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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대신 회귀함-82화 (82/275)

#082화

“fermati!”

로렌초란 이름의 느끼한 이탈리아 남자가 갑자기 뭐라고 외치자, 정호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쟤 뭐라는 거야?”

“멈추자고 합니다.”

“또 멈추자고? 아니 무슨 소풍 온 것도 아니고.”

그녀는 여러모로 이 이탈리아 사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느끼하게 생긴 외모도 외모지만, 레이드를 장난처럼 여기는 그의 태도가 특히 별로였다.

‘그리 강해 보이지도 않는데.’

사내는 분명, 국제헌터 협회가 인정하는 S랭크 헌터였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인도네시아의 7성급 던전에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 사내가 S랭크 헌터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호연으로선 아무리 봐도 로렌초란 사내가 자신보다 약하게 느껴졌다.

“Qual è il tuo nome?”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로렌초는 정호연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호감을 보이더니, 그녀의 외모에 반하기라도 한 거 같았다.

하지만 로렌초의 이 같은 작업질에 정호연은 오히려 화가 났다.

던전 보스를 두고 다른 길드들과 경쟁하는 상황에서 쓸데없는 행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망할 놈이!”

“지, 진정하십시오.”

“그냥 이놈 버려두고 우리끼리 가면 안 돼?”

“S랭크 헌터 없이 다른 길드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정호연은 이를 갈았다.

이럴 때는 길드에 S랭크 헌터가 없다는 게 서러웠다.

S랭크 헌터만 있었다면 로렌초 같은 이와 함께 던전에 들어올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

구우우우우!

마치 지진이 발생한 것처럼, 땅이 울리기 시작하였다.

“Che peccato! Accidenti!”

느글거리는 목소리로 정호연에게 계속 말을 걸던 로렌초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역력하였다.

땅이 울리고 있는 지금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이건?”

“예, 던전 이변의 징조인 거 같습니다.”

정호연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른 헌터들에겐 최악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던전 이변이라 불리는 마력 간섭 현상이 발생한다면 대부분의 헌터는 무방비 상태에 빠져드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마력 간섭 현상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박한새에게 배운 무공만 있으면, 다른 헌터들처럼 마력 간섭 현상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도 알았다.

‘두려워할 게 아니라 오히려 기회로 여겨야지.’

이변이 본격적으로 발생하였다.

정호연은 물론이고, 로렌초와 다른 헌터들의 신체 내부에 무언가가 침입하였다.

그 무언가는 헌터의 마력 운용을 방해하였는데, S랭크 헌터인 로렌초조차 그 무언가를 막지 못했는지 비명을 질렀다.

실제로 고통은 없겠지만, 몬스터가 발생하면 무방비 상태로 당할 게 뻔했으니, 두려움을 느끼고 비명을 지르는 것이다.

“역시 S랭크 헌터도 마력 간섭 현상을 막지 못하는 건가?”

“듣기로는 실력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던데, 로렌초는 S랭크 중에서도 최하위인 듯싶습니다.”

화영 길드 간부가 태연한 기색으로 그같이 말하였다.

정호연이 그러하듯, 그 역시 무공을 익힌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공을 익혔다는 말은 마력 간섭 현상에 저항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였다.

“딱 그래 보였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끼리 가자.”

“로렌초를 버리자는 말씀입니까?”

“저 상태로는 스킬도 못 쓸 거 아니야?”

주변은 확실하게 정리하였다.

무방비 상태가 된 로렌초가 위협을 받을 일은 없을 터.

그러니 굳이 로렌초를 챙겨서 갈 필요는 없으리라.

“저희끼리 가능하겠습니까?”

“왜, 못 할 거 같아?”

정호연이 당당한 기색으로 묻자, 간부는 잠시 고민하였다.

다른 몬스터도 아니고 무려 7성급 던전의 보스였다.

과연 화영 길드의 힘만으로 레이드에 성공할 수 있을까?

‘지금의 힘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무공이 없었다면 어림도 없었을 일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무공을 익힌 상태였다.

