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8화
“어서 오십시오.”
내가 환영해주니, 유지은이 방긋 웃었다.
“잘 지내셨어요?”
“저는 똑같이 지냈습니다.”
“재미없는 대답이에요, 그거.”
“앉으시죠.”
유지은이 픽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방금 제가 엘리베이터에서 누굴 만났는지 아세요?”
“이석우 부길드장 아닙니까?”
“호호, 많이 화났더라고요. 한새 씨에게 수모를 당했다나?”
그새 뒷담을 깐 건가.
“저보고 후회하게 해주겠다고 하더군요.”
“한심한 양반이네요. 누가 누굴 후회하게 해주겠다는 건지. 저한테도 한새 씨 제재해야 한다고 막 꼬드기더라고요.”
“제가 그 양반에게 뭐라고 했는지 안 궁금하세요?”
“뭐라고 하셨습니까?”
“10대 길드 전체보다 한새 씨가 훨씬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했어요. 어때요, 멋있죠?”
유지은이 장난스럽게 으스대는 표정을 지었다.
“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유지은 길드장님은 저를 높게 평가하시는 거 같습니다.”
“당연하죠. 제가 왜 무공을 직접 배우려고 하는데요?”
10대 길드의 길드장이 무공을 배우는 것.
이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아마 이 사실이 알려지면 전국적으로 크게 화제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어쩌면 회귀 전보다 무공이 퍼지는 속도가 조금 더 빨라질 수도 있겠어.’
S랭크 헌터만큼의 파급력을 주는 것이 10대 길드의 길드장이란 위치였다.
그녀가 무공을 배우기 시작하면 10대 길드에서도 더 적극적으로 무공을 도입하려고 할 수밖에 없으리라.
“근데 그거 아세요? 지금 세간에서 저희를 어떤 관계라고 떠들어대는지?”
유지은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을 하며 그같이 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 같습니다.”
“차라리 이러는 건 어때요? 진짜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되어보는 거죠.”
그녀가 갑자기 내 손목을 잡더니 내 쪽으로 몸을 기댔다.
그리고 마침 그때 집무실 문이 열리더니, 김민경이 안으로 들어왔다.
“사부님, 태극권과 관련해서 문의를 드리고 싶은 게….”
말을 하던 김민경은 놀란 눈으로 나와 유지은의 모습을 바라봤다.
유지은은 나에게 꼭 붙은 자세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 김민경의 눈에는 남녀가 애정 행각을 한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싶었다.
역시나.
김민경은 화들짝 놀라서는 그대로 문을 쾅 닫고 사라졌다.
“혹시 저분과는 무슨 관계세요?”
“스승과 제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리고….”
나는 유지은의 손을 손목에서 떼었다.
그리고 손목을 타고 올라오는 유지은의 마력도 탈탈 털어내고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유지은 길드장과의 관계도 저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와, 저 차인 건가요?”
유지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이렇게까지 냉정한 반응을 보일 줄은 상상도 못 했으리라.
하지만 나는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짓든 신경 쓰지 않았다.
회귀 전의 경험으로 그녀가 어떤 인물인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더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많았었는데…. 다음에 해야겠네요. 한새 씨를 찾아뵈려면 만나야 할 이유가 꼭 필요할 거 같으니까.”
그녀는 혀를 날름거리며 입술을 핥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무공을 배우기 시작하면 자주 볼 수밖에 없으면서.’
유지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종잡을 수 없는 건, 역시 회귀 전과 전혀 다를 게 없는 거 같았다.
-너의 능력이 전혀 통하지 않더군.
“그러게요.”
-그 사내를 유혹하려면 쉽지 않을 거야.
귓가에 들리는 성좌의 목소리를 듣고 유지은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더 재미있을 거 같아요.”
지금까지 어떤 남자도 그녀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였다.
심지어 S랭크 헌터까지도.
그렇기에 그녀는 퉁명스럽기 그지없는 박한새의 반응을 봤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박한새를 보고 더욱더 승부욕을 불태우는 그녀였다.
-그 사내를 유혹하는 이유가 재미 때문이 아니란 걸 알아둬라.
“그럼요. 그린스킨, 그 무식한 돼지 놈들을 견제하기 위해 한새 씨의 힘을 빌리려는 건데요.”
