 만끽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최후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정대식 님의 편일 것입니다."

정대식은 그거면 됐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만렙을 달성했으니 더 이상 도우미의 존재는 필요 없을 터.

정대식은 전과는 달리 굳이 엔트로피에게 질문을 하거나 상점을 훑어보거나 하지 않아도 현질 시스템을 전부 꿰뚫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모든 능력을 모조리, 전부 다 획득한 상태였다.

더 이상 새로운 스킬을 획득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의 신체 상태도, 모든 스킬도 전부 MAX를 찍고 있었다.

그는 현질 시스템의 모든 것을 통달했고 그것을 온전히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자 비로소 업그레이드가 끝나고 느낀 위화감이 뭔지 알 수 있었다.

'그렇군, 난 더 이상 인간이라 할 수 없구나.'

인간이라 하기에 그는 지나치게 완벽했다.

정대식은 자신이 늙거나 병들거나 죽을 수 있기는 할는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나중의 문제였다.

지금은 그가 쓰러트려야 할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정대식은 지금이 몇 시인지를 몰랐다.

만렙으로의 업그레이드는 예전과는 달랐다. 레벨 9 때는 재조정 상태에서도 의식 일부가 남아 밖의 상황을 살필 수 있었으나 레벨 10 때는 전혀 의식이 없었다.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의 조정도 있었기 때문인지 완전히 블랙아웃이 되었고, 막연히 시간이 제법 흘렀으리라는 생각만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가버렸는지를 몰라 자신이 때를 놓친 게 아닌가 싶었다.

패닉룸을 박차고 나온 정대식은 상황이 어찌 되어가는지를 의문했다. 그러자 매우 지극히 자연스럽게 현재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가 파악이 됐다.

그는 원한다면 지구 반대편에 일어나는 일조차 꿰뚫어볼 수 있었다. 단지 의문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간단히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렇다고 감탄만 하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나와 보니 상황이 다급한지라 자책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놈들을 쓰러트리기 위해 만렙을 달성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일이었고, 다행히 송시민과 기철민, 광필두, 그리고 최희와 모든 각성자들이 잘 버텨준 덕분에 막대한 인명피해만큼은 막을 수 있었다.

물론 서울은 종로와 북한산 언저리를 제외하고는 제 형체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도시는 재건하면 되는 일이다.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면 나머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최후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온다."

정대식은 그렇게 말하며 허공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런 뒤 기철민과 광필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두 사람은 이제 몸을 피해라. 엔트로피가 네메시스를 쓰러트렸으니 대피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기철민이 갑자기 무슨 소리냐는 듯이 물었다.

"피하라뇨? 다 끝난 것 아니었습니까? 5대 거신을 전부 쓰러트렸다면서요?"

그러자 줄곧 묵묵히 서 있던 광필두가 한마디 했다.

"5대 거신 외에 다른 적이 있다는 거겠지. 우리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더 강대한 적이."

정대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너희도 알다시피 몬스터들은 서로 협력하지 않는다. 그런데 5대 거신은 협공을 했지.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기철민이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되어 소리쳤다.

"더 강력한 놈이 그놈들을 지배하고 있으니까......!"

"그래. 진짜 적이 온다."

정대식이 하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갑자기 공기가 날카롭게 떨렸다.

곧 지독한 세상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며 하늘이 두 갈래로 쩍 벌어졌다.

정확히는 공간이 나뉘며 엄청난 공포가 밀려들었다.

피하라는 말을 듣고서도 기철민과 광필두는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5대 거신의 피어를 들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두려움이 그들의 간담을 찢어놓았다.

"정신 차려라."

정대식이 그 말을 하고 나서야 두 사람은 비로소 몸을 움찔 떨었다. 그리고 정대식이 하는 말에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이놈은 내가 막겠지만 전투의 여파가 어디까지 번질지 모른다. 그러니 너희들이 그것을 막아줘야 한다. 가라! 가서 사람들을 지켜!"

"알겠습니다."

광필두도 고개를 한번 끄덕였고 그들은 신속히 허공을 박찼다.

* * *

제자리에 남은 정대식은 갈라진 허공에서 꿈틀거리며 쏟아져 나오는 불길한 존재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곁을 한번 힐끔 보고 말했다.

"최후의 전쟁에서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엔트로피, 너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저는 본디 현질 시스템에 속한 존재였습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정대식 님과 함께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원한다면 발을 빼도 좋아."

"아닙니다. 혼자선 심심하지 않겠습니까?"

엔트로피가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고 정대식도 씩 웃었다. 그러나 허공을 찢으며 나온 존재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땐 더 이상 미소를 지을 수 없었다.

그것은 실로 거대했다.

놈에게서 뻗쳐 나온 기운이 온 하늘을 뒤덮어 순식간에 세상이 암흑천지가 되었다.

놈의 발은 지상을 내딛는 것만으로도 그곳을 유린했고 방사능이나 다른 치명적인 유해물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독으로 그 땅을 오염시켰다.

그 눈은 불타는 지옥이었고 그 입은 끝없이 무언가를 삼키는 블랙홀이자 무저갱이었다.

