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화
“그래서 박한새 그놈을 그냥 놔두자고?”
루드밀라의 입가는 미소를 그리고 있었지만, 눈은 한기로 가득하였다.
그녀는 박한새에게 일방적으로 당했던 수모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복수하고 말리라.
상처를 치료하면서 그녀는 내심 복수를 다짐하였다.
그런데 정작 여명회의 한국 지부를 책임지는 노인이 복수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니 그녀로선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그냥 놔두자는 게 아니라,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요. 지금 손을 썼다간, 진수호 그자가 개입할 수도 있소.”
“그래봤자 일개 헌터일 뿐이야.”
“그 일개 헌터가 S랭크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겠소?”
“늙은이. 늙은이가 그렇게 겁이 많으니까 한국 지부가 아직도 이 모양 이 꼴인 거야.”
“그래서 늙은이는 어쩌자는 건데? 그냥 지켜보자는 것은 아닐 거잖아?”
“일단 무공이란 것을 연구해볼 생각이오.”
무공 연구.
박한새가 보여준 힘을 생각하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저 고아들을 모은 것도 그거 때문이야?”
“고아들은 계획의 일부일 뿐, 무공을 연구하는 인원은 따로 있소.”
원래의 루드밀라였으면 얼마나 나약하면 그런 것에 의존하냐며 노인의 말에 비웃기 바빴을 것이다.
하지만 루드밀라는 이미 무공의 힘을 몸소 체험한 상태였다.
그래서 오히려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우리도 배울 수 있을 거 같아?”
“모르겠소. 무공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하여 원리조차 해석하지 못하고 있소.”
“늙은이, 진짜 무능하네. 그것도 못 해?”
“어쩔 수 없지 않소. 무공을 배운 인원 자체가 워낙에 적으니.”
그 말을 듣고 루드밀라는 혀를 차며 말했다.
“납치라도 하든가. 교관이라는 자들은 그래도 무공 지식이 많을 거 아니야?”
이정, 신경철, 주현근.
이렇게 세 명은 외부에서도 잘 알려져 있었다.
주현근은 박한새의 첫 번째 제자였고 신경철은 D랭크인데도 B랭크 이상의 무력을 선보였다.
이정이야 처음 측정된 랭크부터 B랭크였으니 유명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해보겠소.”
“뭘 또 고려하겠다는 거야? 그렇게 우유부단하니 뭐가 되는 게 없는 거잖아.”
“박한새를 암살하는 것에 성공했다면 나도 우유부단하게 굴지 않았을 것이오.”
노인이 모처럼 반격하자, 루드밀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쓸데없는 말싸움은 하지 않았다.
“그럼 그냥 방관하겠다는 거야?”
“꼭 우리가 직접 나서서 박한새를 공격할 필요는 없소.”
“한국에서 박한새를 싫어하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소. 기득권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이지. 이이제이라고, 이 둘의 싸움을 유도하면 될 거 같소.”
인간을 이간질하여 서로 싸우게 만드는 것은 여명회가 곧잘 사용하는 전략이었다.
그렇기에 루드밀라도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차면서도 반박하지는 않았다.
“좋아, 이번만은 늙은이 말에 따라주지. 하지만 늙은이, 명심해. 7사도께서 한국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명심하겠소.”
7사도는 여명회에서 중국, 대만, 일본 등을 총괄하는 이였다.
그런 7사도가 한국에 온다면 노인은 완전히 배제되고 말리라.
그러니 7사도가 한국에 더 관심을 보이기 전에 서둘러 세력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형, 아무래도 중급반을 새로 신설해야겠는데요?”
“성취도 차이가 너무 커요. 아직 단전도 못 만드는 교육생이 있는가 하면, 벌써 검기 발현에 성공한 교육생도 있어요.”
무공 아카데미는 현재 이렇게 세 개로 반을 나누어서 운영하고 있었다.
초창기다 보니, 아직은 모든 게 어설퍼서 반을 나누는 기준 또한 애매하기 그지없었다.
사실상 무공 아카데미에 들어온 순서에 따라 반이 나누어진 것이다.
“재능 차이가 확실히 크긴 하지.”
“일부는 심화반의 수준까지 따라잡았다고 봐도 무방해요.”
“진세희, 곽규백, 서동호, 민건우 이렇게 네 사람의 성취가 가장 빠르지?”
