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화
레이드를 준비하던 B랭크 헌터가 동료 헌터에게 물었다.
“기자회견은 봤지?”
“무슨 기자회견?”
“박한새 말이야. 박한새. 이번에 기자회견 했다잖아.”
“뭐 대단한 놈이라고 기자회견까지 챙겨 봐?”
“나도 그래서 직접 보지는 않았는데, 주변에서 이야기해주더라고.”
그 말에 관심 없는 척하던 동료가 귀를 쫑긋 세우며 물었다.
“그 박한새라는 놈이 뭐라고 지껄였대? 우리 길드원도 받아준다고 해?”
“10대 길드라고 더 챙겨줄 생각 없다더라.”
“…그 새끼가 진짜 그렇게 말했어?”
“자신은 오직 실력으로만 제자를 뽑는다면서 10대 길드라고 챙겨줄 생각 없다던데?”
“진짜 미친 새끼네.”
동료는 혀를 내둘렀다.
10대 길드를 이렇게까지 무시하는 한국인은 박한새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었다.
“간부들은 박한새 그놈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줘야 한다던데?”
“당연히 그래야지. 감히 볼케이노 길드를 무시하게 둘 수는 없지.”
하지만 그들은 그리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직 신청 기간이 안 끝났지? 레이드 끝나면 바로 신청해야겠군.’
‘지금 길드가 중요해? B랭크 오르고 던전에 들어가는 게 쫄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저 빌어먹을 던전 이변만 해결할 수 있다면 그깟 길드쯤이야!’
대부분의 헌터는 이들과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
10대 길드의 지도층이야 박한새를 제재해야 한다고 떠들지만, 막상 헌터들의 의견은 그렇지 않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박한새와 그리 관계가 좋지 않았던 성연 길드에서도 두 번째 던전 이변이 발생한 뒤로 여론이 확 바뀌었다.
보다 적극적으로 무공을 도입해야 한다는 쪽으로 여론이 돌아선 것이다.
그리고 성연 길드에서 가장 공격적으로 무공을 도입하려는 사람이 바로 부길드장인 이석우였다.
‘박한새, 그놈이 아무리 대단해도 B랭크 헌터를 안 뽑을 수 있겠어?’
성연 길드에서 무려 30명의 B랭크 헌터가 무공 아카데미에 가입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30명이면 10대 길드 중에서도 B랭크 헌터 비율이 가장 높았다.
이석우의 의도는 간단하였다.
B랭크 헌터들이 가입 신청을 한다?
인재를 찾는 박한새 입장에선 절대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무공의 재능이란 것도 결국 헌터 랭크와 크게 연관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하는 그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로렌초가 무공 아카데미에 가입 신청을 했다고?”
이탈리아 헌터, 로렌초.
S랭크 헌터로 유명한 그가 무공 아카데미에 가입을 신청했다는 소식이었다.
얼마 뒤, 더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뭐? S랭크 헌터를 떨어뜨렸다고?”
“예, 로렌초가 무공 아카데미에 가입을 신청했다가 거부당했다고 합니다.”
S랭크 헌터가 자존심을 굽히고 비각성자에게 무언가를 배우려 한다는 것부터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멸절 길드의 A랭크 헌터들만 봐도 자존심을 굽힐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으니.
그런데 그 비각성자는 S랭크 헌터를 거절하였다.
“이, 이유가 뭐라던가?”
“한국어를 할 줄 몰라서 거절당했다고 합니다.”
“겨우 그딴 이유로 S랭크 헌터를 거절했다고? 박한새, 그놈 미친 거 아니야?”
“자존심인지, 고집인지 모르겠지만, 어지간한 S랭크 헌터보다 에고가 강한 거 같습니다.”
이걸 단순히 에고가 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제기랄. 이러면 우리 길드원들도 받아주지 않을 수 있다는 거잖아?’
B랭크 헌터라면 무조건 받아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S랭크 헌터가 거절당한 시점에서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풍성한 콧수염과 목에 찬 금목걸이가 인상적인 이탈리아 남성이 허공에다 의문의 손짓을 하였다.
마치 그림을 그리는 듯한 동작이었는데, 그가 손짓할 때마다 정면의 동양 여성이 뛰었다가 멈추기를 반복하였다.
