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파롤의 졸개를 처단하십시오! 카르마 +100,000]
마치 기다렸다는 듯 퀘스트가 발생하였다.
‘역시 제니퍼 회장을 죽인 것은 여명회였나?’
회귀라는 경험을 통해 나는 알고 있었다.
국제 헌터 협회에 파롤의 졸개들이 잠입해 있다는 사실을.
그런데 회장의 수행원으로까지 잠입해 있는 것을 보면, 생각했던 것보다 여명회의 장악력이 상당한 듯싶었다.
‘내가 만약 여명회의 손에서 제니퍼 회장을 구해낸다면 이번에는 국제 헌터 협회와의 관계가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는 미스터 박의 행보를 듣고 무척이나 존경심을 느꼈어요.”
제니퍼는 나에게 대뜸 그와 같이 말하였다.
“무공을 독점할 수도 있었는데, 미스터 박은 그러지 않았죠. 덕분에 헌터들은 던전 이변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어요. 전 세계 모든 헌터들을 대신하여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요.”
“감사 인사라니요. 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그리 말했지만, 그녀는 연신 나를 치켜세웠다.
내가 헌터였으면 자신의 자리인 국제 헌터 협회의 회장은 내 것이었다는 식으로 말하기까지 하였다.
‘뭘 요구하려고 이리 거창하게 나를 치켜세우는 거지?’
그녀가 나를 치켜세울수록 오히려 경계심은 올라갔다.
물론 그녀의 눈에 담긴 존경심은 진심처럼 보이긴 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녀 역시 정치인이나 다름없었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공을 배우면 랭크를 몇 단계나 끌어올릴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진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어요. 정확히 어느 정도 강해지는지 알 수 있을까요?”
“사람마다 다릅니다. 다만, 랭크 하나 정도 올리는 것은 누구나 가능합니다.”
“그럼 A랭크 헌터가 S랭크 헌터의 실력을 가지는 것도 가능한가요? 만약 가능하다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나요?”
“가능합니다. 걸리는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A랭크 헌터 정도라면 마력 감응력이 상당할 테니, 길어야 몇 개월일 겁니다.”
내 예상과 달리 그녀는 이것저것 질문만 할 뿐, 나를 압박하거나 무언가를 요구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무공에 대해서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은 거 같았다.
‘제니퍼 회장에게 무공을 가르쳐볼까?’
A랭크인 그녀라면 한국에 있는 동안 단전을 만드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단전만 만들어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는 것에 큰 도움이 되겠지.
“혹시 무공을 배우는 것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관심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럼 저에게 무공을 배워 보시겠습니까?
“예? 이, 이건 뭐죠?”
-놀라지 마십시오. 이건 무공의 일종입니다.
내가 전음을 사용하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워하였다.
-무공을 배우는 것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yes라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하시면 됩니다.
끄덕.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에 찾아가겠습니다.
그녀는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보더니 다시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밤에 찾아오겠다니.
이건 마치 작업을 거는 거 같지 않은가.
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박한새란 인물은 여자에 미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의 행적만 봐도 그랬다.
여자에 미친 사람이라면 비각성자인 것을 숨기고 상위 헌터로서 떵떵거리며 살지 않았을까?
‘만약 허튼수작을 부리려고 하는 거라면 힘으로 제압할 수밖에.’
물론 만약이란 게 있는 법이었다.
그녀가 사람을 잘못 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으니.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제니퍼는 국제 헌터 협회의 수장이란 자리를 절대 공으로 딴 사람이 아니었다.
헌터로서의 실력과 업적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
그렇기에 제니퍼는 박한새가 혹여나 허튼수작을 부린다고 해도 걱정하지 않았다.
다만 이건 제니퍼가 박한새의 무력 수준을 정확히 모르기에 하는 생각이었다.
외국에서는 아직 박한새가 S랭크 헌터들을 연달아 격파한 일을 많고 많은 뜬소문 중 하나로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가 너무 늦은 시간에 찾아온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창가 쪽에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제니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다급히 고개를 돌리니, 창가 쪽에 박한새가 가만히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 어떻게 오셨어요?”
