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화
성연 길드.
군포와 안산, 시흥 등 경기도 서남부에 기반을 둔 성연 길드는 10대 길드의 일원이었다.
오성 길드처럼 S랭크 헌터를 보유하지는 못했으나, 성연 길드에 소속되어 있는 A랭크 헌터는 무려 십수 명이었다.
“이정, 그놈이 내 제안을 거절했다고?”
“어. 무공을 가르쳐줄 생각이 없다던데?”
성연 길드의 부길드장이자, 비공식적으로 성연 길드의 후계자라 불리는 이석우는 동생의 말을 듣고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려고 했더니만.’
원래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던 막냇동생이었다.
아니, 사실 막냇동생으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이정은 그와 다른 어머니를 둔, 사생아였으니까.
그래서 이석우는 이정을 자신의 동생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혐오스러운 존재로 여겼다.
자신과 같은 이씨 성을 쓰는 것조차 불쾌하게 여길 정도로.
만약 이정에게 이용할 가치가 없었다면 그는 극단적인 수를 썼을지도 모른다.
B랭크 헌터인 이정은 성연 길드의 후계자 자리를 위협할 수도 있는 존재였고, 이석우의 성격상 삭초제근하는 게 마음 편했으니까.
하지만 더러운 핏줄이라고만 생각했던 이정에게 이용 가치가 하나 생겼다.
그 이용 가치란 다름 아닌, 무공이었다.
이정은 무공의 창시자인 박한새의 제자였고 심지어 교관이 될 정도로 무공에 대한 이해도가 남달랐다.
‘무공을 가르치는 것이 네놈이 살아있는 유일한 이유였는데, 감히 그런 선택을 했다 이거지?’
이석우는 감히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이정을 떠올리며 이를 갈다가,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네 얼굴은 왜 그러냐?”
이석우가 묻자, 그의 동생이 흠칫하더니 어색한 얼굴로 대답하였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설마 그놈에게 얻어맞은 것은 아니겠지?”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럴 리가 있겠어!?”
과민반응을 하니 더 수상하게 느껴졌다.
정말 이정에게 얻어맞기라도 한 것일까?
하지만 이석우는 고개를 저었다.
‘설마. 이놈이 모자라 보여도, 곧 A랭크가 될 인재인데, 초짜한테 당하지는 않았겠지.’
같은 랭크라고 해도 이정은 헌터가 된 지 1년도 안 된 초짜 중의 초짜였다.
심지어 무공 아카데미인지 뭔지, 무공 수련만 하느라 던전 사냥은 거의 경험도 해보지 못한 상태.
그런 이정에게 동생이 얻어맞았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아무튼, 이정 그놈이 내 제안을 거절했다면, 박한새에게 직접 요구하는 수밖에 없겠어.”
지름길이 있는데 굳이 험한 길을 가는 기분이라서, 귀찮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무공의 위력을 몇 번에 걸쳐 확인하였으니 무공을 배우기는 배워야 했다.
안 그러면 10대 길드에서 도태될 수도 있으니까.
이석우는 바로 박한새에게 연락하여 할 이야기가 있으니 같이 식사하자고 말하였다.
-죄송하지만, 지금은 스케줄이 꽉 차서 따로 약속을 잡을 수 없을 거 같습니다.
단호한 거절을 듣고 이석우는 헛웃음을 흘렸다.
‘감히, 비각성자 따위가 내 초대를 거절해?’
박한새가 눈앞에 없는 게 다행이었다.
순간 표정 관리에 실패하여 분노를 그대로 표출해버렸으니 말이다.
“편한 시간대 말씀해주시죠. 제가 직접 이능관리부 본부로 가겠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수요일 오후에 찾아와주시길 바랍니다.
이석우가 직접 찾아간다고 말했음에도 박한새는 전혀 기뻐하는 내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불청객이 찾아온다는 듯, 귀찮음이 역력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비각성자 주제에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군.’
무공을 배우면 성격이 오만하게 바뀌기라도 하는 것일까?
이정도 그렇고 박한새도 그렇고 하나같이 예의가 없었다.
성연 길드의 이인자라는 자리는 이 나라의 대통령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자리였는데 말이다.
