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구우우우우.
이재상은 미간을 찌푸렸다.
마치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렸다.
‘하필 이때 던전 이변이라니.’
눈앞에 몬스터 떼가 보였다.
그야말로 최악의 타이밍에 던전 이변이 발생한 것.
하지만 미간을 찌푸리기만 할 뿐, 그의 얼굴에 절망감이나 무력감이 감돌지는 않았다.
팀원들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던전 이변이다!”
“펜테리움 복용해!”
낙원 길드의 헌터들은 품에서 펜테리움을 꺼내고는 그대로 복용하였다.
“크르르르. 힘이 넘친다!”
“와라! 개 같은 몬스터 놈들아! 내가 다 죽여주마!”
펜테리움을 복용한 헌터들이 흥분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들의 눈에는 하나같이 광기가 엿보였다.
‘뒤에서 계속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지는 거 같단 말이지.’
모두가 정면에서 다가오는 몬스터 무리, 라미아들을 향해 살기를 내뿜고 있을 때, 이재상만은 후방을 강하게 의식하였다.
하지만 팀원들이 라미아와 전투를 벌이기 시작하자, 그 역시 검을 들고 라미아를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하반신은 뱀에 상반신은 마치 인간 여성을 빼닮은 라미아는 절대 가볍게 여길 몬스터가 아니었다.
휘~ 휘~ 휘~
라미아들이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몇몇 팀원들이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분명 대비했음에도 라미아의 휘파람 공격은 마치 골을 파내는 듯,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다.
“이 소리, 들을 때마다 개 좆같다니까!”
“잔말 말고 죽이기나 해!”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라미아 따위, 헉!”
그때 팀원 한 명이 라미아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창에 꿰뚫렸다.
“뭐 하는 거야, 저 병신 새끼!”
“뒤질 놈 뒤진 거니, 신경 끄고 대형 유지해!”
라미아에게 당할 실력은 아니었기에 의아함을 느낀 이재상이지만, 지금은 눈앞의 라미아를 상대하는 게 더 급하였다.
이재상은 다시 정신을 집중하고 라미아들을 하나하나 베어 나갔다.
하지만 그러던 중, 한 명의 사상자가 또 발생하였다.
“저놈은 또 왜 저래?”
“모, 몸이 안 움직여…!”
몸이 안 움직인다는 정체 모를 유언만 남기고 그대로 숨을 거둔 팀원의 모습에 이재상은 눈을 부릅떴다.
‘벌써 두 명이나 당했다. 체력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방심했던 것도 아닌데 왜지?’
원래 상태로도 라미아쯤은 별 피해 없이 제거할 수 있는 게 그의 팀원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펜테리움까지 복용한 상태인데도 라미아에게 피해를 봤다.
“이거 설마, 부작용 아니야?”
“뭐? 부작용?”
“펜테리움, 안 그래도 부작용에 대한 소문이 무성하긴 했잖아?”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부작용이 아니면 왜 저놈들이 죽은 건데!”
전투가 끝나자 팀원들은 그와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펜테리움은 제조사도 알려지지 않은, 일종의 불법 약물이었다.
예상치 못한 피해를 보게 되자, 가장 먼저 펜테리움의 부작용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재상만은 다르게 생각하였다.
‘누군가 우리를 노리고 있다.’
그가 생각하기에, 팀원들이 라미아에게 당한 것도 제3자가 개입한 결과였다.
“물러나자.”
“여기서 물러나자고?”
“이만큼 피해를 봤는데 더 사냥할 순 없잖아?”
이재상이 후퇴를 주장하자, 팀의 리더는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였다.
이미 뼈아픈 손실을 본 상황.
더군다나 펜테리움의 부작용까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피해를 본다면 길드장이 절대 용서치 않을 것이다.
“쯧, 어쩔 수 없지. 오늘은 여기서 물러나고, 사흘 뒤에 다시 레이드를 한다.”
던전 브레이크 때문에 어차피 다시 오긴 와야 했다.
그러니 사흘 정도 충분히 재정비한 뒤에 다시 레이드를 시작하는 게 현명한 판단이었다.
