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4
현질 전사
-12권 22화
아마 인간 흉내를 낼 수야 있겠지만 모든 게 전 같지는 않을 터였다.
그저 인간의 껍데기를 둘러싼 신일 뿐.
그가 목표로 했던 평범하고 행복한 삶...... 돈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사는 그런 인생은 결코 얻지 못하게 될 터였다.
그러자 망설임이 일었다.
'과연 이게 내가 원하는 거였나? ......아니, 아냐. 난 신이 되길 원한 적이 없어. 내가 바란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욕심이었을 뿐이야! 그런데...... 내가 신이 된다고? 말도 안 돼!'
정대식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거부하고 싶었다.
그는 신이 되고 싶지 않았고 신의 힘도 필요 없었다.
하지만 그가 여기서 신이 되지 않으면 또 다른 신인 멸망을 쓰러트릴 방도가 없었다.
그가 싸우지 않으면 세상은 끝장나버릴 것이고 인간은 각성자 일부만이 남아 던전이라는 거짓 세계에 갇혀 다음 최후의 전쟁을 위한 도구로 전락해버릴 터였다.
그것은 안 되는 일이었다.
정대식으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정대식은 눈을 질끈 감았다.
욕설을 한바탕 지껄이고 싶었으나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그는 어금니를 부서지라 깨물었다. 그리고 신으로 거듭나기 위하여 요동치는 빛의 기둥, 강대한 힘의 흐름 속으로 몸을 던지려 했다.
'씨발...... 존나 좆같네!'
그때였다.
어떤 손이 그런 정대식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정대식은 멈칫해 눈을 뜨고 옆을 돌아보았다.
다름 아닌 엔트로피였다.
그녀는 마치 정대식의 마음을 꿰뚫어본 듯이 말했다.
"저를 시스템에서 해방시켜주어 감사하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랬지."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고 엔트로피가 전에 없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거기에 보답을 못 해 드린 것 같습니다."
"응?"
"정대식 님이 받아야 할, 또 다른 대가라고 생각해주십시오."
퍼뜩 어떤 생각이 스쳤다.
엔트로피는 말했다.
자신이 정대식과는 같고도 다른 존재라고.
그녀는 완벽히 정대식과 같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정대식과는 별개의 존재였으나 그와 똑같은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말인즉, 그녀 역시도 신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는 말이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정대식은 눈을 크게 떴다.
"그게 정말이냐?"
엔트로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정대식 님과 같지만 다르다고 말씀드렸었지요. 저는 정대식 님과 같은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과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본능과도 같았다.
정대식은 엔트로피가 진정 원하는 게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조금씩 진화하여 그 모습이 바뀔 때마다 기뻐하는 것 같았다. 인형이나 입을 법한 드레스를 걸치고 있던 것이나, 어린 여자아이가 되고서 원피스를 사달라고 했던 모습 같은 것들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어쩌면 인간의 삶을 누구보다 동경하고 바라는 것은 엔트로피일지도 몰랐다.
정대식은 그녀를 말려야 한다고 생각해 입을 열었다. 그런 그의 입술을 엔트로피가 가볍게 덮었다.
뜻밖의 입맞춤을 한 엔트로피는 정대식을 가볍게 당겨 안았다. 그녀의 품은 진짜 사람처럼 따듯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엔트로피......!"
말릴 새도 없이 엔트로피가 빛의 기둥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녀의 모습이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빛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곧 빛이 온 사방을 휩쓸었다.
시공을 관통하는 거대한 힘이 정대식을 스쳤다. 그리고 그 힘이 멸망의 형태를 한 신을 덮쳐들었다.
파아아아아아----------------!
콰아아아아아아아아-----------------!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정대식은 거기에 휩쓸렸다.
주변의 모든 것이 멀어졌다.
일순 시간과 공간이 유리되고, 엄청난 충격이 세상을 파괴할 듯 요동쳤다.
* * *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교차하는 혼란이 지나쳐갔다.
시공을 꿰뚫는 힘이 지구라는 세상에 드리웠던 멸망의 그림자를 거두어갔다.
이윽고, 멸망을 휩싸고 돈 신의 힘이 우주 저편으로 멀어져갔고 세계를 뒤덮었던 빛도 점점 사그라졌다.
마침내 경외에 사로잡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사람들이 다시금 눈을 떴을 땐, 모든 것이 끝났음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약간의 조각구름이 흩어진 하늘은 쾌청했고 바람은 부드러웠다.
일대의 마천루가 전부 사라져버린 덕분에 시야가 확 트여 있었다.
북한산 자락을 돌아 북쪽으로 대피하던 사람들은 전부 발걸음을 멈추었다. 일반 시민들은 피난한 지 오래였기에 그들은 대부분 마지막까지 전장에 남아 있던 헌터들이었다.
그들은 정말로 모든 게 끝난 건가 싶어 얼이 빠져 있다가, 오래지 않아 놀라운 현상을 발견했다.
"어!"
"마력이......."
"마력이 강해졌어?"
그들은 거의 모두가 몬스터와의 격전을 치른 후라 마력이 바닥나 있었고 몹시 피로한 상태였다. 그런데 별안간 마력의 바닷속에 빠진 것처럼 주위에 충만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약간의 의식을 집중하자 그게 자연스레 몸속으로 흘러들었고, 힘이 강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각성자들은 믿기지 않는 기분에 얼떨떨해하면서도 환호를 했다.
"이것 봐! 이렇게나 구현이 손쉽게 이루어지다니!"