‘짜증 나지만 일단은 숙이는 수밖에 없겠지?’
던전 이변이란 게 발생하면서 무공의 가치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천정부지로 뛰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석우에게 있어 무공이란 마력 운용을 조금 편하게 해주는 잡기술에 불과하였다.
무공이란 것을 직접 경험한 적이 없기에 무공을 낮게 평가했었던 것.
하지만 던전 이변에 대응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무공에 대한 평가를 ‘위급할 때 쓸 수 있는 중요한 기술’로 상향 조정하였다.
그가 지금 무공을 배우려고 안달 난 이유도 바로 그 던전 이변 때문이었고 말이다.
한편 박한새와 적대 관계를 맺었다고 할 수 있는 멸절 길드에서도 무공을 배워야 한다는 여론이 생기고 있었다.
“후우. 내 팀원들이 이리도 겁이 많은 놈들인 줄 몰랐어.”
“왜? 윤 팀장, 자네 길드에서도 팀원들이 던전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고 있나?”
“그나마 던전에 들어가기는 하는데, 겁쟁이마냥 찔끔찔끔 움직이고 있어!”
“그 정도면 용감한 거지. 우리 팀은 아예 던전에 들어가지도 않는다고!”
여론이 바뀐 이유야 간단하였다.
헌터를 무력하게 만드는 마력 간섭 현상이 길드원 전체를 공포에 몰아넣었기 때문이었다.
“오성 길드가 옳았어. 우리도 지금이라도 무공을 배워야 해.”
“하지만 길드장이 무공을 배우려 하겠어? 이능관리부에서 수모를 당했는데?”
“지금 그게 문제야? 길드원들이 던전 사냥을 회피하고 있다고! 당장 하루 매출부터가 급감하는 거 안 보여?”
마력 간섭 현상이 발생하고 나서, 멸절 길드의 수입은 급감하였다.
멸절 길드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길드의 수입이 줄어들었다.
길드의 수입이란, 던전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헌터들이 던전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고 있으니 수입이 줄어드는 것도 당연한 결과였다.
“길드장님, 여론이 좋지 않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안지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반무림 동맹을 결성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됐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역시 무공의 필요성을 외면하지는 않았다.
당장 그도 마력 간섭 현상이라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으니까.
“무공을 힘으로 뺏으면 안 되나?”
“박한새를 협박하자는 말씀입니까?”
“역시 어렵겠지?”
박한새의 무력을 몰랐을 때라면 힘으로 무공을 빼앗으려 했을 것이다.
그는 약자가 보물을 가지고 있다가 누군가에게 그 보물을 빼앗기면 약자의 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박한새는 약자가 아니었다.
A랭크 헌터를 여럿 보유한 화룡파를 단 하루 만에 초토화시킨 것만 봐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박한새는 무력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최채환의 은신처를 단 몇 시간 만에 찾아냈던 그 정보력.
그 정보력 하나만 봐도 박한새를 무시할 수 없었다.
‘애초에 그놈의 제자들부터 심상치 않은 무력을 가지고 있었지.’
김수민.
이름 한 번 들어본 적이 없던 헌터가 그와 자웅을 겨룰 정도의 실력을 보여주었다.
주현근, 이정, 신경철처럼 이름이 알려진 자들의 실력은 어떨까?
무공의 창시자로 알려진 박한새의 실력은?
상황이 이러하니, 안지호로서도 박한새를 무시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일단 다른 길드들이 하는 걸 지켜봐야겠어.”
“하지만 던전 이변에 대응하려면 하루라도 빨리 무공을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던전 이변이 또 발생하란 법이 있나?”
“그건 그렇습니다만.”
“지진이나 태풍처럼 가끔씩 발생하는 자연재해일 수도 있어. 그러니 괜히 호들갑 떨어서 이능관리부에 저자세로 나갈 필요는 없다.”
박한새를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굴복하여 무공을 배우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가 방금 말한 것처럼 마력 간섭 현상이라는 던전 이변이 다시 발생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급하게 행동할 필요는 없으리라.
“박한새 교관님, 다음 기수 모집은 언제로 계획 중입니까?”