“이대로 돌아가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
하회탈처럼 생긴 정체 모를 가면을 쓴 괴인.
남성인지, 여성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를 가진 괴인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저자가 우리를 노린 자로군.’
이재상은 직감하였다.
눈앞의 괴인이 라미아와 싸울 때, 몰래 뒤에서 팀원들을 공격한 사람이란 것을.
괴인이 검을 뽑자, 이재상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너, 한울과 무슨 관계지?”
“만약 복수 때문에 이러는 거라면 지금이라도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10대 길드를 상대로 하는 복수가 성공할 리 없잖아?”
이재상의 말에 괴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같잖다는 듯, 그들을 향해 여유롭게 다가올 뿐이었다.
“이거 미친놈 아니야? 낙원을 우습게 봐도 유분수지!”
“죽여버려! 어차피 저놈이 먼저 시비를 걸었으니 죽여도 상관없다!”
리더는 바로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다섯 명의 팀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각종 스킬로 괴인을 공격하였다.
“뭐야? 뭐 저렇게 빨라?”
“가속 스킬을 가진 거 같은데?”
“아니, 저건 가속보다는….”
보법.
무공을 익힌 자가 필수로 배운다는, 일종의 이동 스킬이었다.
알려진 바로는 사용자의 이동 속도를 비약적으로 늘려준다고 하였는데, 직접 보니 확실히 범상치 않았다.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이동하여 팀원들이 날린 스킬을 전부 피해낸 것이다.
“잡담할 시간 없어. 어서 다른 스킬을…, 컥!”
리더의 목이 하늘로 솟구쳤다.
무려 B랭크 헌터인 그가 제대로 된 저항도 못 한 채 목숨을 내준 것이었다.
‘이렇게나 압도적이라고?’
설령 상대가 S랭크 헌터라고 해도 이 정도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게 가능할까 싶었다.
하지만 더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리더가 당하는 모습을 본 이재상은 망설이지 않고 도주를 결심하였다.
‘무공을 익힌 헌터가 우리를 노린다는 사실을 길드장에게 알려야 한다!’
낙원 길드장에게만 알릴 일이 아니었다.
볼케이노와 멸절.
세 길드 전부에게 알려야 했다.
‘블링크!’
그에게는 도주에 최적화된 스킬이 하나 있었다.
블링크라는 이름의 이동 스킬이었는데, 이 스킬로 단숨에 500m 이상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도, 도대체 어떻게 따라오는 거야!’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가면을 쓴 괴인은 팀원들도 모조리 죽인 뒤 그를 무서운 속도로 쫓고 있었다.
또다시 블링크를 사용하고 온 힘을 다해 달렸지만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특단의 수를 쓰는 수밖에!’
그는 노련한 헌터였다.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괴인과의 거리가 10m 이내로 좁혀지자 이재상은 눈을 번뜩였다.
‘지금이다. 블링크!’
이재상이 스킬을 사용하자 괴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거리를 벌리는 것이 아닌, 오히려 거리를 좁히는 선택을 한 것이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방심한다면. 뭐, 뭐야. 왜 몸이 안 움직여…!’
괴인의 뒤를 공격하려는 순간, 이재상은 방금 전 리더가 무력하게 죽었던 모습이 떠올랐다.
B랭크 헌터가 어떻게 그리도 무력하게 죽었나 했더니 이유는 간단하였다.
괴인의 검이 날아오는 결정적인 순간에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니 그렇게 허무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리고 이 순간, 이재상의 처지는 팀의 리더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이,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내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왔는데!’
이재상의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낙원 길드의 레이드 팀이 전멸했다고?”
“예, 이번에도 어김없이 한 명의 생존자 없이 전멸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레이드 팀의 멤버들이 하필 한울 출신이고?”
안지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던전 이변이 무섭긴 무섭군요. 낙원 길드까지 당할 줄이야.”
한 간부가 눈치 없이 떠들었다.
그는 안지호가 한울 길드를 거론한 이유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기색이었다.
최근에 멸절 길드로 합류한 간부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안지호와 함께하였던 간부들은 하나같이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 아무래도….”
“예, 분명 한울의 잔당이 움직인 것일 겁니다.”