이미 그는 랭크가 같은 A랭크 헌터를 손쉽게 깨부순 전적이 있었다.

검기까지 익힌 정호연은 그보다 훨씬 강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말이다.

“해봅시다!”

“흐흐, 저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와, 7성급 던전 보스를 아무런 견제도 받지 않고 사냥할 수 있다니. 이거, 던전이 우리를 도와주는데요?”

“던전이 도와주는 게 아니라, 박한새 사부가 도와주는 거지!”

화영 길드의 헌터들은 하나같이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베테랑 헌터인 그들이 자만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들이 보이는 자신감은 어디까지나 실력에서 비롯되는 자신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근자감이 아니었다는 걸 한 방에 증명하였다.

다른 외국의 헌터들이 마력 간섭 현상으로 패닉 상태에 빠졌을 때, 단독으로 7성급 던전 보스를 레이드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S랭크 헌터가 참가하지 않고서 7성급 던전 보스를 사냥하는 데 성공한 사례는 이번이 세계 최초였다.

던전 이변이 발생한 이후, 10대 길드들과 최소 한 번 이상씩 만남을 가졌다.

길드장이 직접 찾아오는 경우는 레이븐이나 오성 말고는 없었다.

하지만 새벽 길드처럼 무공을 낮게 평가하는 길드에서도 후계자나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간부가 나를 찾아왔다.

그 정도로 10대 길드는 던전 이변이란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멸절 길드에서 10대 길드의 길드장을 불러서 길드장 회의를 했다고 합니다.”

“회의 내용이 뭐랍니까?”

“박한새 교관님이 듣기에 조금 황당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무공 독점에 대해 제재 여부를 논하는 회의였습니다.”

10대 길드와의 접촉이 꼭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10대 길드가 원하는 것은 내가 자신들에게 무공을 바치는 것이었다.

그들은 내가 자의적으로 제자를 뽑는 것에 거부감을 내비쳤다.

나의 영향력을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어떻습니까?”

“반반이라고 합니다.”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만든 무공을 저들이 독점이라느니, 제재한다느니 떠들어대는 게.

심지어 그런 말도 안 되는 논리를 절반이나 찬성한다는 것도 우습기 짝이 없었다.

“새벽, 멸절, 볼케이노, 낙원, 성연. 이렇게 다섯 길드가 제재에 찬성했습니다.”

결코 우습게 여길 상황이 아니었다.

10대 길드는 하나하나가 막강한 무력을 갖춘 길드였다.

그런 길드 다섯 곳과 반쯤 적대 관계가 되었으니, 그 여파는 상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 무공 아카데미 때문에 10대 길드 전체와 적대하게 되는 거 아니야?”

“제길, 안 그래도 요즘 비협조적으로 굴더니만, 그게 다 무공 아카데미 때문이었나 보군.”

이능관리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반무림 세력이 생기면서 가장 피해를 보는 게 이능관리부였기 때문이다.

“한새 씨. 한새 씨가 몇 가지만 양보하면 10대 길드 전체가 한새 씨의 편이 될 거예요.”

어느 날, 반무림 세력과 나 사이를 중재하겠다며 10대 길드 중 한 곳인 세이서 길드에서 길드장이 찾아왔다.

유지은.

그녀는 외모만 봤을 때, 10대 길드의 길드장이란 직함이 무척이나 어색하게 느껴졌다.

겨우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앳된 외모였으니까.

하지만 실제 나이로 보나, 경륜으로 보나 그녀는 10대 길드의 길드장에 더할 나위 없이 걸맞은 인재였다.

S랭크에 근접한 실력을 가졌던 것이다.

“무엇을 양보하라는 겁니까?”

“다음 기수, 500명 뽑는다고 하셨죠?”

“예. 500명이 현재로선 소화할 수 있는 최대 인원입니다.”

“그럼 그 500명, 10대 길드에서만 뽑아주세요. 500명이니 각 길드에서 50명씩 뽑으면 될 거예요.”

10대 길드가 내게 품은 가장 큰 불만은 무공을 배울 수 있는 권리가 어디까지나 내 아량에 달려있다는 점이었다.

