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이년은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한 사내가 여자아이를 붙잡고 인질극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강남 수용소에서 탈출한 빌런이었는데, 공무원 헌터들은 그의 인질극을 보고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너는 포위됐다! 형기를 늘리고 싶지 않으면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
“닥쳐! 내가 어떻게 사회로 나왔는데!”
사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전방을 향해 스킬을 발산하였다.
그의 발악에 공무원 헌터들은 화들짝 놀라며 거리를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사내가 눈치 못 채게 그의 뒤를 향해 보법을 펼쳤다.
나를 발견한 사람들이 눈을 부릅뜨며 경악한 표정을 지을 때, 나는 이미 사내의 점혈을 꾹 누른 상태였다.
“날 풀어주지 않으면 이년의 목숨은……!”
갑자기 사내가 말을 멈췄다.
점혈에 당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제가 구해드리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내의 품에서 여자아이를 꺼내자, 중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연신 감사 인사를 하였다.
“와! 저 사람이 인질을 구했어!”
“어디서 나타난 거지? 순간이동 한 건가?”
“순간이동이 아니라, 무공 아니야?”
“어, 그러고 보니 저 사람 박한새 닮았는데?”
“박한새다! 박한새야!”
시민들이 나를 알아보더니 환호를 내질렀다.
공무원 헌터들도 마치 우상을 바라보듯 두 눈을 반짝이며 내게 다가오더니 감사 인사를 하였다.
“인질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피해 없이 인질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저 또한 이능관리부 소속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역시…!”
내 말에 공무원 헌터들은 더욱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더 상대할 시간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빌런들의 탈출극은 계속 이어지는 중이었다.
“저는 이만.”
시민들은 사진을 찍어달라느니, 사인을 해달라느니, 나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경공을 펼친 나를 따라잡을 순 없었다.
‘저기 또 한 명이 보이는군.’
수용소에서 꽤 떨어진 거리에 흰색 죄수복을 입은 사내가 보였다.
점점 거리가 가까워지자, 사내의 정체가 누구인지 알 거 같았다.
사내는 다름 아닌, A랭크 빌런 최채환이었다.
“동작 그만.”
“어떤 새끼가 감히…, 헉! 바, 박한새 님 아니십니까?”
나를 알아본 최채환이 놀란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한 거냐?”
“…그, 그게.”
“저항하고 싶으면 저항해도 된다.”
“감히 박한새 님에게 어찌 저항하겠습니까? 얌전히 잡힐 테니, 제발 고문만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최채환의 반응을 보고 나는 피식 웃었다.
아직도 분근착골에 대한 공포가 남아있는 듯하였다.
‘하긴, 전신의 근육이 뒤틀리는 그 끔찍한 경험을 다시 하고 싶지는 않겠지.’
제발 죽여달라고 부탁하는 고문이 바로 분근착골이었다.
최채환이 두려움을 느끼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였다.
“이렇게 포기할 거면 애초에 탈출은 왜 한 거냐?”
“그야 박한새 님이 쫓아올 줄은 몰라서 그랬습니다.”
“다른 놈들이 어디로 튀었는지 아나? 내가 원하는 정보를 알려주면 분근착골은 하지 않으마.”
“제, 제가 아는 정보는 다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고문만은…!”
그의 도움 덕에, 다른 빌런들은 쉽게 잡을 수 있을 거 같았다.
다행히 강남 수용소 죄수들의 탈출극은 큰 피해 없이 수습되었다.
애꿎은 시민 십수 명과 공무원 헌터 몇 명이 다쳤지만, 그뿐이었다.
사실상 흉포한 맹수 수십 마리가 도심에 튀어나온 것과 다를 게 없는 상황이었으니 이 정도 피해는 양호하다고 봐야 했다.
“노홍만 헌터께서 자리를 지켜주신 덕에 피해가 크지는 않았습니다.”
S랭크 헌터, 노홍만.