“이게 아니야!”
그러다 사내가 손을 멈추자, 동양 여성이 갑자기 지우개로 지운 듯 사라졌다.
동양 여성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며 이탈리아 남성은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분명 머릿속에 있는데 왜 그 아름다운 움직임을 구현할 수 없단 말인가!’
남성의 이름은 로렌초 알비치.
이탈리아에서 다섯 명밖에 없는 S랭크 헌터 중 일인이었다.
흔히 지중해의 화가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는데, 그가 스킬을 쓸 때마다 늘 그림을 그리듯 손짓하여 생긴 별명이었다.
로렌초는 다시 허공에 손짓을 해보았다.
그러자 사라졌던 동양 여성, 정호연이 로렌초의 눈앞에 나타났다.
정호연은 아까 그랬듯, 뛰었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며 검을 휘둘렀다.
잠시 정호연의 모습을 지켜보던 로렌초는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입술을 깨물고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무공이라 했던가. 아무래도 그걸 배워야겠어.”
머릿속이 영감으로 가득한데, 그 영감을 풀어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영감을 풀어낼 방법이 하나 존재하였다.
그 방법이란 다름 아닌, 무공을 배우는 것.
무공을 배우기만 한다면, 그가 그리는 정호연도 진짜 정호연을 보듯, 자연스럽게 바뀔 것이다.
로렌초는 바로 자신의 매니저를 불렀다.
“한국? 설마 무공을 배우려는 거야?”
“오! 어떻게 내 생각을 알아차렸지? 지금까지 한 번도 내 생각을 알아맞힌 적이 없었으면서!”
“던전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내가 다 아는데, 무공부터 떠올리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그리고 지금 무공이란 게 얼마나 유명한데?”
“유명하다고? 오오, 얼마나?”
“세계의 헌터 절반 이상은 들어봤을 정도일걸?”
그 말을 듣고 로렌초는 크게 놀랐다.
던전 이변 속에서도 자유롭게 움직이던 정호연의 모습이 대단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설마 무공이란 게 그 정도로 화제가 됐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무튼, 로렌초가 무공을 배우고 싶어 한다고 그쪽에다 전하면 되는 거지?”
“정중하게! 나는 어디까지나 배우는 입장이니까!”
아름다운 동양 여성, 정호연의 스승이 있는 곳이었다.
로렌초 역시 제자가 될 입장이니 예의를 갖추지 않을 수 없었다.
“로렌초!”
“한국에서 연락이 온 거야? 언제 가면 되는 거지?”
“거, 거절당했어.”
“나를 거절했다고!? 맘마미아(세상에, 맙소사)!”
S랭크 헌터인 자신을 거절하다니?
미국에서 수십억 달러를 제안하며 영입하려던 것이 자신이건만!
하지만 그대로 포기할 로렌초가 아니었다.
“한국행 비행기를 잡아줘.”
“무슨 짓을 하려고?”
매니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로렌초의 성격을 알기에 걱정할 수밖에 없으리라.
“면전에서도 나를 거부할 수 있는지 확인해야겠어!”
기자회견을 한 이후, 10대 길드에서 나를 찾는 횟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멸절 길드의 간부가 접견을 신청하였습니다.”
“바쁘다고 전해주세요.”
10대 길드의 간부쯤 되면 엉덩이가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돈이면 돈, 명예면 명예, 권력이면 권력.
뭐 하나 부족할 게 없는 자리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이들이 평소에는 거들떠도 보지 않던 이능관리부를 바쁘게 찾았다.
무공을 배우지 않으면 도태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그나마 최후의 자존심 때문인지 길드장들이 직접 오지는 않는군.’
세이서 길드를 보고도 길드장이 직접 움직인 경우는 없었다.
여전히 유지은 길드장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늦게나마 자존심을 굽혔다면 자리가 남아있을 수 있었겠지만…, 이미 막차는 떠났다.’
합격자는 거의 다 정해진 상태였다.
뒤늦게 신청한다고 한들, 받아줄 수는 없었다.
제아무리 10대 길드라고 해도 말이다.
