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 전사-296화 (295/297)

# 296

현질 전사

-12권 24화

"으악!"

풍덩!

하필 자빠진 데가 습지인지라 몸이 안으로 쑥 딸려 들어갔다.

윤현민은 물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을 쳤으나 수초들이 몸에 엉겨와 물 밖으로 머리를 빼는 것조차 어려웠다.

간신히 고개를 수면 위로 들어 올린 윤현민은 고함을 쳤다.

"살려줘요!"

흙탕물이 흘러들어와 흐린 눈에 자신을 한번 힐끗 돌아보고 그냥 달려가 버리는 딜러의 모습이 보였다.

"살려줘!"

윤현민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으나 주위의 머맨들을 끌어모을 뿐이었다.

윤현민은 자신의 머리통으로 날아오는 작살을 보고 식겁해 물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텀벙!

부르르르르르르-----------

수초들이 마구잡이로 몸에 엉겼고 물속에서도 머맨들이 버글버글한 게 보였다.

윤현민은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헛짓거리하지 말고 대학에나 가라던 부모님 말씀을 들을 걸 잘못했다는 후회가 찾아들었다.

그가 공부를 내팽개치고 이쪽 세계로 뛰어들게 된 것은 어릴 적부터 한결같았던 헌터들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다.

개중에서도 윤현민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인물이 한 명 있었다.

'정대식......! 대식이 형......!'

윤현민은 서서히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그 얼굴을 떠올렸다.

5년 전, 그는 세상에 혜성같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전에 없던 올인원이었고 전무후무한 능력으로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는 오랫동안 하와이를 점령하고 있던 헤르보르를 쓰러트렸을 뿐만 아니라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고 있던 암흑신 체르노보그를 무찔렀다.

그리고 인류 최대의 위기가 왔을 때 기적 같은 능력으로 세상을 멸망시킬 수도 있었던 존재들을 쓰러트리고 파괴된 서울을 복구했다.

어찌 된 일인지 그는 그 후로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세계 곳곳에서 그라고 짐작되는 인물이 나타나 인간이 감히 대적할 수 없는 강대한 적들을 쓰러트렸다.

그러나 그 행적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고, 몬스터들의 위협이 잦아들면서 그의 출현 횟수도 줄어들어 이윽고 전혀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그의 소식이 마지막으로 전해진 게 무려 2년 전이다.

정대식이라고 짐작되는 사람이 서아시아에 한 번 나타난 후로 그는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지금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디서 뭘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를 찾고자 하는 시도는 계속되었으나 누구도 그의 행방을 밝혀내지 못했다.

하지만 광화문 광장에 세워진 비석에 새겨진 글귀처럼, 사람들은 세상이 위기에 처한 어느 순간에 반드시 그가 되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의 존재는 인류에게는 새로운 신앙이 되었다.

초보 헌터라면 누구나 그를 상징하는 펜리르의 문양을 몸에 간직하고 있었고, 헌터들을 대상으로 하는 무기 상가나 식당, 편의시설 등등에는 그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었다.

그의 존재는 한편으로는 마력의 증대로 막강해진 각성자들의 주의를 환기하는 역할도 했다.

제아무리 강한 힘을 지닌 각성자라 하더라도 어디엔가 있을 정대식의 존재를 머리 한구석에 의식하고 있어야 했다.

실제로 정대식은 7성 무구를 모아 세상을 손아귀에 넣겠다는 야욕을 드러냈던 광필두를 응징한 일이 있었다.

그로 인해 광필두는 전향하여 최후의 전쟁 때는 최전방에서 싸웠으며, 지금은 지난 일에 대해 합당한 처벌을 받고 있었다.

또한, 정대식을 추종하는 구 펜리르 부대원들이나 최 씨 자매들과 같은 강자들이 시퍼렇게 눈을 부라리고 있으니, 각성자들은 스스로 자중해야 했다.