코가 썩어 나가떨어지는 것 같은 악취를 동반한 먼지가 놈에게서 뿜어져 나왔으며 온몸에서는 마치 구더기와 같이 썩다 만 몬스터들이 뚝뚝 흘러내렸다.

언데드인지 아닌지 모를, 형체조차 불분명한 그 괴물들이 놈의 사지에서 기어 나오고 있었다.

존재 그 자체로 절망의 끝장을 보는 것 같은 놈이었다.

만렙을 달성한 정대식은 놈에 대한 정보를 고스란히 꿰뚫어볼 수 있었다.

놈은 이름이 없었다.

놈은 본디 우주의 암흑 어느 한 귀퉁이에 떠도는 찌꺼기였다. 그러던 놈이 가진 것은 단 하나, '욕망'이었다.

지독한 갈증, 무언가를 끊임없이 가지고자 하는 욕구가 놈을 탄생시켰고, 또 살아 있게 했다.

그로 인해 놈은 우주를 떠돌며 삼킬 수 있는 것은 모두 삼켰고, 점점 거대해져 갔으며, 이루 말할 수 없는 능력을 얻어 힘을 키웠다.

그러나 놈은 욕심 그 자체였기에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었고, 이윽고 수많은 세상을 집어삼키는 재앙이 되었다.

마침내는 멸망으로 진화하여, 가 닿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존재가 됐다.

혹자는 그것을 '악마' 또는 '신'이라고 불렀다.

다행인지 아닌지, 우주에는 놈 말고도 여러 신들이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놈만큼의 탐욕을 지닌 존재가 없었다.

그렇기에 신들은 놈을 저지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들은 그 해답을 '최후의 전쟁'에서 찾았다.

놈이 도래하게 될 세상의 주요 종족들에 새로운 능력을 부여하고 확장 현실 세계를 열어주어 최후의 전쟁에 대비할 수 있게끔 한 것이었다.

그 시도는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시도가 실패할 때마다 그 종족의 일부는 던전이라는 가상 세계를 만들어 보존했다. 그리고 확장 현실 세계에 편입시켰다.

그런 식으로 우주는 헤아릴 수 없는 엄청나게 긴 시간 동안 최후의 전쟁을 반복해왔다.

무수한 차원이 닫혔고 세상이 파괴되었다.

그러는 동안 놈, 그러니까 놈은 더욱더 강해져 갔다.

그럴수록 놈의 탐욕도 더 커졌고, 그러던 어느 순간 새로운 진화가 일어났다.

오로지 탐욕밖에는 없던 놈의 내부에 새로운 자아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탐욕에 뒤따르는 대가였다.

자신을 스스로 데모크리스토라고 칭한 그것은 멸망에서 태어났으되 전혀 다른 존재였다.

그것은 놈을 파멸시키기 위해 태어난 존재였다.

데모크리토스는 최후의 전쟁에서 놈을 쓰러트릴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

그게 바로 현질 시스템이었다.

모든 우주에서 현질 시스템이 똑같은 모습을 띠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세계가 어떤 곳이냐에 따라 시스템은 그 형식을 바꾸었다.

여기가 지구이고 정대식이 인간이었기에 현질이라는 형식을 빌렸을 뿐이었다.

재물과 탐욕, 대가의 신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인간인 정대식이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되었을 뿐이다.

정대식은 순식간에 그 모든 사실을 다 알게 되었다. 이미 그가 알고 있는 정보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자연히 현질 시스템에 있어서 만렙을 달성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는 인간의 몸으로 인간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완벽해졌고, 그것은 그가 신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현질 시스템이 목표하는 바는 신에게 대적할 신을 만드는 것이었다.

파아아아아아아아---------------------

그가 깨달음에 따라 마기전 역시도 최후의 진화를 시작했다.

여신급 무구가 신급 무구로 최종 진화를 하게 된 것이다.

본디 여신급 이상의 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그것은 낭설이었다.

신이 다룰 때 자연히 무구도 신 급의 힘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마기전은 최종 진화를 하면서 그 수명을 다했다.

무구가 신의 힘을 실을 수 있는 것은 단 한 번이었다.

그로써 신을 파괴하는 것이다.

마기전은 그 형태를 버리고 온전히 '힘' 그 자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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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힘은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그것은 거대한 빛의 기둥이 되었다.

우주를 관통하는 압도적인 힘의 흐름이었다.

그것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정대식도 온전한 신체(神體)가 되어야 했다.

인간인 상태로는 그 신의 힘을 다룰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려면 인간을 버려야만 했다.

그 엄청난 사실 앞에 정대식은 머뭇거렸다.

'신이 된다고? 내가? 인간이 아니게 된다는 말인가?'

처음 능력을 받고 각성자가 되었을 땐 이런 상황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부자가 되어 잘 먹고 잘사는 일만을 생각해왔다. 그로 인해 여기까지 온 것인데, 신이 되어야 한다니?

인간 정대식으로서는 심히 당혹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한번 신으로 각성하고 나면 자신이 다시 인간이 될 수 있을지를 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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