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화
김수민이 괜히 DX 길드로부터 자신을 지켜달라고 부탁한 것은 아닐 거다.
그녀가 봤을 때 DX 길드가 심상치 않게 여겨져서 그런 부탁을 한 것일 터.
그리고 내가 생각해도 그녀의 우려는 결코 기우가 아니었다.
DX 길드라면 그녀를 영입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수 있었다.
어쩌면 납치 같은 극단적인 수를 사용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나 혼자서 김수민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력을 꾸준히 늘리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실력을 늘려도 내 몸은 단 하나였다.
DX 길드에서 작정하고 김수민을 노린다면 나 혼자서 막아내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가장 좋은 수는 DX 길드를 없애는 건데….’
어차피 언젠가는 없애야 할 길드였다.
그들이 악행을 저지르기 전에 더 일찍 무너뜨린다면 손해 볼 것은 없으리라.
하지만 이 또한 지금 상황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동안 정소연, 정호연 자매가 벌어주는 카르마로 꾸준히 내공을 늘렸었다.
현재 내가 보유한 내공은 무려 15년.
마력 수치가 97이나 되는 주현근과 비교해봐도 크게 밀리지 않았지만, 그래봤자 B랭크 헌터도 상대하기 어려웠다.
DX 길드에는 B랭크 이상의 헌터도 꽤 있을 것이니 그들을 응징하는 것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정호연에게 부탁해야겠어.’
정호연과 정소연이 소속되어 있는 화영 길드.
김수민을 직접 보호해줄 수 없는 나는 그녀를 화영 길드에 보낼 것을 염두에 두었다.
물론 화영 길드가 내 뜻에 좌지우지되는 길드인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화영 길드의 길드 마스터와는 안면도 없는 사이였으니.
다만 내가 믿는 구석은 정호연이었다.
정호연은 화영 길드의 에이스로 차기 길드장이라 불리고 있었다.
그녀라면 김수민을 보호해줄 능력이 있을 것이다.
평소처럼 내게 무공을 배우기 위해 찾아온 정호연에게 나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호연 씨,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내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처음이기 때문일까?
정호연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쿨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한새 씨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줘야죠. 어떤 부탁이죠?”
“사람 한 명 좀 뽑아주셨으면 합니다.”
“의왼데요? 한새 씨가 채용 청탁을 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사정이 있습니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 김수민의 사정을 이야기해주었다.
“DX 길드에서 노리는 인재라고요?”
“예. 그런데 아실지 모르겠지만 DX 길드의 질이 굉장히 안 좋습니다.”
“저도 얼핏 듣기는 한 거 같아요. 거의 조폭이나 다를 게 없다던데.”
“그래서 김수민 헌터가 걱정하고 있습니다. DX 길드가 보복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말입니다.”
사실 김수민보다는 내가 더 걱정을 하고 있었다.
김수민이야 그냥 감이 안 좋다고 여기는 수준이었지만, 나는 DX 길드의 실체를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사연이라면 받아주는 것이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겠네요. DX 길드 따위는 두려울 게 없으니 말이에요.”
역시 화영 길드의 에이스다운 자신감이었다.
뭐 본인부터 A랭크 헌터이니 자신감을 가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한새 씨. 그런데 혹시 그 김수민이라는 헌터분과 어떤 관계이신가요?”
“제 제자가 될 사람입니다.”
“제자요?”
“예. 무공에 재능을 가진 인재거든요.”
“그럼 이성적인 관계는 아니라는 거네요?”
설마 그런 오해를 할 줄이야.
“어디까지나 스승과 제자의 관계입니다.”
“다행이군요.”
“아니에요. 그런데 한새 씨. 제가 부탁을 하나 들어드렸으니, 저도 하나 부탁해도 될까요?”
“말씀하십시오.”
“한새 씨가, 저희 길드의 길드원들에게도 무공을 가르쳐주시면 안 될까요?”
나는 재지 않고 바로 대답하였다.