아직까지도 헌터들의 최고 덕목은 희생과 봉사로, 몬스터들과 싸우며 세상의 안녕을 바라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각성자들은 섣불리 권력을 탐할 수 없었으며, 각성자 연맹과 헌터 협회 스스로가 이능자들의 정치 개입에 제한을 두고 있었다.

즉, 정대식은 완전 확장 현실 세계를 일구어낸 인물이자, 세계 평화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자신도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윤현민은 그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유명하지 않았던 시절에서부터 형, 동생 하는 사이로 지냈던 것이다.

최후의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윤현민의 가족들을 구해준 적도 있었다.

윤현민의 소망은 그와 같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지나친 욕심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각성자조차 되지 못한 상황이라면.......

윤현민은 호흡 곤란으로 몸부림쳤다.

그 와중에 작살 수십 개가 그를 향해 날아왔고, 개중 몇 개는 윤현민을 스치고 지나갔다.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라 생각하던 그 순간.

파아아아아아아아아--------------------------

별안간 기묘한 파동이 물속으로 번져갔다.

공격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도리어 매우 편안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머맨들이 공격을 멈추고 물러났다.

그러나 윤현민은 그 상황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누군가 제 팔을 잡아당기고 있다는 사실만을 알았을 뿐이었다.

* * *

타닥타닥!

불똥이 튀는 소리에 놀라서 잠에서 깬 윤현민은 퍼뜩 상황판단을 못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는 웬 야영지에 누워 있는 상태였다.

주변 환경으로 봐서는 아직 던전 안인 것 같은데 놀랍게도 MFP 설치나 방어막 하나 없이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다. 게다가 냄비 안에는 물까지 끓었고 사방에 커피 냄새가 자욱했다.

이건 완전히 몬스터를 불러모으는 꼴이라 윤현민은 서둘러 흙으로 모닥불을 덮어 껐다. 그리고 찻잔에 담긴 커피를 엎어버리고 겉옷을 벗어 정신없이 휘둘러 냄새를 흩었다.

그렇게 난리를 치고 있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 뭐하는 거야?"

"뭘 하는 거긴......!"

화를 버럭 내며 몸을 돌리던 윤현민은 물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놀라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등 뒤에 나타난 사람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그 남자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기에 얼굴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윤현민은 자신이 상대방을 알고 있다는 강한 예감을 받았다.

그리고 그 예감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는 바로.......

윤현민은 설마 하는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사정없이 딸려 나왔다.

"정...... 정대식? 대식이...... 형?"

윤현민의 입에서 나온 그 이름을 듣고 후드 밑의 입술이 씩 웃었다.

곧 한걸음 성큼 앞으로 다가온 상대가 후드를 벗어젖히며 얼굴을 드러내었다.

"그 이름으로 불려보긴 오랜만이네."

윤현민은 미간을 흐렸다.

"대식이 형......!"

자신의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

지금 꿈을 꾸는 게 아니라면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남자는 바로 그였다!

윤현민은 믿기지 않는 기분에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정대식의 팔을 꽉 붙잡고 말했다.

"진짜 형이에요? 진짜로? 장난 아니고?"

"아야야, 아프다. 이거 놓고 이야기해."

"올인원이 겨우 이 정도로 아플 리가 있겠어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앉아."

윤현민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자리에 앉았고 그러자 정대식이 손끝을 딱 튀겼다.

그러기가 무섭게 꺼졌던 모닥불에 도로 불이 확 붙었다. 윤현민은 그 환한 빛에 끔쩍 놀라 말했다.

"더, 던전 한가운데서 가리는 것도 없이 이렇게 막 불을 피워도 되는 거예요?"

"못 피울 것도 없지."

"몬스터들이 오면 어쩌려고요."

"오면 오라지. 무슨 걱정이야?"

"하, 하긴......."

정대식은 세상을 멸망에서 구해낸 전에 없는 영웅이자 지구의 최강자였다.

