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안능희와 무슨 관계였냐고?
사실 나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서로 마음이 있는 것은 확인하였지만, 그 이상 가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끝난 관계였으니.
나도 그렇고 그녀도 그렇고 워낙 군인으로서의 사명감이 강한 성격이라 연애할 생각을 아예 못 하기도 했고.
“그리 대단한 관계는 아니었다. 그냥 목숨 한 번 구해줬을 뿐이야.”
“누가 누구의 목숨을요?”
“둘 다 서로의 목숨을 한 번씩 구해줬다.”
주현근은 내 말을 듣고 별거 아니라는 듯 입을 열었다.
“우리 부대에서 서로 목숨을 구해주는 일이야 흔한 일이지 않았나요.”
뭐, 최전선에서 싸우던 특수부대였으니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어깨만 으쓱였다.
“교관님, 엄청난 강적이 등장한 거 같지 않아요?”
단둘이 있게 되자, 진세희가 심각한 목소리로 김민경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사부님을 면담했던 여군을 말하는 거지?”
“맞아요, 피부도 무슨 군인이 아니라, 연예인처럼 새하얗지 않았어요?”
두 사람은 어떻게 보면 경쟁자나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모두 박한새를 노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유지은이 처음 나타났을 때도 그랬듯, 강적이 나타날 때만큼은 힘을 합치고는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보기에 박한새의 과거 인연이라던 안능희라는 여인은 유지은보다 더 강적처럼 느껴졌다.
“같은 군 출신이라는 게 신경 쓰이기는 해.”
“뭔가 심상치 않은 관계처럼 보였어요.”
“너도 그렇게 봤어?”
“여자의 감이잖아요. 과학보다 정확하죠.”
진세희의 말에 김민경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가 무공의 창시자로 불리기 이전부터 가까운 관계였던 여성이야.”
어떤 시점에 박한새와 가까운 관계가 되었는지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무공의 창시자로 불리기 이전의 박한새는 ‘부사관 출신 비각성자’에 불과하였다.
그야말로 범인 중의 범인이었다는 뜻.
이렇게 무명이던 시절에 맺어진 인연이라면 화려하게 성공한 지금도 특별하게 느껴질 것이 분명하였다.
“만약 그 여군이 무공 아카데미 신입생으로 들어오면 어떡하죠?”
그 말을 듣고 김민경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 이상 경쟁자가 늘어나는 것은 원치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입학처장도 아니고 여군을 뽑지 못하게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면 아주 갈궈야지. 사부님을 노릴 생각은 꿈도 못 꾸게 말이야.”
“저도 부교수로서 동참할게요!”
[나 진짜 무공 아카데미 입학시험 칼 갈고 준비 중.]
[나두. 헌터 시험 준비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빡세게 하고 있다. ㅋㅋㅋㅋ]
[ㅂㅅ들. 글케 준비한다고 되겠냐?]
[ㅇㅈ. 헌터든, 비각성자든 경쟁률 개에바임 ㄷㄷ]
[헌터는 사실상 모든 헌터들이 다 시험 본다고 하던데.]
[헌터뿐이냐. 라이선스 없는 각성자들도 헌터 시험 포기하고 죄다 무공 아카데미 준비 중임.]
[아 진짜 개 같네. 헌터 놈들은 왜 무공까지 넘보냐. 노양심 아님?]
[응~ 주제도 모르고 무공 넘보는 너희들이 더 노양심~]
[ㅇㅈ. 던전도 갈 수 없는 것들이 왜 무공 배우려는지 모르겠음.]
오늘도 헌터 관련 최대 커뮤니티 사이트인 헌터 매니아에서는 무공 아카데미에 관한 이야기로 떠들썩하였다.
무공 아카데미는 늘 화제가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모든 유저들이 무공 아카데미에 대해서만 떠들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님들 멸절 길드 소식 들음? 완전 개망했다던데 ㅋ]
한 유저가 멸절 길드에 관한 게시글을 올리자 댓글들이 빠르게 달렸다.
[엥? 멸절 길드 던전으로 튄 거 아니었음? 갑자기 왜 망함?]
[멸절 길드장, 던전에서 뒤짐 ㅋ]
[ㄹㅇ???]
멸절 길드는 던전에 들어가고 나서 소식이 완전히 끊겼었다.
적어도 몇 달은 있을 생각으로 던전에 들어갔기에 소식이 끊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멸절 길드의 길드장인 안지호가 김수민의 손에 죽은 뒤로도 멸절 길드의 소식은 잘 전해지지 않았다.