그러자 정호연이 반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무공의 효과를 100% 경험한 그녀였기에 더욱더 반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무공을 배우는 거, 화영 길드의 수뇌부도 찬성하는 일입니까?”
“사실 그게 문제긴 해요.”
반색하던 정호연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런 정호연을 보고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 이름이 업계에서 나름 화제가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메인스트림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대세는 스킬이었다.
그리고 이 같은 상황은 나나 무공을 익힌 다른 누군가가 B랭크 이상의 실력을 보여주지 않는 한,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기는 아쉬운데.’
화영 길드는 나에게 있어 금은보화가 가득 담긴 황금 보따리나 다를 게 없었다.
그만큼 인재가 넘쳐나는 곳이었다.
“길드 마스터와의 약속을 잡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희 길드 마스터요?”
“예. 제가 직접 설득해보겠습니다.”
정호연과 정소연 자매가 있는 곳이니, 이참에 확실한 아군으로 만들고 싶었다.
단 한 명.
화영 길드의 정승호 길드 마스터만 설득한다면 화영 길드를 아군으로 만드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만약 화영 길드를 아군으로 둘 수만 있다면 DX 길드를 처리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거야.’
DX 길드뿐이겠는가.
내 살생부 명단에 적혀있는 무수히 많은 빌런들을 처리할 때도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언니, 정말 한새 씨가 그런 부탁을 했어?”
정소연은 눈을 크게 떴다.
박한새가 인사 청탁을 하였다니.
그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그녀였기에 꽤 충격이 컸다.
“알고 보니 사정이 있었어.”
“무슨 사정?”
“DX 길드가 김수민이라는 헌터를 노리고 있다나 봐.”
“…그래?”
그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DX 길드가 김수민이라는 헌터를 노리건 말건 박한새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한새 씨는 김수민이란 헌터를 자신의 제자로 생각한다 하더라고. 그래서 적극적으로 돕는 거 같아.”
“우리랑 비슷한 관계인 셈이네.”
“뭐, 대충 그렇지.”
하필 여성 제자라니.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한새 씨에게 우리 길드원들에게 무공을 좀 가르쳐달라고 부탁했어.”
“화영 길드에서 무공 교육을 해달라고 한 거야?”
“응. 잘하면 우리 길드로 데려올 수 있을 거 같아.”
“한새 씨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한 거 아니야?”
그녀도 박한새가 화영 길드에 온다면 대찬성이었다.
정호연만큼이나, 아니 그녀 이상으로 무공에 재미를 보고 있는 게 정소연이었다.
화영 길드의 정예 멤버들이 전부 무공을 익힌다면 화영 길드는 단숨에 몇 단계 위로 올라갈 수 있으리라.
하지만 무공의 가치를 알기 때문에 박한새에게 미안한 감정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본인은 괜찮다던데?”
“그래도….”
“일단 한새 씨와 이야기 다 끝난 일이니까, 그에 대해서는 더 말해봤자 의미 없어. 그보다는 어떻게 간부들을 설득할지가 중요해.”
“간부들보다는 삼촌이 문제 아니야?”
두 사람이 말하는 삼촌이란 다름 아닌, 화영 길드의 길드 마스터인 정승호였다.
“그건 그렇지. 근데 한새 씨가 이야기했어. 삼촌과의 약속을 잡아달라고. 자신이 삼촌을 설득해보겠대.”
“약속을 잡기도 쉽지 않을 거 같아. 삼촌 성격 알잖아.”
“소연아, 네가 한번 이야기를 꺼내봐. 삼촌이 너한테 약하잖아.”
“…알았어. 한번 해볼게.”
“박한새라면 무공의 창시자라는 괴상한 별명을 가진 비각성자를 말하는 거냐?”
“예. 맞아요.”
“소연아. 네 눈에는 내가 한가한 사람처럼 보이는가 보다.”
화영 길드의 길드 마스터인 정승호의 말에 정소연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정승호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내가 그런 사기꾼을 만나야 할 사람은 아니잖아. 나, 화영 길드의 길마 정승호야.”
