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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대신 회귀함-57화 (57/275)

#057화

“저와 대결을 하고 싶어서 3기 아카데미를 신청하신 겁니까?”

나는 차갑게 웃었다.

레이븐 길드의 차기 에이스가 가입을 신청해서 기뻐했더니, 다른 의도를 품고 가입한 것이었다.

‘이런 사소한 것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구나.’

정의현은 회귀 전에도 무공이란 것을 받아들이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오죽했으면 S랭크로 알려진 이성은에게까지 도발을 했을 정도였다.

“그래. 내가 SNS로도 대결 신청을 해보고 전화도 몇 번이나 해봤는데 네가 다 씹었잖아? 이렇게라도 기회를 만들어야지.”

내 이름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일신의 무력에 자신감이 있는 헌터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대결을 신청했었다.

그래서 아예 무시하는 대응으로 일관했더니, 정의현 같은 사례가 나온 거 같았다.

대결을 거절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괜히 정의현이 무서워서 대결을 피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보는 눈이 몇 명인가.

심지어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무공을 배우기 위해 온 헌터들이었다.

난 그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아무 조건 없이 대결을 해주면 앞으로 귀찮은 일이 많아질 것이다.

내가 비각성자라는 이유로 무작정 들이대는 헌터들이 생겨날 터.

그런 상황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하였다.

“조건? 뭔데?”

“점혈을 30초 안에 풀어낸다면 그때 대결을 받아주도록 하겠습니다.”

“점혈? 그 손가락을 찔러서 스턴 시키는 기술을 말하는 거냐?”

무공을 불신하는 주제에 점혈이 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나름대로 조사는 한 모양이었다.

“예, 맞습니다. 참고로 오늘 시험할 것도 바로 이 점혈입니다. 물론 시험 통과 기준은 30초가 아닌 1분이지만, 정의현 헌터라면 30초 안에 충분히 풀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내가 도발하듯, 그와 같이 말하자 정의현이 코웃음 쳤다.

“30초라고? 웃기고 있군. 5초, 아니 1초면 충분해.”

어지간히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그는 무공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위력에 대해서는 과장되었다고 생각하는 거 같았다.

하기야, 무공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내 앞에서 행패를 부리지는 않을 것이다.

“점혈이란 거, 어디 한번 해봐. 가만히 있어 줄 테니까.”

정의현은 양팔을 벌리며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굳이 거절하지 않고 그에게 다가갔다.

“내가 바로 풀어버려서 무공 따위는 별거 아니란 사실을 증명해주마.”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그를 무시하며 손가락으로 그의 혈도를 찔렀다.

그러자 열심히 나불거리던 그의 입이 탁 닫혔다.

딱히 아혈을 짚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갑자기 몸이 움직이지 않으니 당황해서 입을 다문 것이겠지.

“뭐, 뭐야? 왜 안 움직여져?”

“1초면 충분하다고 하셨는데, 이미 5초가 지났습니다.”

내 말에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였다.

점혈에 당한다고 설마 이렇게까지 무기력해질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하긴, 고작 손가락에 한 번 찔렸다고 B랭크 헌터가 몸을 옴짝달싹 못 하는 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스킬로 따지면 거의 B랭크 이상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단 1초에도 전투의 향방이 달라지는데, B랭크 헌터를 무려 5초 이상 묶어둘 정도의 위력이었으니 말이다.

“푸하하하! 센 척하더니, 아예 움직이지도 못하네?”

“뭔가 했더니 그냥 병신이었잖아?”

“나였으면 혀 깨물고 자살했을 듯.”

“근데 정의현이면 B랭크 헌터일 텐데, B랭크 헌터에게도 점혈이 통하는 거였어?”

“그러게. 실전이었으면 이미 뒤진 거나 마찬가지였겠어.”

구경하던 헌터들은 정의현을 비웃기 바빴다.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채 안간힘을 쓰는 정의현의 모습은 내가 봐도 우습게 보이기는 했다.

‘그래도 확실히 재능은 있는 거 같군.’

겉으로만 봐서는 헛된 곳에 힘을 쓰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 눈에는 보였다.

그의 마력이 내가 강제로 눌러놓은 혈도를 조금씩 풀어가는 모습이.

