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설마 엑스칼리버?”
“엑스칼리버라고? 그럼 저 검 뽑으면 아서왕이 되는 거야?”
“진짜 엑스칼리버겠냐? 그냥 쇼하려고 만들어놓은 거겠지.”
“쇼 한번 하려고 이 거대한 공간을 이렇게 꾸몄다고?”
모두가 의아한 반응을 드러낼 때, 로렌초가 앞으로 나서서 정신력 시험 과정을 설명해주었다.
“이 검 뽑으면 나, 인정한다.”
물론 그 설명이 시험 응시생들을 이해시키기에는 한참 부족하였기에 협회 직원이 통역가처럼 대신 설명해줘야 했다.
“만약 이 검을 뽑으신다면…… 성적과 관계없이 특기자 전형으로 입학시험에 합격하시게 될 겁니다.”
“특기자 전형이라고요?”
“신체 능력 평가에서 기록이 엉망이어도 뽑아준다는 말입니까?”
“그냥 뽑기만 하면 된다는데?”
“뭐야, 개꿀이잖아?!”
“어제 괜히 빡세게 했네.”
헌터들은 모두 신난 반응이었다.
저 검이 아무리 무겁다고 해도 헌터인 그들이 들지 못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비각성자들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저 정도는 우리도 뽑을 수 있겠지?”
“깊숙이 박힌 거 같긴 한데, 힘만 제대로 주면 충분히 뽑을 수 있을 거야.”
“아, 나는 힘에 자신 없는데.”
“나도…….”
그렇게 어수선한 반응 속에서 붉은색으로 염색을 한 190cm 거구의 헌터가 앞으로 나섰다.
“아무도 안 나설 거면, 내가 가장 먼저 뽑겠다!”
거구의 헌터는 자신만만한 발걸음으로 검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인 것도 잠시, 헌터의 발걸음이 어느 순간 느려지더니, 술에 취한 것처럼 휘청거리기 시작하였다.
“우웩!”
발걸음을 멈춘 헌터가 이내 바닥을 향해 구토하기 시작하였다.
“뭐, 뭐야? 쟤 왜 저래?”
“으으. 더러워.”
모두가 의아한 얼굴로 거구의 헌터를 바라볼 때, 로렌초와 마찬가지로 정신력 시험을 담당하는 고정희가 움직였다.
작고 아담한 체격의 고정희가 거구의 헌터에게 다가가더니 한쪽으로 질질 끌고 갔다.
“와! 힘 개쎄다.”
“신체 강화 능력자인가?”
“아닐걸? 저 사람, 무공 아카데미 교관이야.”
“진짜 무공을 배우긴 해야겠네. 존나 멋있어.”
“그나저나 저 사람은 왜 저러는 거야?”
“글쎄….”
“어떡할래? 우리 같이 도전해볼까?”
“근데 그냥 검 들어 올리는 건데 이것도 도전이라고 해야 하나.”
“저 헌터 봐봐. 아직도 정신 못 차리잖아.”
“무슨 저주라도 걸린 건가…. 아무튼, 일단 시도는 해봐야겠지. 같이 가보자.”
“감독관님! 저도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저도요.”
다시금 도전자가 나왔다.
이번에는 친구로 보이는 두 명의 헌터가 동시에 도전하였다.
하지만 결과는 거구의 헌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 명은 검에 가까워지자 급격히 얼굴색이 어두워지더니,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다른 한 명은 조금 더 용기를 내봤지만, 그게 오히려 패착이었다.
거구의 헌터처럼 완전히 녹다운이 되어버린 것이다.
또 한 명의 피해자를 보며 응시생들은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럴 줄 알았어. 특기자 전형이란 게 쉽게 될 리가 없지!”
“제기랄. 정신력이라니.”
“난 포기. 나는 내가 얼마나 의지박약인지 안다고.”
몇몇 응시생들은 제대로 도전도 하지 않고 그대로 포기하였다.
심지어 그중에는 헌터도 포함되어 있었다.
조금만 다가가도 멀미를 한 것처럼 울렁거리니 도전할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응시생들의 모습을 보며 안능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나는 할 수 있을까?’
신체 능력 평가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줬던 헌터들조차 포기하는 상황이었다.
일개 비각성자인 그녀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해야만 한다. 그래야지 당당하게 무공을 배울 수 있어.’