던전에 들어가지 않은 잔류 인원이 안지호의 죽음을 감추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요즘 시대에 이런 엄청난 정보를 오래 감출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곧 안지호가 ‘재해급’ 빌런에게 당했다는 소식이 전국에 알려졌다.
당연히 이 소식을 들은 헌터 매니아 유저들은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던전에 들어간 걸 어떻게 죽였냐. ㄷㄷㄷ]
[뭘 어케 죽임. 힘으로 죽였겠지.]
[그니까 어케 힘으로 죽였냐고 ㅡㅡ. 핵심 전력 다 모였으니 암살은 불가능했을 텐데.]
[그게 ‘재해급’이다.]
[아.]
처음 재해급 빌런이 등장했을 때만 해도 과장된 거 아니냐는 식의 여론이 지배적이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볼케이노와 멸절이 연달아 깨지면서 재해급 빌런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진 것이다.
[재해급, 재해급 하더니. 존나 쎄네. 혼자서 10대 길드 세 개를 부수다니. ㄷㄷ]
[아직 한 곳 남았음 ㅋㅋ]
[미국으로 튄 놈?]
[ㅋㅋㅋㅋㅋㅋㅋ]
[토낀 놈이 그래도 오래 살긴 하네 ㅋㅋㅋㅋ]
[차라리 일찍 뒤지는 게 나을 듯. 어차피 뒤질 거 ㅋㅋㅋ]
[그거 앎? 아케론 길드에서 최연성 지켜주고 있다던데.]
그때 누군가가 아케론 길드를 거론하였다.
참고로 아케론 길드는 미국 서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규모를 자랑하는 거대 길드였다.
[ㅋㅋㅋ 미국 형님들 조선의 매운맛 보고 싶어서 안달이네.]
[ㄹㅇ ㅋㅋ]
[재해급 한번 경험해야 할 듯. ㅋㅋㅋㅋ]
헌터 매니아 유저들은 아케론 길드가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기라도 한 것처럼 비웃었다.
한국의 10대 길드 중 무려 세 곳이 재해급 빌런에게 당해서 무너졌는데 제아무리 아케론 길드가 대단하다고 해도 재해급 빌런을 막을 수 있겠냐는 식의 비웃음이었다.
하지만 반대 의견도 존재하였다.
[근데 재해급 빌런이라도 아케론 길드에는 안 되지 않을까?]
[랭커도 아닌 놈들이 천하의 아케론을 비웃네 ㅋ]
[ㅇㅈ 아케론 소속 헌터 수가 몇 명인데?]
아케론.
A랭크 헌터가 수십 명에 모든 헌터를 다 포함하면 헌터 수가 이천 명이 넘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길드였다.
규모 면에서 봤을 때, 세 길드는 아케론과 비교할 대상이 아니었다.
미국은 땅이 큰 나라답게 각 길드가 보유한 토지의 규모도 엄청났다.
몇몇 길드는 서울보다도 거대한 땅을 소유한 경우도 있었다.
아케론 길드는 미국에서 손꼽히는 길드답게 훈련시설도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였다.
“밀어붙여!”
“탱킹 풀렸잖아!”
“지금이다! 포커싱 해!”
다양한 인종의 헌터들이 실전 훈련을 치르고 있었다.
단순히 표적을 두고 실전 훈련을 치르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잡아 왔는지 실제 몬스터를 상대로 실전 훈련을 치르고 있었다.
“여기가 바로 아케론 길드의 훈련장입니다.”
“왜, 왜 몬스터가 저기에 있는 겁니까?”
“훈련시설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훈련시설이라도….”
“코리아에서는 어떻게 하는지 몰라도 우리 미국의 헌터들은 훈련을 실전처럼 합니다.”
낙원 길드의 헌터들은 아케론 길드 헌터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미국의 헌터들이 강하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훈련부터 이렇게 남다를 줄은 상상도 못 하였다.
“여기부터는 아이템 창고입니다. 그 유명한 자렛의 목걸이도 이곳에 있습니다.”
창고 시설의 규모도 엄청났다.
만약 저 창고들 안에 아이템이 가득하다면 한국의 모든 헌터에게 아이템을 지급하는 게 가능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이곳은 여러분이 묵으실 숙소입니다. 아케론의 길드원들도 묵고 있지만, 워낙 부지가 넓어서 마주칠 일은 없을 겁니다.”