“아까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녁에 오겠다고.”
“하지만 여기는 20층이잖아요.”
박한새가 찾아온다고 했을 때, 당연히 정석적인 방법으로 찾아올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호텔 프런트에도 손님이 올 거라고 미리 전달했었고.
근데 박한새는 상상도 못 한 방식으로 그녀를 찾아왔다.
“무공을 익히면 이 정도의 높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니퍼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박한새는 그런 제니퍼의 표정에 개의치 않은 채,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바쁘고 회장님도 바쁘실 테니,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시작이라니요?”
“침대에 앉으십시오. 일단 마력의 움직임부터 보여드리겠습니다.”
다짜고짜 침대에 앉으라고 주문하는 박한새.
제니퍼는 뭐라고 항의하고 싶었지만, 그가 다그치자 군말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뭐야, 도대체. 나를 그냥 평범한 수련생으로 여기는 거야?’
여자로도 안 보고 심지어 국제 헌터 협회의 수장으로 보는 거 같지도 않았다.
어찌 보면 무례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근데 이상하게 계속 따르게 되네.’
같은 헌터였다면 오히려 자존심 때문에 박한새의 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비각성자다 보니 저도 모르게 박한새의 말을 따르게 되는 거 같았다.
하지만 박한새에게서 무공을 본격적으로 배우게 되자, 이 같은 선택이 후회되지 않았다.
박한새가 가르쳐주는 무공은 단순히 고개를 숙이는 정도가 아니라, 무릎을 꿇어서라도 꼭 배워야 할 가르침이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오늘로 제니퍼가 한국에 온 지 열흘이 되었다.
제니퍼는 그동안 밤마다 나에게서 무공을 배웠다.
역시 A랭크 헌터답게 그녀의 마력 보유량은 상당하였다.
마력 감응력도 남부럽지 않은 수준이었고 말이다.
두 자질 덕에 그녀의 무공 경지는 가파르게 성장하였다.
열흘 만에 단전도 만들고 내공을 다루는 법도 어느 정도 익혔을 정도였다.
“A랭크 헌터가 무공을 배우면 몇 달 안에 S랭크 헌터가 될 수 있다는 말. 솔직히 처음 들었을 때는 허언인 줄 알았어요.”
“지금은 생각이 달라지셨나 봅니다.”
“당연하죠. 제가 직접 체감했는데요. 겨우 열흘 배웠을 뿐인데도 스킬이 강해졌고 근접전에 대한 자신감도 훨씬 늘어났어요.”
“마음 같아서는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몇 달 정도 한국에 남고 싶네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강해지고 싶은 욕구는 존재하였다.
그녀처럼 남다른 정의감을 가진 사람이라도 말이다.
하지만 제니퍼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돌아가야겠죠. 미스터 박과의 약속을 지키려면 말이에요.”
그녀는 무공 아카데미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을 약속하였다.
연 3억 달러라는 금전적인 지원부터 아카데미 설립에 필요한 각종 물품까지.
“저 역시 국제 헌터 협회와 협의된 사항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미스터 박의 행동은 모든 인류의 귀감이 될 거예요.”
모든 인류의 귀감이라.
지나치게 거창한 표현이었다.
참고로 그녀가 이렇게 거창하게 나를 치켜세우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무공 아카데미의 신입생을 약소국 헌터들 위주로 뽑아달라는 국제 헌터 협회의 요구를 들어주었기 때문이었다.
“과찬이라니요. 미스터 박의 행동으로 빌런이나 몬스터 등으로 치안 부재에 시달리는 몇몇 국가에선 터널 끝의 빛과 같은 희망이 생길 거예요.”
“저 역시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헌터 강국인 한국과는 달리, 약소국들의 사정은 영 좋지 않았다.
약쟁이 헌터들이 판을 치는 미국은 양호한 편에 속하였다.
아프리카, 중동, 남미, 동남아 등등.
