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화
“다음 기수 때 신청자에 한해서 공평하게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지금 바로 무공을 배울 수는 없는 건가요?”
내가 단호하게 대답하자, 진세희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회귀 전처럼 그녀는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당장 행동으로 옮기고 마는 사람이었다.
실천력이 그만큼 좋다는 뜻인데, 그런 그녀이기에 실망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럼 조건은 어떻게 조율하면 될까요?”
“조건도 그때 조율하면 될 거 같습니다.”
무공의 가치는 시간이 오를수록 더 뛰게 될 터.
급한 것도 아닌데 굳이 지금의 가치로 계약을 진행할 이유는 없었다.
“제가 너무 늦은 거 같아서 뭔가 아쉽게 느껴지네요.”
“그래도 다른 길드들보다는 빠른 겁니다.”
“우리 길드도 그렇고, 꼰대들이 너무 많아서 문제라니까요.”
“용건이 끝나셨으면 저는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한 가지 더 제안을 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이능관리부에서 독립을 하고 싶지 않으세요?”
속으로 작게 감탄하였다.
내가 딱 독립을 생각하던 시점에 이런 말을 하다니.
“독립이라면?”
“흔히들 무림 아카데미라고 하죠? 사람들은 비유 삼아 하는 말이지만, 진짜 무림 아카데미를 세우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오직 저만의 아카데미 말씀입니까.”
“네, 바로 그렇죠!”
“제가 만약 독립하겠다고 하면 어떤 도움을 주시겠습니까?”
“웬만한 대학교보다 커야 하니, 큰 땅이 필요하겠죠? 입지도 좋아야 하고.”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니 그녀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명의로 송현동에 10만 평 정도 되는 땅이 있어요.”
서울에서 10만 평이라니.
엄청난 크기긴 했다.
물론 1차 대격변 이후로 강북은 땅의 시세가 확 내려간 터라, 10만 평이어도 1,000억대 수준일 테지만 말이다.
‘역시 오성 회장이 아끼는 손녀답게 자산이 엄청나군.’
자산이 부동산 자산만 있는 것은 아닐 테니, 다른 자산도 더 모아보면 천문학적일 게 분명하였다.
“무공 아카데미의 부지로 10만 평이면 적당하지 않을까요?”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물론 땅만 드리겠다는 것은 아니에요. 오성 그룹의 대대적인 지원이 있을 거예요.”
재계 1위 오성 그룹.
그들의 지원을 받아 무림 아카데미를 설립한다면 그 규모는 엄청날 게 분명하였다.
“오성 그룹 회장과는 이야기가 된 겁니까?”
“제가 부탁하면 할아버지는 허락해주실 거예요.”
너무 당당하게 그리 말하니 나로서도 할 말이 없었다.
“죄송하지만, 거절해야 될 거 같습니다.”
“이건 예상 못 했네요. 독립하실 생각이 없으신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그러면 이유가 뭐죠?”
이유?
그거야, 내가 특정 길드와 독점 계약을 하지 않는 이유와 똑같았다.
“오성의 지원을 받아 무림 아카데미를 설립하면 결국에는 오성의 무림 아카데미가 될 겁니다. 저는 그걸 원치 않습니다.”
“저는 따로 개입할 생각이 없는데요?”
“오성의 생각이 어떻든, 다른 헌터, 다른 길드 그리고 정부에서는 무림 아카데미를 오성의 세력으로 볼 겁니다.”
아카데미를 세울 때, 다른 단체의 지원을 받기는 할 것이다.
나 혼자서 모든 것을 하는 것보다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시간이 단축될 테니까.
하지만 한 단체에서만 지원을 받는다면 그 단체의 영향력이 너무 강해진다.
그러니 이왕이면 최대한 많은 단체, 그리고 최대한 많은 나라에게서 지원을 받는 게 좋을 것이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다 안 되네요?”
“그저 시기가 안 맞았을 뿐입니다.”
“그러면 진짜 마지막으로 하나만 부탁할게요. 이건 꼭 들어주셔야 해요?”