"대단해...... 사방에 마력이 넘쳐나잖아?"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놀라고 있던 것은 기철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티르벵거를 가볍게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완벽한 형태의 검기를 뽑아낼 수가 있었다.
급작스레 마력 양이 늘어나 버리는 바람에 여신급 무구를 다루는데 여유가 생겼던 것이다.
지금이라면 20성급이든 그 이상이든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던 기철민은 옆에 있던 광필두를 보고 말을 걸었다.
"야! 너도 마찬가지냐? 이거 나만 느끼는 거 아니지?"
"......."
그러자 광필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렇군. 아무래도 세상이 변한 것 같다."
"세상이 변했다고?"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세상이......."
그렇게 말을 하던 광필두는 문득 몹시 피로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는 땅이 꺼지라 한숨을 쉬다가 중얼거렸다.
"이제 좀 쉬고 싶네."
답지 않게 약한 소리를 뇌까린 그는 별안간 7성 무구를 벗어내기 시작했다.
하나의 완전한 갑주의 형태를 띠고 있던 7성 무구가 원래의 모습으로 변했고 광필두는 그것을 차례대로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가 갑옷을 벗자, 기철민은 깜짝 놀라는 수밖에 없었다.
"너...... 너......!"
그의 몸은 실로 처참했다. 어디라고 할 것 없이 전신이 뭉개져 있었다.
몸 곳곳에 부러진 뼈가 튀어나왔고, 그곳으로 피가 철철 흘렀다.
광필두는 7성 무구를 벗기가 무섭게 피를 왈칵 토해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야! 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빠...... 빨리 7성 무구 다시 입어! 몸이 그 지경인데 이거까지 벗으면 어쩌려고?"
기철민은 광필두가 7성 무구의 진화를 이루어내기 직전에 죽음에 이르는 부상을 입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7성 무구가 여신급으로 진화를 한 덕분에 망가진 몸으로도 여태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 7성 무구를 계속 착용하고 있으면 신체가 망가진 채로도 유지가 되겠지만 그걸 스스로 벗었으니 사신 앞에 모가지를 들이댄 셈이나 다름없었다.
"너...... 이......!"
허둥거리던 기철민은 황급히 포션을 찾았으나 그건 몇 병 남아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포션 같은 것으로 치료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힐러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그는 즉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폐허로 되돌아오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다가가 소리를 질렀다.
"힐러! 힐러!"
그러자 그들을 헤치고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최선이었다.
"제가 힐러예요! 저를 데리고 가주세요!"
기철민은 즉시 최선을 안아 들고 다시 광필두의 곁으로 되돌아왔다.
광필두는 이미 죽은 것인지 안색이 파리했고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그 광경을 본 최선이 지체 없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힐을 쓰기 시작했다.
주위에 넘치는 마력으로 그녀의 힘도 강해졌는지 엄청난 양의 빛이 광필두를 둘러싸고 그의 훼손된 육체를 다시금 짜 맞추고 있었다.
하지만 최선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놓으며 말했다.
"이미...... 이미 숨이 끊어졌어요. 이대로는 몸을 낫게 한다 하더라도 살아나지 못해요. 더 강한 힘이 필요합니다.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힘...... 리페어를 써야 해요."
기철민은 당황해서 소리쳤다.
"하지만 리페어를 쓸 수 있는 힐러는 몇 안 된다고 알고 있는데 그런 사람을 어디서......."
말을 잇던 기철민은 도중에 깨달았다.
그는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질문을 던졌다.
"설마, 당신이 리페어를 쓸 수 있는 겁니까?"
최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표정은 비장했다.
"원래는 써선 안 되는 능력이지만, 어쩔 수 없죠. 리페어를 쓰겠습니다."
그때였다.
"안 돼!"
귀에 익은 목소리에 기철민이 돌아보자 언제 왔는지 최희가 서 있었다.
그녀는 화가 잔뜩 난 모습으로 소리쳤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런 놈에게 그 능력을 쓸 순 없어! 그 힘은 공짜가 아니야, 너도 알고 있잖아! 저 사람의 시간을 되돌리는 대신 네 시간을 뺏긴다는 걸!"
기철민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리페어란 힐과 엇비슷해 보여도 그 본질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능력이었다.
힐이 말 그대로 상처의 재생을 촉진해 치료를 하는 방법이라면 리페어는 부상당한 신체의 시간을 되돌림으로써 처음부터 그 일이 없게끔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극소수라고 알려져 있었고, 기철민도 그만한 힐러를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최선이 알고 보니 그러한 능력자였던 것이다.
기철민은 그제야 그녀가 어떻게 자신을 살릴 수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자신이 광필두에게 반죽음당했을 때도 리페어로 상처가 감쪽같이 나아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 능력이 강대한 만큼 제한 없이 쓸 수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최선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숨이 멎은 광필두를 보고 말했다.
"언니! 망설일 여유가 없어. 이대로 내버려두면 정말로 죽을 거야!"
"죽으라고 해! 그놈은 범죄자라고, 네가 너를 희생해가면서까지 살릴 가치가 없는 사람이야!"
악을 쓰며 외치던 최희는 갑자기 말을 그쳤다. 그리고 전방을 바라보았다.
최선과 기철민도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에서 정대식이 걸어오고 있었다.
"대장님......!"
기철민은 그의 모습을 보고 몹시 안도했다. 그가 끌어내린 힘이 워낙에 강대해, 그 또한 멀쩡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대식은 딱히 다친 데도 없어 보였고 피로해 보이지도 않았다. 피곤하다는 느낌 자체를 아예 모르는 것 같았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압도적인 강력함이 그에게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