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지들 무능을 나의 잘못으로 돌리다니.’
빌런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이유로 수수방관하는 헌터 협회의 행태가 안지호로서는 그저 역겹게만 느껴졌다.
만약 그 빌런이 암살이라는 형태가 아닌, 테러 같은 형태로 대량 학살을 저지르면 어쩌려고 저러는가.
‘정부도 마찬가지야.’
사실 김수민을 제압하는 일은 정부가 나서야 할 일이었다.
김수민은 명백히 법을 어기고 사적 제재를 하고 있었다.
물론 암살자가 김수민이란 사실이 밝혀진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S랭크급 빌런이 미쳐 날뛰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그런데도 정부는 오히려 김수민이 날뛸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언론을 협박해서 김수민이 일으키는 암살 사건들이 이슈화되지 않게 막고 있는 것이다.
정권 초기부터 무능함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나 협회는 믿을 게 못 된다.’
늘 그랬었듯, 역시 믿을 건 같은 10대 길드들밖에 없었다.
안지호는 바로 연합 일원들을 불러 모았다.
‘제기랄.’
낙원 길드, 볼케이노 길드, 멸절 길드.
이렇게 세 길드가 머리를 맞대면 좋은 생각이 떠오를 수도 있으리라 여겼는데 착각에 불과하였다.
명색이 10대 길드의 길드장이라는 양반들이, 오랜만에 느끼는 죽음의 공포로 완전히 공황 상태에 빠졌다.
웬만한 S랭크급 헌터보다 강하다고 알려진 김수민의 무력이 그만큼 두려웠던 것이리라.
“저, 저는 미국에 잠시 가 있을 겁니다. 그년도 미국까지는 쫓아오지 못할 거 아닙니까?”
낙원 길드의 길드장은 대책 회의에서 ‘해외 도피’를 이야기하였다.
김수민과 맞서 싸우겠다는 생각은 일절 하지 못하였다.
“길드는 어쩌고 외국으로 도피한다는 말씀을 하십니까.”
“길드야, 잠시 다른 놈에게 맡겨두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빌런이 두려워 외국으로 도피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헌터계에서 바로 매장당할 텐데.
그 사이 낙원 길드는 그가 대리인으로 앉혀뒀던 이가 완전히 장악해버릴 것이고 말이다.
‘이런 놈을 데리고 한울과 대적했었다니. 과거의 나는 얼마나 야망이 컸던 건가.’
생각이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야망에 미쳤던 것인지.
뭐가 됐건 낙원 길드 길드장의 모습은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볼케이노 길드장님은 어떻게 하실 계획입니까?”
안지호는 다른 한 명을 간절한 눈으로 바라봤다.
볼케이노만큼은 그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기를 바란 것인데, 안타깝게도 볼케이노라고 낙원과 다를 것은 없었다.
“당분간 지하 벙커에 머무를 계획인데, 멸절 길드도 함께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하 벙커에 계속 머물겠다는 말씀입니까?”
“솔직히 김수민, 그년이 두려운 것은 염동력 스킬 때문에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몰라 두려운 거 아닙니까?”
김수민이 가진 염동력이란 스킬은 암살에 최적화된 스킬이었다.
일단 높이에 구애받지 않는 것만으로도 암살에 굉장히 유리하였다.
염동력을 사용하면 10층이든, 100층이든 하늘을 날아 얼마든지 갈 수 있으니까.
소음을 줄일 수 있다는 점도 암살에 엄청난 이점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염동력만이 문제가 아닐 텐데.’
안지호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할 때, 볼케이노 길드장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만약 나를 쫓아 지하 벙커로 온다면 그날이 그년의 제삿날이 될 겁니다.”
분명 10대 길드의 길드장이자, 엄청난 커리어를 가진 A랭크 헌터의 말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믿음이 가지 않았다.
안지호는 쓰게 웃으며 모임의 해산을 선언하였다.
“연합이든, 협회든 도움 되는 것들이 하나도 없군!”