비각성자에 불과한 내가 무공이란 독점 기술로 헌터 업계를 좌지우지하려 드는 것.

기득권인 10대 길드로서는 불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거다.

그러니 힘을 모아서 나를 제재해야 한다는 소리를 해대는 거겠지.

“그건 어려울 거 같습니다.”

“도대체 이유가 뭐죠?”

“무공의 재능을 가진 인재가 10대 길드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0대 길드에 소속된 헌터들은 거의 다 C랭크가 넘어요. 그런데도 10대 길드의 헌터들이 재능이 없을 거로 생각하세요?”

“헌터의 재능과 무공의 재능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녀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10대 길드의 압박은 두렵지 않았다.

그러니 그들의 협박에 굴복하여 무공을 10대 길드가 독점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호호호, 한새 씨는 범인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야망을 가지신 거 같네요.”

야망이라.

그녀는 내게 이상한 오해를 하는 거 같았다.

아마 내가 무공을 가지고 헌터 업계를 좌지우지한다는, 그런 오해가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유지은만이 이 같은 오해를 하는 것이 아닌 듯, 헌터 업계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그거 들었어? 무공 아카데미 다음 기수는 비각성자만 뽑는대.”

“비각성자만 뽑는다고? 아니, 헌터는 안 뽑고?”

“박한새가 헌터들은 말을 잘 안 듣는다면서 자신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따를 비각성자만 뽑을 거라던데?”

“헐, 그렇게 되면 우리는 무공 못 배우는 거야?”

“언젠가 배우게 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 차례까지 오려면 한참 걸리겠지.”

“미친, 던전도 안 들어가는 비각성자에게 무공을 가르쳐서 뭐 한다고?”

“무공의 창시자에게 그게 중요하겠어? 말 잘 듣는 비각성자 세력 키워서 무림 협회 같은 거 만드는 게 훨씬 낫지.”

“허, 그러면 헌터 협회와 비슷한 권력 집단이 생기는 건가.”

“헌터 협회보다 훨씬 세지 않을까?”

나는 이 같은 소문을 듣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비각성자에게만 무공을 가르칠 거라니.

내가 그런 알량한 권력욕을 가진 사람이라면, 무공을 이런 식으로 퍼뜨리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협회만 지금의 상황을 반기겠군.”

헌터 협회에서 비공식적으로 10대 길드를 불러 모았다.

다시금 나를 향한 제재를 논의하기 위함인데, 협회까지 나섰으니 찬반에서 찬성 쪽이 더 앞설 가능성이 컸다.

“박한새 교관님, 지금이라도 세이서 길드장의 제안을 받아주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다음 기수의 교육생을 10대 길드에서만 뽑으라는 말입니까?”

“어차피 10대 길드의 헌터들이라면 재능은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이재현 차관이 우려의 목소리로 그같이 말하였다.

그 역시도 내가 헌터 기득권 전체와 적대하는 것이 걱정스러웠던 모양이다.

나는 그런 이재현 차관에게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곧 10대 길드는 나를 적대하기는커녕 어떻게든 나의 환심을 사려고 할 것이었다.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두 번째 이변은 첫 번째 이변이 발생하고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서 재발했었지.’

헌터 기득권이 나를 상대로 당당하게 나올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마력 간섭 현상이라는 게 한 번 발생하고 다시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즉, 던전 이변을 자연재해처럼 아주 가끔씩 일어나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완전히 틀렸다.

“사부님, 지금 던전 이변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내 예상대로 첫 번째 이변이 발생하고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다시금 이변이 발생하였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이번에도 무수히 많은 피해자가 생겨났다.

대부분의 헌터가 마력 간섭 현상에 대비하지 않고 던전에 들어갔으니, 피해자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피해가 큰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 영향력으로는 한국의 피해를 줄이는 것만이 한계였으니까.

‘하지만 두 번의 이변을 통해서 무공의 가치는 확실하게 증명됐다.’

한 번은 우연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변이 두 번이나 발생한 이상, 헌터들은 던전 이변이 또다시 발생할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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