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5화
“사부, 저 이번에 오성에서 광고 제안이 왔어요.”
“무공이 대세가 되니까, 광고에 인터뷰에 경호 요청까지. 돈이 되는 제안은 다 오게 되네요.”
김민경의 말에 나는 무심한 목소리로 대꾸하였다.
“다 그런 거는 아닙니다. 광고 제안은 김민경 교관의 미모가 워낙 빼어나서 들어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 말씀 하시면 저 다시 고백해버릴지도 몰라요.”
“취소하겠습니다. 그럼.”
“아니, 그렇다고 취소해달란 말은 아니었거든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쉬십시오.”
“벌써요? 조금 더 있고 싶은데.”
“저는 해야 할 업무가 남아있습니다.”
“바쁘시면 어쩔 수 없죠.”
그렇게 김민경이 문가로 다가갈 때, 강충구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총장님.”
평소에는 사부라고 부르던 강충구지만,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총장이라고 불렀다.
나는 호칭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는 달랐던 모양이다.
“로렌초 헌터가 또 찾아왔습니다.”
강충구의 말을 듣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탈리아의 S랭크 헌터, 로렌초.
그는 정말 집요하기 그지없는 사내였다.
수차례 거절을 당했음에도 계속 무공을 배우려고 시도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럴 시간에 한국어나 더 공부할 것이지.’
나름대로 한국어 공부는 하고 있긴 한 거 같은데, 딴 짓을 너무 많이 하는 거 같았다.
“제가 갈게요.”
“다른 교관들도 한 번씩 로렌초를 상대했잖아요. 이번에는 제가 상대할게요.”
“굳이 상대해줄 필요가 있습니까?”
“저도 S랭크 헌터와 한번 싸워보고 싶어서요.”
원래라면 S랭크 헌터는 절대자나 다를 게 없었다.
모든 헌터가 존경을 마다하지 않는 대상이었던 것.
하지만 무공 아카데미에서는 어느 순간부터 S랭크 헌터의 대우가 예전만 못해진 거 같았다.
‘뭐 일개 비각성자에게도 졌으니 당연한 건가?’
나한테만 진 게 아니었다.
신경철, 김수민, 이정 등등.
로렌초는 교관들에게 연달아 패배하였다.
이러니 김민경도 로렌초를 쉬운 상대로 여기는 것이리라.
“설령 이길 거 같다고 느껴도 정중하게 대해주세요. 상대는 S랭크 헌터이니.”
나에게도 패배하고 교관들에게도 패배한 로렌초지만, 그의 잠재력만큼은 폄하할 수 없었다.
일단 랭크가 높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잠재력은 엄청났다.
아마 로렌초 정도면 지금 가진 마력량만 해도 1갑자는 족히 넘을 것이다.
‘심지어 로렌초는 성좌도 없지.’
성좌의 도움을 받지 않고 S랭크 헌터가 된 경우는 별로 없었다.
헌터로서의 자질 하나만큼은 수준급이라는 의미였다.
“당연하죠. 비록 지금은 저래도 무공만 배우면 언제든 우리를 뛰어넘을 사람인데요. 언제든 절정 고수가 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최대한 예의를 갖출 거예요.”
적당히 예의를 갖추면서 상대해준다면 악감정도 쌓이지 않을 테니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김민경과 강충구가 물러나고 집무실에 홀로 남은 나는 사색에 잠겼다.
‘일단 계획대로 잘되고 있는 거 같긴 한데….’
모든 게 원만하게 잘 돌아가고 있었다.
무공을 익힌 헌터 수만 벌써 800명이 넘은 상황.
워낙 무공에 대한 평가도 좋아져서 여력만 되면 언제든 교육 인원을 늘릴 수 있었다.
자금력도 넉넉하였다.
이능관리부에서 받는 강사료만 해도 천문학적이었다.
나에게 지급되는 강사료가 무려 1,000억이 넘었으니.
거기에 유지은이나 진세희 같은 재력이 넉넉한 일부 교육생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기부하였는데, 이 돈도 무시 못 할 금액이었다.
물론 돈이나 명성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카르마였다.
카르마 수급 또한 원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총 30명의 권속 후보.
원래는 이 중 극히 일부만이 던전에서 사냥하였었다.