진세희가 무서운 눈으로 말했다.
들어주지 않으면 괜히 귀찮게 할 거 같은 눈이었다.
“들어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저와 대결 한번 해주세요.”
무슨 부탁을 하나 했더니….
‘나를 봤을 때, 처음 한 말과 똑같군.’
물론 회귀 전에는 무공을 가르쳐달라느니, 아카데미 세우는 데 도움을 주겠다느니.
그런 이야기들은 하지 않았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기에 나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였다.
“저 사람은 누구야? 연예인인가?”
“어, 나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아! 그 사람이다.”
“누구?”
“진세희잖아! 진세희!”
“아, 그 오성가의 진세희?”
“재벌이 왜 교관님을 찾아왔을까?”
“글쎄. 뭔가 제안하려고 왔나?”
무림 아카데미 교육생들은 진세희를 보고 웅성거리기 바빴다.
진세희는 SNS 활동만 할 뿐, 따로 방송에 출연하거나 사회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엄청난 유명인이었다.
오성 그룹의 일원이자, S랭크 헌터 진수호의 딸이라는 사실만으로 유명인이 되기엔 충분하였던 것.
심지어 그녀는 웬만한 연예인보다 더 예뻤으니 인기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지금 뭐 하려는 거지? 설마 대련하려는 건가?”
“헉! 진세희 헌터, 오성 길드의 차세대 유망주 아니야?”
“교관님, 괜찮으실까?”
“무슨 교관님을 걱정하고 그러냐. 오히려 진세희 헌터를 걱정해야지.”
경기장에서 몸을 푸는 두 사람을 보며 너 나 할 것 없이 당황하였다.
두 사람이 대련하는 것은 지금껏 전혀 상상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우구스. 너는 누가 이길 것으로 보지?”
이정은 흥미로운 눈으로 두 사람이 경기장 위로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안 그래도 박한새와의 실력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궁금해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운 좋게 박한새의 실력을 엿볼 기회가 생겼다.
이정으로선 흥미가 돋지 않을 수 없었다.
-후후후. 일단 확실한 것은 박한새가 지는 건 도무지 상상이 안 간다는 겁니다.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었군.”
아우구스 역시 그와 생각이 똑같았다.
무공의 창시자인 박한새라면, B랭크 헌터로 알려진 진세희에게 질 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다만 어떤 식으로 이길지는 기대하며 지켜봐도 되겠어.’
“그럼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네! 저는 준비 다 됐어요.”
진세희는 대결이 시작되자마자 바로 스킬을 사용하였다.
그녀의 스킬 중에 ‘약점 간파’라는 스킬이 있었다.
말 그대로 상대의 약점을 알려주는 스킬이었다.
‘약점이 없다고!?’
스킬을 사용한 그녀는 예상치 못한 결과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스킬을 사용하면 거의 누구든, 사각지대에서만큼은 붉은 빛이 흘러나왔다.
즉, 발끝이라든가, 눈이 닿지 않는 등 부분이 약점으로 표시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박한새는 전혀 달랐다.
약점 표시가 아예 안 뜨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색깔이 사실상 흰색이나 다를 게 없었다.
흰색은 약점이 아니라는 의미였으니, 사실상 그에게 약점이 없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무방하였다.
“먼저 가겠습니다.”
진세희가 스킬이 먹히지 않아 당황하고 있을 때, 박한새가 주저 없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입술을 질끈 깨문 진세희가 다급히 자신의 또 다른 스킬, 식물 조작을 사용하였다.
콰직!
‘보법이란 게 이렇게 빠른 거였어!?’
달려오는 것을 보고 막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순간 이미 박한새는 그녀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 정도면 가속 능력자가 아니라, 초고속 능력자의 속도로 봐도 무방할 거 같았다.
콰직! 콰직!
그녀는 나무를 날려서 박한새가 근접하지 못하게 방해하였다.
일단 거리를 벌린 뒤에 다른 공격을 퍼부을 생각이었다.
‘좀 떨어지라고!’