의도적으로 마력을 움직인 것은 아닐 테고, 순전히 재능의 힘인 듯싶었다.

“30초 지났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재능이 있다고 해도 처음 걸린 점혈을 바로 푸는 것은 쉽지 않았다.

주현근이나 이정 수준의 재능을 가진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오오! 움직인다.”

“몇 초가 지난 거지?”

“몇 초가 지났든 실전이었으면 이미 100번은 죽었겠네.”

안간힘을 쓰던 정의현은 결국 50초를 넘기기 전에 점혈을 풀어냈다.

시험 기준으로는 당당하게 합격한 셈이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 앞에서 망신을 당했는데 시험을 합격했다고 기분이 좋을 리는 없을 터였다.

“시발! 이딴 의미 없는 거 집어치우고 그냥 한판 붙어.”

정의현은 콧김을 뿜어내며 내게 외쳤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같잖은 소리 집어치워! 그냥 한판 붙자니까, 쓸데없는 말이 왜 이렇게 많아!?”

“뭐, 저도 대결은 피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나는 그렇게까지 말하고 단전의 내공을 발현하였다.

그러자 단전에서 뿜어져 나온 엄청난 양의 내공이 정의현의 전신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대결에서 지면 단순히 망신만 당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진세희와 대결했을 때는 따로 내기한 것이 없었으니, 선의의 승부를 보고 끝을 냈었다.

하지만 정의현과는, 내가 내기에서 이길 경우, 귀찮게 굴지 않는다고 약속하였었다.

정의현은 그런 약속을 어긴 셈이니, 나로서는 응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골착근의 위력을 보여주마.’

웬만한 고문은 우습게 느껴질 정도의 고통을 느끼게 한다면 약속을 어긴 대가로는 충분할 거 같았다.

“……시발.”

하지만 내 협박이 통한 것일까?

당장이라도 공격할 것처럼 위협적인 표정을 짓던 정의현이 주춤거리기 시작하였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압력이 그의 심리를 위축시킨 것이었다.

“오늘은 내기에서 졌으니 이만 물러나지만, 다음에는 나와의 대결을 피할 수 없을 거야!”

“저는 대결을 피한 적이 없습니다만.”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는 몸을 돌렸다.

누가 봐도 내가 무서워서 도망치는 거 같은 모습이었다.

“존나 멋있네. 저게 비각성자라고?”

“가슴이 웅장해진다는 말이 뭔지 이제야 알겠어.”

“인정. 무공의 창시자 앞에선 B랭크 헌터도 별거 아니었잖아?”

사람들의 대화 소리를 들으니, 무공에 대한 평가가 조금은 더 좋아질 거 같아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정의현이 물러난 뒤, 본격적으로 입학시험이 시작되었다.

입학시험은 내가 정의현에게 말했던 대로 점혈을 얼마나 빨리 푸는지.

1분 안에 풀면 합격하는 아주 간단한 시험이었다.

‘하지만 재능이 없다면 1분은커녕 10분이 주어져도 풀기 힘든 게 점혈이지.’

실제로 점혈에 당한 수험생 중에서 1분 안에 점혈을 푼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열에 한 명 정도만이 1분, 그것도 거의 50초 후반대가 돼서 점혈을 풀어냈다.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인재를 많이 건졌네.’

레이븐 길드와 화영 길드 그리고 오성 길드에서 특히 인재가 많이 나왔다.

역시 유명한 길드답게 유망주가 많은 모양이었다.

“오랜만이에요. 박한새 교관님.”

“예, 반갑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재능이 뛰어난 이는 바로 이 사람이었다.

진세희.

오성 길드의 차세대 에이스라 불리는 이 여인은 회귀 전에도 절정 무인으로 불렸었다.

나 역시도 절정 무인이었으니, 경지 자체는 나와 같았던 것이다.

“아까 정의현 헌터를 무찔렀을 때, 정말 멋있었어요.”

“너무 태연하신 거 아니에요? 정의현 헌터가 그렇게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인데 말이죠.”

“정의현 헌터와 아는 사이십니까?”

“아, 그,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이름만 아는 사이예요.”

나는 점혈을 하고자 그녀의 몸을 향해 손을 올렸다.

그러자 진세희가 마치 나를 놀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 몸에 손을 대실 건가요?”