시설들을 둘러보며 낙원 길드 헌터들은 아케론이 가진 힘을 뼈저리게 느꼈다.
단순히 규모만 큰 것이 아니었다.
헌터들의 훈련 상태나 장비 상태도 실로 대단하였다.
실력이야 두말할 것 없을 수준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아케론의 힘을 확인했음에도 낙원 길드의 헌터들은 불안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아케론이 낙원 길드와는 비교도 안 되는 규모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도 인정하였다.
헌터의 전력으로 따져도 아케론이 훨씬 압도하리라.
허나 그뿐이었다.
과연 아케론이란 길드 하나가 낙원, 볼케이노, 멸절 이렇게 한국 10대 길드 세 곳을 합친 것보다 강할까?
낙원 길드의 헌터들로선 아무래도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제발 오지 마라. 제발 오지 마라.’
‘미국이 무서워서라도 안 오겠지? 꼭 그래야만 해.’
‘제길! 왜 S랭크 헌터는 없는 거야! S랭크 헌터가 아니라면 그년을 막을 수 없다고!’
아케론 길드의 길드 마스터, 코빈 윌리엄스.
그는 최근 흥미로운 소식을 접하였다.
“협회 놈들, 아주 재미난 짓을 하고 있군.”
코빈 윌리엄스가 말한 재미난 짓이란 다름 아닌, 무공 아카데미의 신입생을 뽑는 일을 말하였다.
박한새는 국제 헌터 협회에게 추천권을 주었다.
외국인 헌터만큼은 국제 헌터 협회에서 추천한 인재들로 뽑으려는 의도였다.
국제 헌터 협회는 박한새에게 받은 추천권을 사용하고자 열심히 인재들을 찾고 있었다.
마력이 풍부하고 강인한 육체를 가진 그런 인재들을 말이다.
“무공이라. 확실히 흥미가 생기긴 해.”
코빈 윌리엄스라고 무공의 소식을 듣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오히려 그는 미국의 그 누구보다 무공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기회만 있다면 무공을 배우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무공을 배우러 굳이 코리아까지 갈 필요는 없지.”
비각성자 따위를 스승으로 모시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기반을 놔두고 한국에 오래 머무는 것도 원치 않았고.
그렇기에 그는 낙원 길드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코리아에서 온 손님들은 어떻게 됐나?”
“숙소로 안내하였습니다.”
“잘 모셔. 우리에게 무공이란 선물을 가져다줄 귀인들이니.”
낙원 길드를 노리는 암살자, 김수민.
무공 아카데미의 교관이라던 그녀를 잡기만 한다면 코빈 윌리엄스 역시 무공을 배울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괜찮겠습니까?”
“뭘 말하는 거지?”
“코리아 헌터들은 패잔병이라고 보기에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실력자들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수준이 높다고 알려진 헌터들이니 당연히 그렇겠지.”
“그렇게 수준이 높은 헌터들이 재해급 빌런을 굉장히 두려워하였습니다. 길드 마스터라는 사람조차 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리며 겁에 질린 모습을 보였고 말입니다.”
이 정도만 들어도 간부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재해급’ 빌런이란 자를 무시해선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코리아 길드들은 마스터가 던전 사냥을 안 한다지?”
“저도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헌터가 던전 사냥을 기피하다니. 그것도 벌써 몇 년째라는데, 그 정도 시간이면 용감한 사람을 겁쟁이로 만들기에 충분하지 않겠나?”
“리스크가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 하지만 미국에서 최초로 무공을 얻을 수 있다면 약간의 리스크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법이다.”
어찌 보면 그는 선지자였다.
미국의 그 어떤 길드에서도 아직 무공에 대해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그는 무공을 적극적으로 도입할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수단이 문제였다.
그는 정당한 수단으로 무공을 도입할 생각이 없었다.
외국인 헌터에게 할당된 1,000명이라는 자리.
아케론의 규모를 생각하면 터무니없이 적게 느껴지는 자리였다.
그렇기에 다른 수단을 활용하였다.
‘재해급’ 빌런이라는 가면 쓴 괴인을 미국으로 불러들이기 위한 함정을 판 것이다.
‘마침 S랭크 헌터들이 흥미를 보이고 있지.’
그것도 한 명이 아닌 두 명의 헌터가 재해급 빌런을 잡는 것에 관심을 보이었다.
이들을 합류시키기만 한다면 재해급 빌런이 아무리 대단해도 두려워할 필요는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