대부분이 공무원 헌터였으니 던전에 갈 일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던전 이변으로 인한 피해를 줄이겠다는 명분으로 중급반 교육생들을 던전으로 파견 보내기 시작하자 카르마 수급이 크게 늘었다.
수리산 던전에서 들어오는 카르마 양도 무시 못 할 수준이었고 말이다.
‘문제는 여명회의 성장도 회귀 전의 그것보다 훨씬 빠르다는 점이다.’
나는 DX 길드를 비롯하여 전 세계에 퍼져있는 여명회 휘하 세력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여명회는 철저한 점조직 형태로 회귀 전과 비교하면 그 규모가 크지 않았다.
하지만 던전 이변을 기점으로 최근 들어 그 규모를 크게 키우고 있었다.
처음에는 암흑가 중심으로 세력을 키울 텐데, 한국에서도 DX 길드가 화룡파의 빈자리를 노리는 중이었다.
‘슬슬 정리할 때가 됐어. DX 길드뿐만이 아니라, 일본에서 세력을 뻗치고 있는 여명회 휘하 세력까지도 말이야.’
마침 일본의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치구미에서 접근하였다.
무공을 배우고 싶어서 접근한 것인데, 나는 이들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야마구치구미 역시도 암흑가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하는 여명회가 거슬리는 것은 매한가지일 터.
야쿠자와 손잡는 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이제이라고 이들을 이용하여 일본에서 세력을 뻗치는 여명회의 세력을 제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사실 회귀 전에도 빌런이니, 반군이니, 광신도 집단이니.
여명회와 싸우기 위해 온갖 세력과 손을 잡은 전적이 있었다.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 발버둥 친 결과인데 야쿠자와 잠시 손잡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심지어 그 야쿠자 조직이 나에게 극도의 존경심을 표출하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러했고.
“누구냐.”
한창 사색에 빠져있던 나는 거대한 존재감이 바로 근처에서 느껴지자 눈을 번쩍 떴다.
하지만 눈을 떴음에도 보이는 것은 없었다.
물론 내가 느낀 존재감은 착각이 아니었는지, 중성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후후후, 신기하군요. 어떻게 저의 기척을 알아차린 겁니까?
“누구냐고 물었다.”
-저는 이정 헌터의 성좌, 아우구스라고 합니다. 박한새 님과는 꼭 한번 직접 대화하고 싶었는데 그날이 오늘일 줄은 몰랐군요.
‘아우구스라고?’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성좌가 바로 아우구스였다.
성향은 중립으로 권속에게 분신이란 스킬을 주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근데 아우구스가 어떻게 이곳에 온 거지?’
이정이 근처에 있는 것도 아닌데 아우구스가 내 옆에 왔다는 것은 성좌들이 언제든 나를 몰래 엿볼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비밀이 많은 나로선 껄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회귀자라는 사실과 성좌라는 사실이 다른 성좌들에게 밝혀진다면 성좌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여기엔 어떻게 온 겁니까? 성좌는 권속의 곁에만 있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호오, 역시 박한새 님은 질문부터 특이하시군요. 설마 그런 질문을 하실 줄은 예상 못 했습니다.
“제가 묻는 말에 답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박한새 님의 말처럼 성좌는 보통 권속의 곁에 머물기 마련입니다. 단,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면 꼭 권속의 곁이 아니더라도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상응하는 대가라는 것은 아무래도 카르마를 말하는 거 같았다.
‘내가 모르는 성좌의 기능이 더 있는 것인가?’
아마 그럴 것이다.
카르마 시스템이든, 아니면 다른 기능이든.
모든 게 다 불친절하였다.
던전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도 내가 직접 던전에 들어가려는 시도를 해보고서야 알지 않았던가.
-아무튼, 그건 그렇고 사실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 바로 본론을 말해야 할 거 같습니다.
“본론이 뭡니까?”
-저의 권속이 지금 위기에 처했습니다. 부디 저의 권속을 구해주시길 바랍니다.
“권속이라면, 이정 교관을 말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이정이 위기에 빠졌다는 말을 듣고, 나는 턱 끝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아우구스가 조급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나를 보챘다.
-박한새 님, 제 권속을 구하려면 서둘러서 움직여야 합니다.
“자세한 정보도 주지 않은 채 그저 구하라고만 하면 제가 구하러 가야 합니까?”