만약 그까지 탈출을 시도하였다면 수십 명이 다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수십 명은커녕 수백, 아니 최대로 잡으면 수천 명의 사상자가 나올 수도 있었으리라.
그만큼 S랭크 헌터의 무력은 엄청났다.
“그런데 노홍만 헌터는 왜 탈출하지 않으신 겁니까?”
“내가 왜 탈출해야 하지?”
노홍만은 팔짱을 낀 채 무뚝뚝한 얼굴로 되물었다.
“밖으로 나가시고 싶은 생각은 없으신 겁니까?”
“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나는 언제든 나갈 수 있다. 굳이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서도 말이야.”
아무리 강남 수용소에서 철저하게 감시한다고 해도 S랭크 헌터가 마음만 먹으면 탈출하는 것쯤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래도 다른 빌런들이 탈출할 때 가만히 있어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네가 왜 감사 인사를 하는 거지?”
“저 역시 이능관리부의 일원이기 때문입니다.”
“이능관리부라.”
“물론 곧 독립할 생각이긴 합니다.”
“독립한다면 길드를 차리는 건가?”
그는 여전히 나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는 거 같았다.
내가 무공 아카데미를 차린다는 사실도 알지 못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근데 나에게 관심이 없으면서 왜 나를 부른 거지?’
의아함을 느끼면서 나는 그의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아닙니다. 길드가 아닌, 학교를 차릴 생각입니다. 무공을 가르쳐주는 무공 아카데미를 말입니다.”
“그럼 나도 거기서 무공을 배우면 되겠군.”
“무공을 배우겠다는 말씀입니까?”
놀라운 일이었다.
S랭크 헌터인 그가 무공을 배우기로 결심할 줄이야.
심지어 그는 그린스킨이란 세력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더 강해질 수 있다면 당연히 배워야지.”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긴 했다.
하지만 그 당연한 걸 다른 S랭크 헌터들은 자존심 때문에 안 해서 문제였다.
“노홍만 헌터님이 알고 계셔야 할 게, 아무에게나 무공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닙니다.”
S랭크 헌터가 무공을 배운다면 나라고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그 S랭크 헌터가 눈앞의 노홍만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실상 적이나 다를 게 없었던 것이 우리 둘의 관계였다.
그린스킨이라는 그의 소속과 그의 배후령이 어떤 성향인지 알지도 모르는 판국에 그에게 무공을 가르칠 수는 없었다.
“녹색 예언자가 그러더군. 너 때문에 변화의 흐름이 빨라졌다고 말이야.”
자신의 배후령, ‘녹색 예언자’를 거론하며 하는 그의 말을 듣고 나는 눈을 부릅떴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변화의 흐름이라니요?”
“성좌가 내게 알려준 것은 그 말뿐이다.”
“너로 인해 변화의 흐름이 빨라졌으니, 너는 책임을 져야 한다.”
갑자기 그의 성좌는 왜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고, 그 성좌가 한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성좌의 진명을 생각하면 실로 의미심장한 느낌이 들었다.
진명에 무려 ‘예언자’가 붙어있었으니 말이다.
‘변화의 흐름이 빨라진다는 것은 설마 8성급 던전이나 9성급 던전이 원래의 역사보다 빨리 열릴 수도 있다는 의미일까?’
만약 내 추측이 맞다면 더욱 경각심을 가져야 할 거 같았다.
인류의 멸망이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는 의미였으니까.
강남 수용소에서 빌런 죄수들이 탈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김수민은 잠시 고민하였다.
자신도 빌런을 잡아야 할지, 아니면 계속 은신처에 숨어 있어야 할지 그런 고민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김수민은 자신이 쓸데없는 고민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역시 사부님이야.’
박한새의 활약으로 죄수들의 탈출극은 순식간에 막을 내렸다.
A랭크 헌터인 최채환을 시작으로 무려 9명의 고랭크 빌런을 잡아낸 것이다.
‘나는 내 일에만 집중하면 된다.’
마침 소란이 생겼으니 김수민에게도 기회였다.