유지은이 아무런 이유 없이 박한새에게 호의를 보인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박한새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기에 호의를 보이는 것이었다.
‘그린스킨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노리고 있어.’
그린스킨.
한국에서는 그리 인기 있는 길드가 아니었다.
길드원의 수도 그리 많지 않았고 방송 쪽으로는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사업을 하지 않는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설령 10대 길드라고 해도 그린스킨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린스킨에는 S랭크 헌터가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 사내의 힘이 필요하다고 해도, 수리산 던전을 그 사내에게 넘겨준 것이 과연 잘한 선택인지 아직도 의문이군.
유지은이 박한새에게 수리산 던전의 소유권을 넘긴 것도 사실 그린스킨 때문이었다.
그린스킨에서 수리산 던전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걱정 마세요. 지금까지 제가 했던 모든 선택이 나중에 가서 찬사를 받았듯, 그 선택 역시 찬사를 받게 될 거예요.”
-꼭 그랬으면 좋겠군.
[무공 아카데미 4기 합격자 명단 떴다!!!]
일반인과 헌터를 막론하고 무공 아카데미 소식은 늘 화제였다.
던전 이변이 발생하고 최근에 4기 신청자까지 받으면서 더욱더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
고대하고 고대하던 합격자 명단이 발표되었다.
신청을 했든, 하지 않았든 사람들은 초미의 관심을 기울이며 합격자 명단을 보았다.
[ㅋㅋㅋ 미쳤네. 영어 이름 왜 이렇게 많음?]
[외국인만 200명이 넘네 ㄷㄷ. 주모~]
[뭔 주모야. ㅅㅂ 외국인 받는 거 아직도 열받는다.]
[무공을 창시한 사람이 외국인들도 가르쳐준다는데 어쩔?]
[와 진짜 유지은도 합격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네 ㅋㅋㅋㅋㅋㅋㅋㅋ]
[ㄹㅇ 10대 길드 길마가 왜 무공 배움?]
[세이서 길드가 전투력은 가장 떨어지잖아?]
[엥? 길드장은 그래도 S랭크급 전투력 가졌다고 평가받지 않았나?]
가장 화제가 된 합격자는 역시 10대 길드의 길드장인 유지은이었다.
랭크도 그녀가 가장 높았고 지위 역시 그녀가 가장 높았다.
모든 면에서 그녀는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로렌초는 없네? S랭크를 진짜 떨어뜨린 건가?]
[천하의 박한새도 S랭크는 감당 못 한다는 거 아님?]
[감당 못 하는 게 아니라, 한국어 못 해서 안 받는다잖아.]
[ㅋㅋㅋ 원칙 존나 잘 지키는 듯. 10대 길드 명단 봐보셈. 5명도 없는 곳 많음.]
[멸절 길드는 아예 없네. ㅁㅊ ㅋㅋㅋㅋ]
[10대 길드가 무섭지도 않나 봄.]
[무서울 게 뭐 있냐. S랭크 헌터도 들어가고 싶어 하는 곳이 무공 아카데미인데.]
‘역시 내 이름은 없네.’
이능관리부 홈페이지에서 합격자 명단을 훑어보던 강충구는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인터넷을 껐다.
[내년까지 존버한다~]
[절정 고수 가즈아~!]
[네가 절정 될 때쯤, 난 바로 화경 고수 될 듯. ㅋㅋㅋㅋ]
[무공의 창시자도 화경이 아닌데 화경 이 ㅈㄹ]
합격자 발표가 끝난 이후에도 커뮤니티 사이트의 유저들은 굉장히 들뜬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박한새가 내년에는 일반인들에게도 무공을 배울 기회를 준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헌터들조차 배우고 싶어도 못 배우는 상황인데 일반인들에게 기회가 주어져도 몇 명이나 배울 수 있을까?’
아마 로또에 당첨될 확률보다 낮지 않을까 싶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무공의 인기는 더해질 터.
전 세계적으로 신청이 빗발칠 텐데, 비각성자는 100명만 뽑혀도 많이 뽑히는 것이 되리라.
당연히 강충구에게 기회가 올 일은 없었다.
‘헌터가 되는 것을 포기했는데 무공을 배우는 것조차 포기를 해야 하다니.’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강충구의 이메일로 메일 하나가 왔다.
본인이 ‘박한새’라고 주장하는 이의 메일이었다.