“제길, 10년 가까이 지난 일을 왜 이제야….”
멸절 길드의 헌터들이 당했을 때는 눈치채지 못했었다.
던전 이변이라는 특수한 상황이었으니 그저 우연의 결과로만 생각하였었다.
하지만 볼케이노 길드의 헌터들이 당했을 때, 안지호를 비롯한 몇몇 간부들은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연으로 보기엔 너무나 공교로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낙원 길드까지 당하자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세간에는 던전 이변의 희생자로 알려진 이들이 사실은 누군가에게 암살당한 것이었다는 걸 말이다.
“한울의 잔당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눈치 없는 간부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지만, 다들 심각한 표정만 한 채 자세한 사정을 설명해주지 않았다.
안지호는 한숨을 내쉬고는 간부들에게 물었다.
“누구일 거 같나?”
“음……. 이렇게 많은 정예 멤버를 암살하려면 최소 S랭크 헌터이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S랭크 헌터가 갑자기 왜 한울의 복수를 하는 거지?”
그 물음에는 아무도 대답할 수 없었다.
다시금 한숨을 내쉰 안지호가 간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일단 한울 길드장의 가족을 조사해봐.”
수년이 지난 일로 10대 길드들과 전쟁을 할 각오라면 엄청난 사연이 있을 게 분명하였다.
그리고 그런 사연은 대개 혈연으로 연관되어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의외로 용의자는 빠르게 좁혀졌다.
“딸이 C랭크 헌터에다 무공까지 배웠다고?”
“무공 아카데미의 초창기 멤버로 얼마 전까지 교관 일을 했다고 합니다.”
안지호의 머릿속에 몇 달 전, 자신에게 덤벼들던 맹랑한 20대 아가씨의 모습이 떠올랐다.
멸절 길드의 길드장이란 사실을 밝혔음에도 주저 없이 주먹을 휘두르던 여성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오히려 그의 정체를 알아서 더 주저 없이 덤벼들었던 거 같았다.
“얼마 전까지 교관 일을 했다는 것은 지금은 교관이 아니라는 말인가?”
“예, 몇 달 전에 관뒀다고 합니다.”
“공교로워도 너무 공교롭군.”
“하지만 겨우 C랭크 헌터가 B랭크 헌터 7명에 C랭크 헌터 23명을 암살할 수 있겠습니까?”
“겨우 C랭크 헌터? 그년이 무공을 배웠다는 사실은 잊어먹은 건가?”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이미 그년의 무력은 내가 직접 체험했었다. 그때 이미 A랭크 헌터를 뛰어넘는 수준이었어. 지금은 어쩌면 나와 엇비슷할지도 모르지.”
아무리 봐도 김수민이라는 자가 범인처럼 보였다.
확실한 동기에 능력까지 갖춘 용의자는 김수민밖에 없었으니까.
“아무래도 박한새를 찾아가 따지는 수밖에 없겠어.”
“만약 김수민이 범인이라면, 박한새에게 무언가를 얻어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시도는 해봐야겠지.”
한 간부의 말에 안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수민이 자신을 노린다는 사실은 분명 위협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것이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거 같았다.
그녀는 다름 아닌, 박한새의 제자였으니 말이다.
멸절 길드의 길드장, 안지호가 오랜만에 찾아와서는 대뜸 이런 말을 하였다.
“박한새 총장님, 우리 길드와 전쟁하고자 하시는 겁니까?”
“전쟁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김수민 헌터가 우리 식구들을 죽였습니다!”
흥분한 목소리로 따지고 드는 안지호의 모습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였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김수민 교관이 왜 멸절 길드의 헌터들을 공격한단 말입니까?”
“저에게는 그녀가 범인이라는 확실한 정황이 있습니다.”
“증거가 아닌, 정황입니까?”
“이 정황만 언론에 밝혀도 그녀가 범인이란 것은 온 국민이 증명해줄 것입니다.”
내가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식으로 태연하게 대꾸하자, 안지호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총장이 그런 식으로 나오면 우리 연합은 김수민 헌터, 아니 김수민 빌런을 ‘살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김수민 빌런이 저지른 범죄는 세간에 전부 공개한 채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