바쁘게 이곳저곳을 쏘다녔지만 얻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길드 내에서 김수민에 대한 공포만 확산하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S랭크 헌터 한두 명 정도와는 원만한 관계를 맺었어야 했는데.’
S랭크 이상의 실력을 가진 암살자를 막기 위해선 S랭크급 헌터의 도움이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필요했는데, 이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하긴 누가 알았겠는가.
김수민 같은 말도 안 되는 실력을 가진 암살자가 등장할 줄은.
그리고 자신이 그 암살자의 표적이 될 것도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박한새, 그놈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지.’
S랭크급 실력자가 거의 10명에 달한다는 무공 아카데미.
아카데미라는 명칭이 무색하게도 한국 최강의 세력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하지만 김수민이 바로 그 무공 아카데미 출신인 이상 박한새에게 도움을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 길드장님. 볼케이노 길드가 하회탈 괴한에게 당했습니다!”
그렇게 아무 대책도 세우지 못한 채 시간만 허비할 때, 볼케이노가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볼케이노 길드장도 당한 건가?”
“어떻게 당한 거지? 벙커에 있었으면 암살도 안 통했을 거 아니야?”
김수민의 실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10대 길드 중 하나인 볼케이노를 정면에서 쓰러뜨릴 정도는 아닐 것이다.
10대 길드가 괜히 10대 길드겠는가.
7성급 던전조차 클리어할 수 있는 여력을 가진 길드들이 10대 길드라고 불렸다.
정면에서 붙었다고 가정했을 때, S랭크 헌터 두세 명 정도는 능히 감당할 수 있으리라.
그렇기에 볼케이노 길드가 이렇게 빨리 당했다는 소식이 안지호로선 당혹스럽게 느껴졌다.
“스킬로 벙커 전체를 무너뜨렸다고 합니다.”
“병신 같은 놈! 그렇게 허무하게 당할 거면 벙커에는 왜 숨은 거야!”
벙커가 무너지다니.
얼마나 허술하게 지었으면 그런 일이 벌어질까 싶었다.
물론 그만큼 김수민의 스킬이 위력적이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말이다.
“차라리 저희도 잠시 외국으로 피해 있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간부의 조언에 안지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외국으로 튄다고 뭐가 달라질까?
애초에 S랭크 이상의 막강한 실력을 가지고 미련하게 연합과의 전쟁을 선포했던 김수민이었다.
외국으로 튄다고 그녀가 쫓아오지 않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나는 절대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하, 하지만 길드장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제대로 된 대책을 이야기해!”
“그럼 던전에 머무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던전에?”
“예, 던전에 머물고 있으면 김수민, 그년도 암살 같은 건 시도할 수 없게 될 겁니다.”
안지호는 턱 끝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던전 특유의 환경적인 요소를 잘 활용한다면 암살을 원천 봉쇄할 수 있었다.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겁쟁이라는 말도 듣지 않을 거란 거야.’
헌터가 헌터 본업을 한다고 겁쟁이란 소리를 들을 리는 없었다.
물론 알 만한 사람들은 퇴물이 된 그가 갑자기 던전 사냥을 하는 것만 봐도 ‘도피용’인 것을 알아차리겠지만 말이다.
“좋아. 그럼 우리 길드는 당분간 던전 사냥에 집중한다.”
결국, 그는 간부의 조언대로 던전에서 생활하기로 마음먹었다.
매일 던전에 머물러서 24시간 전투 체제를 갖추는 것.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최고의 대비책이었다.
‘네년이 아무리 강해도 우리 길드 최정예들이 완벽한 무장 상태를 갖췄을 때는 나를 어쩔 수 없을 거다.’
안지호는 ‘암살’만 아니라면 김수민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설령 그녀가 S랭크보다 강하다고 해도 한 명의 헌터일 뿐이기 때문이었다.
던전에 머물기로 결정하면서 안지호가 두려워한 상황은 딱 하나였다.
그건 바로, 김수민이 던전 게이트를 막아버리는 것.
즉, 독 안에 든 쥐처럼 그를 던전 속에 가두는 상황을 가장 두려워하였다.