“예. 진세희 교육생이 바로 검기 발현에 성공한 교육생이에요.”
벌써 검기 발현에 성공하다니.
확실히 재능이 뛰어나긴 한 거 같았다.
“중급반을 신설하긴 해야겠네.”
지금 같은 체제로 계속 놔두다간, 불만이 쌓이게 될 것이다.
서동호의 경우는 아예 대놓고 자신은 심화반에 들어갈 인재인데 왜 초급반에 있어야 하냐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었고 말이다.
‘교관을 또 뽑아야겠군.’
반을 신설하는 거야 사실 문제 될 게 없었다.
그보다는 교관이 문제였다.
무공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교관을 막 뽑을 수는 없는 일.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신중히 뽑아야 할 거 같았다.
주현근과 함께 복도를 걷는데 우연히 서동호와 마주쳤다.
“사부님!”
무공 아카데미에서 몇몇 이들이 나를 사부라고 부르는데, 서동호도 그런 인물 중의 한 명이었다.
“자습하러 가십니까?”
“그럼 열심히 수련하십시오.”
“사부님,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연수원에서 랭킹 5위 안에 들면 저도 심화반에 들어가면 안 됩니까?”
“왜 심화반에 들어오려고 하시는 겁니까?”
“그야, 사부님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이걸 기뻐해야 할지 안타까워해야 할지….
“서동호 교육생 정도면 심화반은 아니어도 중급반은 들어가실 수 있을 겁니다.”
“중급반이요?”
“단전의 내공을 곧잘 다루는 경지 즉, 이류 무인 수준에 이른 이들을 중급반으로 보낼 계획입니다.”
내가 그리 말했음에도 서동호는 별로 기뻐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에겐 초급반인지, 중급반인지는 중요하지 않은 거 같았다.
“저는 검기를 발현하는 경지에 이르렀는데 이 정도면 중급반이 아니라, 심화반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서동호 교육생. 괜히 억지 부리지 말고 수련하러 가세요.”
“아니, 주현근 교관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제 수준이 심화반과 비교해도 절대 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일리는 있었다.
실력을 갖추었다면 심화반에 들이지 못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좋습니다. 랭킹 1위가 되시면 심화반에 들어오게 해드리겠습니다.”
“랭킹 1위요?”
서동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냐하면, 이번 랭킹 1위는 벌써 ‘역대급 신인’이라 불릴 정도의 실력자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각오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좋습니다! 어차피 권혁진 그놈은 무공도 배우지 못한 놈이니 못 이길 것도 없습니다. 랭킹 1위, 까짓것 해보겠습니다.”
과연 어떻게 될까?
내가 기억하는 권혁진의 실력을 생각하면 서동호에게 승산은 별로 없어 보였다.
권혁진은 미래의 S랭크 헌터가 될 몸이었으니.
‘하지만 서동호의 말처럼 무공의 유무는 절대적이다.’
미래의 서동호 역시 권혁진만큼은 아니지만, 강자로서 꽤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그런 서동호가 무공을 익혔고, 반면 권혁진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상태이니 두 사람의 대결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만약 랭킹 1위가 서동호 교육생이고 그 아래 300위까지 다 무공 아카데미 교육생이면 어떻게 될까요?”
서동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주현근이 불쑥 그 같은 말을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해보았다.
과연 뭐가 바뀔까?
“크게 달라질 것은 없을걸?”
“그런가요?”
“무공을 배우고 싶은 사람이 더 늘어나기는 하겠지. 하지만 이미 대세는 굳혀진 상황이라, 큰 변화라고 보기는 어려워.”
“하긴, 10대 길드에서도 무공을 인정할 정도니 말 다 했죠.”
“A랭크 이상은 아직도 자존심 때문에 무공을 고려하지도 않는 거 같지만, 그 이하 헌터들은 전부 무공을 배우고 싶어 하지.”
“저는 A랭크여도 무공을 배우고 싶을 텐데, 그놈의 자존심이 뭔지 참.”
“아, 그리고 하나 변하는 게 있긴 할 거다.”
“어떤 거죠?”
“앞으로 기득권이 더 공격적으로 나올 것이라는 거.”
여기서 말하는 기득권이란 헌터 협회를 위시한 10대 길드를 말한다.