안 그래도 멸절, 볼케이노, 낙원 길드에서 연달아 피해자가 나온 일로 언론이 주목하던 상황.
언론과 헌터들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향했으니 지금이 복수를 이어나갈 절호의 찬스였다.
“정동윤.”
“뭐야, 너는?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거냐!”
“왜 한울 길드를 배신한 거지?”
그녀는 박한새가 준 가면을 쓴 채, 볼케이노 길드의 간부 앞에 나타났다.
정동윤이란 이름의 간부로 그 역시 한울 길드를 공격하는 것에 동참한 인사 중 한 명이었다.
“한울 길드? 그게 언제 적 이야기인데, 지금 꺼내는 거야? 아니, 그보다 너는 누구냐니까?”
“배신에 대한 죄책감은 가졌었나?”
“이 새끼, 아까부터 뭐라는 거야? 내가 죄책감을 왜 가져? 당한 놈이 병신인 거지! 한울 길드장, 그놈도 멍청하게 힘만 센 호구 같은 놈이었다고!”
“역시 네놈들은 다 똑같은 놈들이군.”
김수민은 이를 악물었다.
배신자들은 하나같이 더럽고 추잡한 이들밖에 없었다.
그저 돈과 권력, 그리고 한울 길드가 가진 던전들이 탐이 나서 일을 벌인 것이었다.
더 이상의 대화는 불필요하였기에 김수민은 정동윤에게 겨누었던 검에 검기를 일으켰다.
“그, 그것은?”
“죽어라.”
“지랄!”
역시 B랭크 최상위권 헌터는 쉽게 당해주지 않았다.
정동윤은 마치 검기와 비슷한 형태의 스킬로 김수민의 공격을 막아냈다.
‘소용없다!’
그녀의 무기는 검기뿐만이 아니었다.
내공으로 강화된 육체와 그 육체로 펼치는 보법.
그리고 그녀가 헌터로 각성한 순간부터 가졌던 염동력이라는 사기적인 스킬까지.
이 모든 게 그녀의 무기였다.
“도, 도대체 랭크가 몇인 거야!”
쉴 새 없이 날아오는 그녀의 공격에 정동윤은 그저 막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지만 그의 실력으로 S랭크 헌터를 상대로도 이긴 경험이 있는 김수민을 당해낼 순 없는 일.
“사, 살려줘.”
“살려주십시오! 10억, 아니 20억을 드리겠습니다!”
정동윤은 뒤늦게 목숨을 구걸하였지만, 자신의 부친을 죽이는 데 일조한 그를 김수민이 살려줄 리는 없었다.
결국에 다른 배신자들이 그렇듯, 정동윤은 목이 잘린 채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드디어….”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마침내 살생부 명단에서 한 명을 제외할 수 있었다.
‘이제 시작이다. 간부들뿐만이 아니라, 길드장까지 전부 다 죽여야 해!’
그녀가 들어온 창가에서 갑자기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김수민은 부릅뜬 눈으로 창가를 노려보았다.
“역시 무공의 힘은 장난 아니야.”
마치 방금 전의 상황을 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가 상대의 정체를 물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회색 인간이라니.’
갑자기 나타난 사내는 한눈에 봐도 수상한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살색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 피부색 전체가 회색으로 칠해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팔콘이다.”
“팔콘?”
“여명회의 사람이지.”
“여명회는 또 뭐지?”
“인류를 구원할 세력이다.”
그는 김수민이 물을 때마다 한마디씩 대답을 해주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을 들을 때마다 김수민의 의문은 깊어져만 갔다.
여명회라는 세력은 또 무엇이고, 팔콘이란 별명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머리가 좋은 그녀로서도 도무지 추측이 되지 않았다.
“이것만 말해라. 너는 내 적이냐.”
김수민이 검을 겨누며 묻자 사내, 팔콘이 피식 웃었다.
“적? 아니, 나는 적이 아니야.”
“그렇다면 물러나라.”
“그럴 순 없지. 적은 아니지만, 아군도 아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