이 던전에 있는 몬스터라고 해봤자 켈피나 머맨 따위니, 문제가 될 수 있겠는가?

윤현민은 경이로운 기분으로 그간 산더미 같았던 의문들을 쏟아냈다.

"도대체 지금까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거예요? 사람들이 형의 행방을 얼마나 궁금해했는지 알아요? 몇몇 단체에서는 형의 행방을 두고 엄청난 상금까지 내걸었다는 말이에요!"

"어, 그렇더라고. 근데 뭐어......."

정대식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나 줄곧 한국에 있었는데? 그것도 서울에."

"예?"

"거기, 강남에 새로 올라간 건물 있잖아. 거기 탑 층에 살아."

"펜트하우스 말이에요?"

"아, 그래. 거기. 거기 산지 좀 됐어."

"그럼 강남 한복판에 살고 있었다는 말이에요?"

정대식은 짐짓 우쭐대며 말했다.

"거기가 살기에 나쁘지 않더라고. 편의시설도 가깝고 밤에 산책하기도 좋고, 교통편도 편리하고 말이야."

"아니......."

윤현민은 아연실색해서 말했다.

"그렇게 가까이 있었으면서 왜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은 거예요?"

"사라질 때 지나치게 멋을 부렸더니, 다시 나타나기가 좀 그렇더라고. 하하하."

"농담 아니고요."

정대식은 대답 대신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을 보고 윤현민은 그의 실종을 두고 사람들이 했던 온갖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가 자취를 감춘 이유에 대해 가장 신빙성이 있는 가설 중의 하나는 그가 지나치게 강하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그의 능력을 가지고는 더 이상 인간 세상에 머물러 있기가 무리였을 거라는 추측이 우세했다.

한편으로는 그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온갖 정치적이면서도 원치 않는 상황에 휩쓸릴 수 있으니 고의로 정체를 숨기고 있을 거라는 짐작도 있었다.

윤현민은 그 모든 이유가 해당될 거라는 사실을 깨닫고 더 이상 그 일을 캐묻지는 않았다.

대신에 다른 말을 했다.

"그런데 어떻게 강남 한복판에 있으면서 감쪽같이 숨어 있을 수가 있었어요? 세상 사람들이 전부 다 형의 얼굴을 알고 있는데. 형 얼굴이 새겨진 비석이 광화문 광장에 생긴 거 알고 있죠? 저 거기 가서 사진도 찍었다고요."

"......말도 마라. 부끄러워 죽겠으니까. 그래서 차마 내 얼굴을 내놓고는 못 다니겠더라고. 그래서 적당히 새로운 신분을 만들었지."

정대식은 그 모든 일을 지나 보내고 지금은 바라던 대로 강남에 빌딩 여러 채를 둔 젊은 졸부쯤으로 살고 있었다.

고급 외제 차를 주차장에 전시해놓고 맛있는 것을 마음껏 먹으러 다니며 물건 살 때 가격표를 확인하지 않는, 꿈에도 그리던 생활을 한창 누리던 중이었다.

사실 그가 가질 수 있는 부에 비하면 그런 졸부 생활은 소박했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세상의 부를 전부 끌어모을 수도 있었고 엄청난 가격을 호가하는 아이템들을 독점할 수도 있었으나, 지나친 부는 지나친 힘과 같이 불필요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정대식은 이 정도의 삶으로도 지극히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 정대식을 보고 윤현민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은 몰라도 펜리르 부대원들이나...... 최 씨 자매분들한테는 연락을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분들이 형을 얼마나 기다리고 있는데요!"

"그 녀석들 소식에 대해서는 나도 빠삭해. 알아서들 잘하고 있는데 굳이 내가 나설 필요가 있나?"

현재, 펜리르 부대원들은 타이탄 공격대에서 독립했다.

그들은 기철민을 필두로 요르문간드라고 이름 지은 공격대를 새로이 창설했다. 그리고 그 공격대에는 최희와 최선도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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