‘비록 10대 길드 일부에서 무공을 도입하려고 시도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흐름을 거부하려 들겠지.’
오히려 무공의 힘을 인정하였기에 더 공격적으로 나설 가능성이 컸다.
이미 기득권인 그들은 무공이라는 흐름이 만들어지면 얻는 것보다 잃을 게 많다고 여길 것이기 때문이었다.
‘협회야 말할 것도 없지.’
만약에 비각성자가 무공을 익힐 수 없다면 협회도 마냥 적대적으로 나오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공의 창시자로 알려진 나부터가 비각성자였다.
비각성자가 무공을 익힐 수 있다는 말은 헌터라서 가졌던 특혜들을 비각성자 출신의 무인들에게 빼앗길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헌터들의 이권을 추구하는 헌터 협회로선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으리라.
“들었어? 곧 초급반 위로 중급반이 새로 만들어진다던데?”
“중급반이라고? 거기서는 뭘 배우는데?”
“신경철 교관이랑 이정 교관이 중급반으로 올라가는데 거기서 권법이랑 보법 위주로 가르친대.”
어느 날.
무공 아카데미에 하나의 소문이 돌았다.
그 소문이란 다름 아닌, 중급반이 신설된다는 소문이었다.
“신경철 교관님이랑 이정 교관님이라면 무조건 가야지!”
“박한새 교관님은? 심화반처럼 박한새 교관님에게 직접 교육을 받을 수 있어?”
“적어도 초급반보다는 더 많이 볼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해야 중급반으로 갈 수 있는데?”
“실력으로 뽑겠지.”
“내가 듣기로는 무공의 경지로 뽑는다던데?”
“아니야. 연수원 랭킹이 몇 위냐에 따라 갈려질걸?”
누가 교관이 되는지.
또 어떤 기준으로 선정이 되는지.
소문은 꽤나 구체적이었다.
그리고 이 같은 소문이 나돌자, 초급반 교육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열광하였다.
자신이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시간으로 체감하고 있는 게 초급반 교육생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더 많은 배움을 얻을 수 있는 중급반의 등장은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랭킹이 발표되고 홍준기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내가 꼴등이라니.’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8번이나 낙방할 정도로 실력이 낮았던 그다.
랭킹이 낮게 측정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꼴등은 예상 못 했지만 말이다.
“준기야. 너 어떻게 할 거냐?”
“뭘 어떻게 해?”
“순위 안 올릴 거냐고.”
“나? 글쎄. 올리고 싶긴 한데, 방법이 없지 않을까?”
무공 아카데미에서 친해진 동기의 말에 홍준기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하였다.
그러자 동기가 답답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빡치지도 않냐?”
“네 실력이 꼴등일 리 없는데, 꼴등이라잖아!”
“그, 그런가?”
“우리가 누구야. 박한새 교관님에게 무공을 배운 무인이잖아. 네가 꼴등이면 교관님의 명예가 실추되는 거라고.”
“으음.”
홍준기는 마른침을 삼켰다.
스승의 명예가 실추된다니.
그것만큼은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너, 그 소문 못 들었냐?”
“무슨 소문?”
“랭킹에 따라 중급반으로 올라갈지 아니면 초급반에서 유예될지 결정된다는 소문.”
“듣긴 들었는데 그게 진짜일까?”
“박한새 교관님이 새로운 교관을 뽑았다잖아. 왜 뽑았겠어?”
“중급반을 만들기 위해서?”
“그 이유밖에 없다니까.”
동기가 거듭 랭킹을 올려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였다.
그러자 홍준기도 점점 망설임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확실히 지금 실력이라면…….’
무공 아카데미를 다니지 않은 헌터들의 실력만 봐도 그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꼴등에 머물 실력이 아니라는 사실을.
같은 무공 아카데미 동기들이라면 모를까, 무공을 배우지 않은 이들에게는 충분히 그의 실력이 통할 것이었다.
그리고 다행히 연수원에는 능력만 있으면 랭킹을 높일 수 있는 훌륭한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었다.
던전 체험에서 성과를 보이거나.
아니면 다른 헌터들과의 대련을 통하여 랭킹을 높일 수 있었던 것이다.
“최성훈 헌터에게 도전하겠습니다.”
하여 그는 자신보다 무려 100위나 높은 최성훈이라는 헌터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