만약 던전 게이트를 지킨 채로 그가 던전에서 나가는 것을 계속 막는다면 안지호는 사실상 외국으로 도피한 것보다 못할 정도로 영향력을 잃게 되리라.
‘하지만 설령 그런 상황이 와도 몇 달은 버틸 수 있을 거다.’
식량은 충분하였다.
안전지대도 만들어 놨으니, 몇 달 정도 버티면서 마정석이나 실컷 모아놓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리고 몇 달이면 정부나 협회에서도 김수민에게 어떤 조처를 취할 것이 분명하였다.
“길드장님. 던전 안에 외부인이 들어왔습니다.”
멸절 2팀 팀장의 보고에 안지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외부인?”
“가면을 썼다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무래도 김수민인 거 같습니다.”
“하. 나를 얼마나 우습게 본 거지?”
김수민이 자신을 노릴 것이란 사실은 당연히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몇 가지 함정을 파서 기다렸다.
자기 자신을 직접 미끼로 두고 김수민이 함정에 빠지는 순간을 기다렸던 것.
하지만 그가 준비한 함정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녀는 혼자서 당당하게 던전으로 들어왔다.
“진짜 혼자 왔군.”
가면 쓴 괴한, 김수민의 모습을 확인한 안지호는 헛웃음을 지었다.
10대 길드 중 한 곳인 멸절 길드가 이렇게까지 무시받은 적이 과연 있을까 싶었다.
“정지! 걸음을 멈추고 신원과 목적을 밝혀라!”
“너희를 죽이러 왔다.”
김수민이 중저음 목소리로 그같이 말하자, 멸절 길드 헌터들이 몸을 움찔하였다.
당당한 그녀의 기색을 보고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안지호는 그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다가, 김수민을 향해 외쳤다.
“재해급이라 불린다고 진짜 S랭크를 뛰어넘는다고 착각하는 거냐?”
본래 헌터 등급을 나누듯, 빌런 역시도 S급, A급, B급 그렇게 등급을 나누었다.
하지만 그녀로 인해 S급 위에 하나의 등급이 더 생겼다.
그 등급이란 다름 아닌, ‘재해급’ 빌런.
10대 길드 중 무려 세 곳을 농락하였으니 그런 별명이 붙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이따위 짓을 벌인다고 죽은 네 아비가 좋아할 거 같으냐?”
천천히 다가오던 김수민의 발걸음이 멈칫하였다.
가면을 쓰고 있었기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안지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무척이나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짜릿짜릿한 기분이 드는군. 살기를 얼마나 내뿜고 있는 거지?’
살기를 내뿜던 김수민이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후회, 한 번이라도 한 적 있나?”
“무슨 후회? 아, 한울을 배신한 거?”
안지호는 같잖다는 듯, 조소를 흘렸다.
“속고 속이는 게 당연한 헌터 사회인데, 당한 놈이 멍청한 거 아닌가?”
그러자 김수민의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
염동력으로 그의 목을 죄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김수민의 살기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저년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잠시 이성을 잃을 정도로 분노하던 김수민은 이내 호흡을 갈무리하였다.
그러자 급격하게 팽창하며 그녀의 몸속을 달구던 내공이 다시 잠잠해졌다.
‘몸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분노에 미쳐서 실수를 저지르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지금 그녀의 상황은 실수를 저질러도 될 정도로 유리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정면으로 멸절 길드의 정예들을 꺾을 수 있을까?’
한국에서 손꼽히는 탱커인 멸절 1팀 팀장.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손꼽히는 근거리 딜러인 멸절 2팀 팀장.
그리고 멸절 길드 길드장이자 군단급 화력의 소유자라 불리는 A랭크 헌터 안지호까지.
실로 엄청난 전력이 눈앞에 모여있었다.
한국의 그 어떤 S랭크 헌터도 저들 앞에서 필승을 장담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주먹을 강하게 쥐며 자신감을 표출하였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도 꺾인다면 그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거야.’
절망하고 또 절망하게 만들리라.
그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복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