“박한새 헌터는 사기꾼이 아니에요. 제 내상을 치료해준 것도 박한새 헌터라고요.”
사기꾼이라니.
그녀로선 들어줄 수 없는 말이었다.
박한새가 가르친 무공이 아니었으면 아직도 그녀는 마력 역류 현상으로 폐인처럼 살아야 했을 것이다.
“사기꾼이 아니면? 비각성자라는 소문은 모두 거짓이고 실상은 그도 헌터라는 거냐?”
정승호는 딱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무공이란 거 자체를 사기로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랭크가 높은 헌터일수록 그와 비슷한 시각을 가졌다.
그도 그럴 것이, 마력은 B랭크 이상의 상위 헌터들도 다루기 버거워하였다.
마력을 온전히 다루는 것은 사실상 S랭크만의 전유물일 정도였다.
물론 정승호처럼 예외적으로 마력을 능숙하게 다루는 A랭크 헌터도 존재하였지만, 그건 말 그대로 예외적인 존재일 뿐이었다.
이렇게 상위 헌터들도 다루기 어려워하는 마력을 일개 비각성자가 다룬다니.
그가 불신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무공은 실존해요.”
정소연의 언니인 정호연까지 나서서 박한새를 옹호하였다.
그녀 역시 무공 덕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박한새를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
“호연아. 너까지 그런 사기꾼에게 속을 줄은 몰랐다.”
“속은 게 아니라, 제가 직접 확인했다니까요?”
“확인했다고? 어떻게 확인했다는 거냐?”
“제가 직접 무공을 배웠어요.”
“장풍이라도 한번 쏴봐라. 그럼 내가 믿어주마.”
억지를 부리며, 자신의 말을 끝까지 부정하는 정승호를 보고 정호연은 참지 못하고 외쳤다.
“삼촌!”
그러자 정승호도 질 수 없다는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무공은 진짜라니까요! 왜 못 믿는 거예요!”
“나는 내가 본 것이 아니면 절대 안 믿어.”
“그러니 직접 보시라고요. 한새 씨를 만나면 삼촌도 믿게 될 수밖에 없을 거라니까요?”
정승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까지 강하게 주장하니 그도 더는 반대할 수가 없었다.
“졌다, 졌어. 그 박한새인지 뭔지 하는 놈, 한번 만나보기는 해보마.”
“잘 생각하셨어요. 화영 길드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한새 씨는 반드시 잡아야 해요.”
“맞아요. 최고의 제안을 제시해서 반드시 화영 길드에 들어오게 만들어야 해요!”
그가 박한새를 만나주겠다고 대답하자, 두 사람이 신이 나서 한마디씩 하였다.
정승호는 그런 두 사람을 보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얼씨구. 누가 보면 박한새라는 놈이 S랭크 헌터라도 되는 줄 알겠다?”
“S랭크 헌터보다 훨씬 더 중요하죠. S랭크 헌터는 한 명으로서의 가치밖에 없지만, 박한새 헌터는 수많은 S랭크 헌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에요.”
S랭크와 비교했는데도 오히려 S랭크보다 더 가치가 높단다.
정승호로선 그저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호연의 얼굴은 절대 허언처럼 보이지 않았다.
옆에 있는 정소연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진심으로 박한새의 가치가 S랭크 헌터보다 높다고 판단하는 듯싶었다.
‘웃기는군. 일개 비각성자가 S랭크보다 가치가 높다니. 이 녀석들, 뭐에 씌어도 단단히 씐 거 같은데?’
S랭크 헌터가 어떤 존재이던가.
그 나라의 국력을 상징하는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개 비각성자를 그런 S랭크 헌터보다 높게 평가한다는 게 그로선 어처구니없을 뿐이었다.
‘무슨 수로 두 사람을 저렇게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절대 속일 수 없을 거다.’
정승호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사기꾼의 정체를 낱낱이 밝혀서 반드시 응징하고 말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