“공지 올려주세요. 더는 신청 안 받겠다고.”
이능관리부 사이트에다 공지를 올리니 나를 찾는 이들이 더 늘어났다.
아마 지금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기분이지 않을까 싶었다.
세이서 길드는 무려 30명의 합격자가 정해진 상태인데 그들은 10명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성연 길드의 부길드장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다급한 마음에 성연 길드에서는 길드의 이인자인 부길드장이 직접 찾아왔다.
‘일단 이야기는 들어볼까?’
10대 길드 중 한 곳인 성연 길드의 후계자란 사람이 직접 찾아왔는데 안 만나볼 수는 없는 일.
나는 성연 길드의 후계자인 이석우를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전에는 A랭크 헌터를 여럿 끌고 오더니 오늘은 비서로 보이는 이 한 명만 대동하였다.
무력시위가 통할 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모양이었다.
“말씀하십시오.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합격자 명단은 다 정해졌는지요?”
“예, 정해졌습니다.”
“그렇다면 그 합격자 명단에 성연 길드의 길드원은 몇 명이 포함되어 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성연 길드의 길드원이라. 저는 딱히 길드를 보고 뽑은 게 아니라서 명단을 검색해봐야겠습니다.”
휴대폰을 꺼내서 합격자 명단을 대충 훑어보았다.
이전에 확인했던 대로 성연 길드 소속의 헌터는 몇 명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성연 길드가 신청서를 제출하기 시작한 시점에 이미 ‘네임드’라 할 수 있는 헌터들을 합격자 명단에 포함시켰었다.
재능이 비슷하다면 당연히 먼저 신청한 사람을 앞 순위에 둘 수밖에 없는 법.
그런 면에서 성연, 새벽, 멸절, 볼케이노, 낙원 등은 불리한 편이었다.
“총 세 명입니다.”
“겨우 세 명? 성연 길드에 인재가 그것밖에 없다고요?”
총원 오백 명 중, 고작 세 명이라니.
이석우가 눈에 쌍심지를 켠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재를 보는 눈은 무공을 창시한 제가 가장 정확합니다.”
으드득!
“정녕, 성연 길드와 척을 지려 하시는지요?”
“전 누군가를 적으로 삼을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와 적이 되는 것을 피할 생각도 없습니다. 설령 그게 10대 길드라고 해도 말입니다.”
이석우가 분노로 가득한 눈으로 나를 노려봤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A랭크 헌터를 여럿 데려왔을 때도 기세 싸움에서 밀렸는데 혼자 온 지금 나를 상대로 기세 싸움을 벌일 수도 없는 일이니까.
“10대 길드를 우습게 본 일은 곧 후회하게 될 겁니다.”
이를 갈며 그리 말한 이석우는 그대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석우는 씩씩거리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띵동.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안으로 들어왔다.
“유지은 길드장님 아니십니까?”
“오랜만이네요.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설마, 한새 씨 만나고 오셨어요?”
“예. 방금 그놈, 만나고 왔는데 아주 수모를 당했습니다.”
“수모요?”
“사람들이 조금 인정해주니 10대 길드를 아주 개무시하더군요. 아무래도 안지호 길드장의 말이 맞는 거 같습니다. 힘을 모아 그 박한새라는 놈을 제재해야 합니다.”
이석우는 도저히 박한새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성연 길드의 후계자인 그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같은 10대 길드 사람이거나, S랭크 헌터뿐이었다.
그런데 박한새는 그 둘 중 무엇도 아니었다.
“제재라고요? 글쎄요, 어떻게 제자가 스승을 핍박할 수 있을까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 무공 배우기로 했거든요.”
“길드원들을 배우게 시킨 것도 아니고, 길드장님이 직접 무공을 배운단 말씀입니까?”
놀란 그를 보고 유지은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것만 알아두세요. 저는 10대 길드 전체와 한새 씨를 두고 선택하라고 하면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한새 씨를 선택할 것이라는 사실을.”
“아마 이런 선택을 할 게 10대 길드에서 저뿐만이 아닐 거예요. 그러니, 이석우 부길드장. 한새 씨에게 선을 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시대가 바뀌었으니 말이죠.”
그 말에 이석우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아연한 표정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