몇 날 몇 시까지 이능관리부로 와달라는 내용이 적힌 메일을 보고 강충구는 한참이나 멍 때렸다.
‘스팸이겠지? 근데 스팸이면 왜 이능관리부로 오라고 하는 거지?’
무시할까?
아니면 속는 셈 치고 가볼까?
강충구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결정을 내렸다.
일단 가보기로.
설령 가서 망신을 당하더라도 일단 가보는 게 후회는 없으리라.
그렇게 메일에 적혀있는 약속 날짜 당일이 되자 강충구는 2시간 전에 미리 출발하였다.
“강충구 씨요? 아, 여기 있네요.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1층 로비 직원이 자연스럽게 안내하는 모습을 보고 강충구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이름을 확인했는데도 내쫓지 않았다.
그 말은 자신에게 온 메일이 적어도 스팸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의미하였다.
‘정말 박한새가 나를 불렀다는 거야?’
하지만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그 박한새가 무슨 이유로 자신을 부른 것인지는 아직 모르기 때문이었다.
로비 직원의 안내를 받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강충구는 숨을 가다듬었다.
과연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그는 메일을 받은 당일부터 짰던 계획을 머릿속으로 다시 점검해보았다.
박한새가 무공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 어떤 대답을 할지.
헌터를 사칭한 것을 추궁하면 어떤 변명을 할지.
플랜 A부터 E까지,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수도 없이 점검하였다.
하지만 막상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곳에 내린 그는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상황에 직면하였다.
“봤어? 순식간인데?”
“난 보지도 못했다. 아니, 사람이 어떻게 저리 빨라?”
“저게 보법의 힘이지!”
“S랭크 헌터도 별거 아니네!”
“역시 사부님! 개쩔어.”
그 상황이란 다름 아닌, 무공의 창시자로 알려진 박한새가 외국인 헌터를 마구잡이로 때리는 상황을 말하였다.
합격자 명단을 발표한 이후로 이능관리부 전체가 바쁘게 돌아갔다.
물론 가장 바쁜 것은 실질적으로 교육생을 받아낼 무공 아카데미 교관들이었다.
‘일단 고급반을 따로 신설하여 중급반은 고급반으로 초급반은 중급반으로 보내는 게 낫겠지?’
심화반 교육생들은 이미 무공을 배운 지 꽤 됐고 실력도 좋으니 교관이나 교관을 보조하는 조교 역할을 시키기로 하였다.
그러면 교관 및 조교 인력만 50명에 가까우니 800명 정도는 충분히 통제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물론 단순히 통제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고 그들에게 얼마나 효율적으로 무공을 가르칠지가 중요하였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역시 사람이 늘어나니 공간이 좁게 느껴지네. 빨리 공사가 끝났으면 좋겠군.’
오성 길드에서 송현동의 10만 평 정도 되는 땅을 내게 주었다.
세이서 길드처럼 던전을 줄 수는 없었기에 땅으로 때운 것이었다.
나는 오성 길드에서 받은 10만 평의 땅에 여러 건물들을 세우고 있었다.
기숙사부터 강의실과 각종 운동기구가 들어설 체육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수련장까지.
무공 아카데미를 세울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필, 이렇게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을 때, 나를 귀찮게 하는 존재가 생겨났다.
“로렌초 헌터께서, 보법이란 것은 어떻게 해야 펼칠 수 있는지 궁금해하십니다.”
S랭크 헌터라서 쫓아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문제는 로렌초란 사내가 집요하기 그지없다는 점이었다.
‘내가 퉁명스럽게 대하는데도 집요하게 굴다니. 여느 S랭크 헌터와는 성격이 딴판인데?’
하지만 통역관을 끼고 대화해야 한다는 점만 봐도 그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 한 명에게만 시간을 할애할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
“무공을 가르쳐드릴 수 없습니다. 무공을 배우고 싶으면 영어든, 한국어든 둘 중 하나는 배우시길 바랍니다.”
통역관을 통하여 내 뜻을 전하자, 이번에는 자신과 대결을 해달라고 이야기하였다.
나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구태여 대결에 응해줄 필요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끈질겼다.
몇 차례 거절했으나, 끈질긴 그를 보며 어쩔 수 없이 대결에 응해주기로 하였다.
물론 대결 결과야 말할 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