함정이면 어쩌려고?
아우구스가 비록 중립 성향이라지만, 그 사실만으로 안심할 수는 없었다.
결국 중립이니, 악이니 성좌의 성향을 정한 것은 우리 인간들이었으니까.
아우구스가 실제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는 뜻이었다.
-흠흠, 급한 나머지 제가 실례를 했군요. 그럼 현재 권속의 상황이 어떤지 중계해드리죠.
그래도 사람들에게 알려진 아우구스의 성향이 마냥 거짓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성좌들의 성격을 생각하면 분노를 토해낼 만한데 정중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면 말이다.
“설마 이자는 노홍만입니까?”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눈앞에 홀로그램 같은 게 떠오르더니, 그 홀로그램에서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두 사람이 혈투를 벌이는 자극적인 영상이었는데, 두 사람 다 내게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당연히 한쪽은 내 제자이기도 한 이정이었고 다른 한쪽은 노홍만이라는 사내였다.
참고로 노홍만은 그린스킨 소속으로 S랭크 헌터이기도 하였다.
‘오래 버티지 못할 거 같군.’
나는 사실 아우구스의 말을 들었을 때, 이정이 위기에 빠졌다는 말을 선뜻 믿지 못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이정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S랭크 헌터인 로렌초도 가볍게 쓰러뜨렸던 것이 이정이었다.
물론 로렌초가 근접전에 약하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지만, 어쨌든 S랭크는 S랭크였다.
분신과 시간 가속이라는 스킬에 검기까지 사용할 줄 아는 이정이라면 어떤 S랭크 헌터에게도 쉽게 밀리지 않으리라.
하지만 상대가 노홍만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린스킨 소속은 하나같이 괴물들밖에 없었으니까.
“좋습니다. 이정 교관은 제 제자이기도 하니 도우러 가겠습니다.”
-후후,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단, 다음에 찾아오실 때는 예고하시고 찾아오시길 바랍니다.”
사실 존재감이 워낙 강렬해서 몰래 엿본다고 해도 바로 알아차릴 거 같기는 했다.
하지만 카르마를 더 써서 아예 존재감까지 감출 수 있었기에 나는 확실하게 말해주었다.
-후후후, 앞으로는 조심하도록 하죠.
뭔가 미묘하게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흘려들으며 창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검 한 자루만 챙긴 채 망설임 없이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어디서 내 모습을 봤는지 비명이 들렸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플라이.’
스킬을 사용하여 하늘에 둥둥 뜬 채, 경공을 펼쳤다.
아마 무협지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이 지금 내 모습을 보면 ‘허공답보’라고 외치지 않을까 싶었다.
이정은 거칠게 입술을 닦았다.
하지만 한번 흘러내린 피는 쉬지 않고 계속 흘러내렸다.
‘그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다니.’
늘 자신감이 넘치던 그였다.
무공을 익힌 상대가 아니라면 누구와 싸워도 지지 않으리라.
그는 상대, 노홍만과 싸우기 전까지는 분명 그리 생각했었다.
“끝인가?”
“끝이라면 비켜라. 그렇지 않으면 죽이겠다.”
이정은 노홍만의 발걸음을 멈춰 세우기 위해 다급하게 분신을 조종하였다.
하지만 그의 분신들은 바닥에 널브러진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즉사에 가까울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기에 더는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있는 한! 이곳은 절대 못 지나간다.”
분신이 움직일 수 없다면 직접 움직일 수밖에.
이정은 큰 부상을 입은 듯, 부자연스러운 발걸음으로 노홍만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뒤로 십수 명의 공무원 헌터들이 결의에 찬 얼굴로 무기를 들고 서 있었다.
죽음을 각오해서라도 던전을 사수하고 말겠다는 결의였다.
하지만 결의만으로 모든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노홍만의 주먹질에 이정은 다급히 피하려 하였지만, 소용없었다.
그가 아무리 빨라도 스킬과 함께 어우러진 노홍만의 주먹질은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거기까지 하십시오.”
마치 히어로 영화의 히어로처럼 박한새는 하늘에서 기적처럼 나타났다.
하지만 이정은 히어로를 보고서도 안심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노홍만은 무공과 상성이 최악인 상대였기 때문이다.
“박한새! 너 혼자서는… 못 이긴다. 검기가 안 통하는 상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