하지만 박한새는 끈질겼다.
800점대, 즉 A랭크로 판명된 그녀의 스킬로도 도무지 거리를 벌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이건 어떠냐!”
진세희는 넝쿨을 소환하였다.
주먹으로 부술 수 없으니, 넝쿨로 시간을 벌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진세희의 의도는 이번에도 먹히지 않았다.
박한새가 손날을 세우더니 그녀가 날린 넝쿨을 손날로 베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니, 손이 어떻게 저렇게 날카로울 수가 있지? 검으로도 잘 베이지 않는 건데!’
약점 간파를 시작으로 뭐 하나 그녀의 뜻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었다.
길드의 A랭크 헌터들을 상대했을 때보다 더 큰 벽처럼 느껴졌다.
어떤 스킬을 사용해도 이길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거리가 좁혀지자 그녀는 박한새의 공격을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결국, 박한새의 발에 치인 채 바닥을 나뒹굴었다.
“아직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는 고개를 젓더니, 다시 보법을 펼쳤다.
진세희가 주먹을 쥐며 정면을 경계할 때, 그가 뒤에서 나타나서는 손가락을 찔렀다.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려고 하는데, 이상하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포승줄로 꽁꽁 묶인 기분이었다.
“들어보신 적 있으실지 모르겠지만, 이게 점혈입니다.”
“푸, 풀어주세요.”
“기권하시겠습니까?”
잠시 망설였지만, 스킬도 안 써지는 상황에서 더 승부를 이어갈 수는 없었다.
“…기권할게요.”
치욕스러웠다.
이렇게 제대로 된 저항도 못 한 채 무기력하게 기권해야 하다니.
‘하지만 무공의 힘을 확실하게 느꼈어.’
박한새는 비각성자다.
그런데도 B랭크 헌터인 그녀를 압도하였다.
무공이 그만큼 엄청난 잠재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의미하였다.
‘꼭 배우고 말 거야!’
“다음에 제가 무공을 익히면 그때 한판 더 해요!”
“네, 그럽시다.”
“그렇다고 제가 무서워서 무공을 제대로 안 가르쳐주면 안 돼요!”
비각성자인 나와의 대결에서 패배했음에도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전부터 늘 느꼈던 거지만, 재벌 3세답지 않게 참, 사람이 밝고 명랑한 거 같았다.
‘이성은이 저런 모습을 보고 반했던 거겠지?’
내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옆에서 이정이 말을 걸었다.
“이번에 보니 너의 실력을 따라잡는 것도 금방일 거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
분명 압도적으로 이겼는데도, 저런 소리를 하다니.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많이 커진 거 같아 보였다.
‘무공이란 게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까지야 막힘없이 성장했으니 저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고 해도 계속해서 지금과 같은 성장세를 이어갈 수는 없었다.
무공의 창시자인 나조차도 매번 벽을 마주하는 게 현실이었으니 말이다.
‘나중에 이정 헌터와도 대련을 해서 현실을 깨닫게 해줘야겠군.’
물론 나도 방심하면 안 되긴 했다.
이정의 재능이 엄청나다는 사실은 분명한 사실이었으니.
진세희는 집에 가서 자신의 SNS에 글 하나를 올렸다.
[beagle_sehee 오늘 무림 아카데미 가서, 그 유명한 박한새 님 만났어요.
제가 무리하게 부탁해서 대결을 했는데, 아무것도 못 하고 져버렸어요. ㅠㅠ
박한새 님, 제가 봤을 때 웬만한 B랭크 헌터보다 강할 거 같아요. (절대 제가 져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이능관리부 #무공은진짜다 #나도배우고시퍼 #박한새]
그녀가 이와 같은 게시글을 올리자 인터넷에서 난리가 났다.
오성 길드에서 차세대 에이스로 주목받던 그녀였다.
랭크만 해도 무려 B랭크였으니,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상위 헌터였다.
그런 그녀가 박한새와의 대결에서 패배했다?
이는 박한새의 무력이 최소 B랭크를 넘어선다는 사실을 의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