“빠른 시일 내에 모집할 계획이긴 한데, 그건 왜 물으십니까?”
“안 그래도 문의가 많았는데, 이변이 발생한 이후, 문의가 폭주하는 중입니다.”
이재현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나에겐 따로 연락할 수단이 없으니, 애꿎은 이능관리부 공무원들만 고생하는 거 같았다.
“심지어 이제는 다른 나라 헌터들에게도 가입 문의가 오고 있습니다.”
그럴 것이다.
다른 나라라고 마력 간섭 현상으로 피해를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니.
‘이런 상황에서도 무공을 배우지 않으려 하는 국내의 헌터들이 오히려 이상한 거지.’
회귀 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국내의 헌터들은 엉덩이가 어지간히 무거웠다.
멸절이나 볼케이노 길드처럼 아예 연락조차 하지 않는 길드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갈 정도였다.
“상황이 급하다는 건 저도 인식하고 있으니,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다음 기수를 모집하도록 하겠습니다.”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재현과의 대화가 끝난 나는 주현근을 불렀다.
“사부님, 부르셨습니까?”
“둘이 있는 자리인데 편하게 불러.”
“편하게 부르라고 해도 요즘은 사부라고 부르는 게 더 편해진 거 같기도 합니다.”
뒷머리를 긁적이는 주현근의 모습에 나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에게 있어 나는 단순히 무공을 가르쳐준 무공 스승이 아니었다.
무공 스승인 동시에 그의 성좌이기도 했다.
권속이다 보니, 나를 대하는 게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네가 그리 부르는 게 편하다면 편한 대로 불러.”
“알겠습니다. 성좌님이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 저도 경철이처럼 사부라고 부르겠습니다.”
뭔가 썩 즐거운 기분은 아니었다.
의동생을 잃은 기분이랄까.
하지만 내가 성좌라고 밝힌 시점에서 예견된 미래이기도 했다.
“마력 흡수는 어때? 익숙해졌어?”
“예, 이제는 상대의 내공을 단전으로 이끄는 게 어느 정도 가능할 거 같습니다.”
무공은 입으로만 가르칠 수 없었다.
혈도라는 것은, 조금만 잘못 다루어도 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회귀 전, 이성은이라는 S랭크 헌터의 조력자가 있었음에도 무공을 퍼뜨리는 데 시간이 걸렸던 것도 혈도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력 흡수라는 스킬이 있는 한, 입문자를 빠르게 늘릴 수 있겠지.’
나 한 명이 반년 동안 800명이 넘는 무공 사용자를 만들어냈다.
만약 마력 흡수라는 스킬이 없었다면 나도 이 정도의 성과를 보는 게 불가능했을 것이다.
내 마력 감응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한계는 있었으니까.
어쨌든 이제 주현근도 마력 흡수를 보유하게 되었고, 또 다른 권속인 고정희도 마력 흡수를 보유하게 되었으니 더 많은 무공 사용자를 길러낼 수 있을 여건이 만들어졌다.
“연수원에 갈 준비 해.”
“예? 연수원 말입니까?”
“이재현 차관이 요청하였다. 연수생들에게 기초적인 무공이라도 가르쳐달라 하더군.”
연수원에서 무공을 가르치는 것은 나 역시 찬성하는 일이었다.
적어도 새로이 헌터가 된 이들만큼은 무공 사용자가 되는 것이었으니까.
“몇 달 전에는 연수생이었던 제가 연수원 교관이 된다니, 뭔가 기분이 묘합니다.”
“실력 면에서도 네가 다른 교관들을 압도하잖아? 이상하게 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경험이 아무리 중요해도 실력만큼 중요할까?
B랭크 이상의 실력을 가진 주현근을 무시할 사람은 적어도 연수원에선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무공을 사용하는 연수생들의 활약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만큼, 열렬히 환영하지 않을까 싶다.
“사부님, 성연 길드의 부길드장이라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때, 신경철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그 같은 말을 전해주었다.
‘이석우라. 그놈이 과연 어떤 식으로 나를 대할지 궁금하군.’
회귀 전의 이석우를 떠올리며 나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