“몸에 손을 대지 않고는 점혈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제 몸에 손을 댄 남자는 아버지 말고 박한새 교관님이 처음이에요. 그러니 책임지세요.”

“헤헤, 농담이에요. 농담.”

역시 종잡을 수 없는 여자였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나는 바로 그녀를 향해 손가락을 내질렀다.

“아앗!”

역시 처음에는 다 당황하였다.

갑자기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니 누구나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역시 빨라.’

괜히 절정 고수가 되는 것은 아닌 듯싶었다.

진세희는 그 어떤 헌터보다 빠른 속도로 막힌 혈도를 풀어냈다.

“오오. 30초도 안 걸린 거 같은데?”

“30초가 뭐야. 15초도 안 걸리지 않았어?”

“역시 오성 길드의 에이스답네.”

“부럽다. B랭크 헌터인데 무공의 재능까지 있는 거잖아?”

나 역시도 작게 감탄하였다.

‘13초라. 내공을 다루는 자질 하나는 S랭크 못지않겠어.’

시험이 끝난 뒤,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려 100명.

천재까지는 아니어도 인재에 해당하는 헌터를 무려 100명이나 발굴하였다.

이들이 무공을 배우고 일류, 또는 초일류 무인으로 성장할 미래를 생각하니 벌써 기분이 좋아졌다.

“진세희 헌터님.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기록을 세우신 거,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물론 가장 큰 소득은 진세희였다.

그녀는 미래의 절정 고수가 될 사람이었으니.

‘진수호 길드장의 딸이라는 것도 무시할 수 없고 말이지.’

언젠가 S랭크 헌터들도 무공을 배우게끔 유도해야 했다.

이성은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 S랭크 헌터가 무공을 배우면 안 그래도 강했던 전투력이 더 무시무시하게 변한다.

멸망으로부터 세계를 구하려면 S랭크 헌터들에게 하루빨리 무공을 가르쳐야 했기에 그녀의 합류는 더더욱 기꺼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합류하면 진수호 길드장도 무공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할 테니 말이다.

“저, 그러면 이제부터 박한새 교관님한테 무공을 배울 수 있는 건가요?”

“예?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진세희 헌터님은 초급반이니, 초급반 교관들에게 무공을 배우게 될 겁니다.”

“초급반이란 것도 있었어요?”

“이번에 새로 신설되었습니다.”

기초반, 초급반, 심화반.

무공 아카데미 3기는 반을 총 세 개로 나눠 운영할 계획이었다.

심화반은 기존의 멤버 그대로 가고 초급반은 기존의 기초반 멤버들과 새로 합류하는 외부 인사들로 구성된다.

기초반이야 300명의 89기 신입 헌터들로 이루어질 예정이었고 말이다.

“뭐예요. 저는 박한새 교관님한테 배우고 싶어서 무공 아카데미에 온 건데.”

“다른 교관들에게도 배울 점이 많을 겁니다.”

“그래도 실망이에요.”

“심화반에 오고 싶으면 실력을 기르시면 됩니다.”

“실력을 기르면 저도 박한새 교관님한테 배울 수 있는 건가요?”

“그럼 오래 걸리지 않겠네요. 누구보다 빨리 배워서 심화반으로 치고 올라갈 거예요.”

재능이 뛰어나도 무공이 그리 쉬운 공부가 아닐 텐데….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지만, 겉으로는 웃으며 그녀를 응원해주었다.

파주 동장리.

비무장지대 근처에는 군인이 근무를 서는 초소가 곳곳에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초소 중 한 곳에서 일병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다급한 외침을 토해냈다.

“김민수 병장님! 김민수 병장님!”

“왜 불러?”

“몬스터가 남하하고 있습니다!”

“또?”

일병의 말을 듣고서 김민수라는 이름의 병장은 지긋지긋하단 표정을 지었다.

던전 관리를 포기한 것인지, 북한에서는 던전 브레이크가 수시로 발생하였다.

그리고 그로 인한 피해는 북한 사람뿐만이 아니라, 한국도 같이 보고 있었다.

“헉! 뭐가 저리 많아?”

쌍안경으로 몬스터의 남하를 확인한 김민수 병장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남하하는 몬스터의 숫자가 한눈에 봐도 심상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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