몇몇 국가에서는 아예 빌런이 정부를 수립하여 나라 전체를 무법지대로 만들기도 하였다.
몬스터에 의해 영토를 완전히 상실한 나라도 적지 않았고 말이다.
‘그들에게 무공을 가르침으로써 그들의 국가가 정상화된다면 그 또한 인류 전체에 득이 되는 일이겠지.’
내가 강대국보다는 약소국 헌터들 위주로 무공을 가르치려는 것도 결국 인류 전체를 위해서였다.
돈이나 영향력을 얻기 위해서는 당연히 강대국 위주로 무공을 전파하는 게 이익이었지만, 나는 돈이 목적인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근데 미스터 박.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저에게 이렇게까지 잘해주는 이유가 뭔가요?”
“뇌물입니다.”
“예? 뇌물이라고요?”
“제니퍼는 국제 헌터 협회의 회장이시지 않습니까.”
“…아쉽네요. 저는 또 남자로서 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뇌물이라고 표현하신 줄 알았는데.”
그녀가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농담이에요.”
“저도 농담이었습니다.”
“알고 있었어요. 미스터 박이 국제 헌터 협회의 덕을 보고자 뇌물을 줄 사람이 아니란 건 저도 잘 알아요.”
“하지만 국제 헌터 협회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싶은 것은 사실입니다.”
지금이야 국제 헌터 협회의 도움이 크게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8성급 던전이 열리고 그 이후에 9성급 던전이 열리게 된다면, 그때부터 전 세계의 모든 헌터는 힘을 합쳐야만 했다.
파롤과의 전쟁에서도 전 세계 헌터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였고.
그러니 이번 생에서만큼은 국제 헌터 협회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게 좋을 거 같았다.
“제가 이 자리에 있는 한, 그렇게 될 거예요.”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일까?
제니퍼의 말이 괜히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거 같았다.
“헉헉.”
최시훈은 팀원들이 도와주지 않아 혼자서 10분을 넘게 싸웠다.
하지만 정작 팀원들은 그를 타박할 뿐이었다.
“최시훈, 너 설마 벌써 지친 거냐?”
“에이, 말이 안 되잖아. 탱커가 체력 조루라니.”
“그러니까 존나 무쓸모 새끼라는 거지.”
“얼타는 신참 보니, 오랜만에 지건 마렵네.”
처음 멸절 길드의 1군 레이드 팀원이 되었을 때 그는 하늘을 나는 거 같은 기분을 느꼈었다.
대부분의 헌터들은 1군 레이드 팀 소속이 되는 것을 꿈꿨다.
1군 레이드 팀은 사실상 헌터들의 아이돌이나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했던 레이드 팀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최시훈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가 바랐던 것은 끈끈한 동료애와 체계적인 전투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그의 팀원들은 그에게 동료애를 보여주기는커녕 조롱을 퍼붓기 바빴다.
심지어 던전 이변이 무섭다는 이유로 정찰 관련 스킬이 하나도 없는 그에게 선두를 맡기기까지 하였다.
‘이딴 게 10대 길드의 1군 팀이라니.’
최시훈이 그와 같은 생각을 할 때, 뒤에서 큰 충격이 가해졌다.
“말로 해주니까, 계속 얼타고 있네? 너 미쳤냐?”
“시훈아, 형들 화나게 하지 말고 빨리 가자. 너 같은 아다 새끼와 다르게 형은 기다리는 여자가 많아.”
체력이 방전되었음에도 팀원들의 구박에 최시훈은 다시 발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헉! 이, 이건?’
앞서 걷던 중, 최시훈은 체내에서 이질적인 감각을 느꼈다.
마력이 통하는 혈도에 무언가가 침입한 것인데, 최시훈은 이 현상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다름 아닌, 마력 간섭 현상이었다.
‘하필 지금이라니!’
최시훈은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지치고 지쳤을 때 맞이하는 마력 간섭 현상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을 주었다.
만약 지금 몬스터가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그는 꼼짝도 못 하고 죽을 수밖에 없으리라.
그리고 그때 뒤에서 무언가 베이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