지금의 그녀는 무엇 하나 헌터들보다 나은 것이 없었다.
마력이나 스킬이야 말할 것도 없었고 신체 능력까지 압도적으로 밀렸다.
만약 입학시험에 합격한다고 해도 그녀는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특혜를 받고 합격했다는 생각을 저버리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헌터들조차 포기한 시험을 그녀가 통과한다면 어떨까.
그때는 누구에게도 당당할 수 있으리라.
그녀 자신에게도.
마음의 결심을 내린 그녀는 더 망설이지 않고 성검 아트록스를 향해 다가왔다.
“오, 새로운 도전자다!”
“예쁘장하게 생겼는데?”
“누나, 굴욕 사진 조심하세요. 크크.”
“개꿀잼일 듯.”
응원인지, 비웃음인지 여기저기서 웅성대며 안능희를 바라봤다.
하지만 정작 안능희는 사람들의 시선을 개의치 않았다.
그저 성검, 아트록스를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성검과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그녀는 약간의 두통을 느꼈다.
거기서 조금 더 가까워지니 두통뿐 아니라, 속이 메스꺼워졌다.
점점 속이 안 좋아지자, 안능희는 잠시 발걸음을 멈칫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입술에 피가 날 정도로 강하게 깨물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마침내 흙더미 위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사실 여기까지 닿는 것은 평범한 사람도 가능하였다.
지금까지는 주로 헌터들이 도전을 해서 실패가 나왔을 뿐, 오히려 다른 시험이 망해서 특기자 전형밖에 남은 것이 없는 비각성자들이 도전하였다면 성검 근처까지는 닿을 수 있었을 거다.
문제는 검을 들어 올리는 과정이었다.
검 자루에 손을 댄다면, 너 나 할 것 없이 정신을 잃을 것이다.
비록 로렌초가 만들어낸 가짜 성검이었으나, 사용자를 가리는 그 능력만큼은 진짜였으니.
덥석.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안능희는 망설임 없이 검 자루를 손에 쥐었다.
그러자 골이 깨질 거 같은 고통이 전해졌다.
고통뿐만이 아니었다.
‘포기하자.’
‘이 정도면 많이 한 거야. 오직 나만이 성검 근처까지 왔잖아?’
‘이런 고통을 계속 느낀다면 분명히 후유증이 남을걸? 백치가 될 수도 있어!’
그녀의 마음속에서 큰 파문이 일었다.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다면서,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자기합리화적인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하였다.
평소 그녀라면 절대 하지 않을 생각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면역이 없었다.
‘여기까지인가. 하긴, 비각성자인 내가 성검을 잡았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지.’
안능희는 검 자루를 쥔 그녀의 오른손에서 점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비각성자의 몸으로 성검을 들어 올리는 것은 역시 무리였던 거 같았다.
그녀의 머릿속에 갑자기 박한새의 얼굴이 떠올랐다.
비각성자의 몸으로 S랭크 헌터보다 더 강해진 박한새.
그의 얼굴을 떠올리자 안능희의 안광에서 갑자기 강렬한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왜 나는 비각성자란 이유로 한계를 정해 놓는 거지? 비각성자도 얼마든지 헌터보다 더 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사람이 있는데!’
안능희는 다시금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아까보다 더 큰 두통이 전해졌다.
당장이라도 기절할 거 같은 고통이었다.
하지만 골이 깨질 거 같은 고통 속에서 정신은 오히려 더 뚜렷해졌다.
뚜렷해진 정신은 그녀가 해야 할 일을 명확하게 안내해주었다.
“와, 들었는데?”
“개쩐다. 저렇게 가냘파 보이는 팔뚝으로 어떻게 들었대?”
“힘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정신력이 중요하다잖아.”
“제기랄. 내가 비각성자보다 정신력이 약하다고!?”
안능희가 성검, 아트록스를 들어 올리자 여기저기서 탄성과 환호가 흘러나왔다.
마치 전설의 재림 같았다.
엑스칼리버를 뽑았던 아서왕처럼 성검을 든 그녀의 모습은 장엄하게 느껴졌다.
<비각성자의 반란? 헌터도 들지 못한 성검, 아트록스를 들어 올리다!>
<바티칸에 실제로 존재하는 S급 아이템, 아트록스. 장비 조건은 ‘고결한 정신력’.>
<성검 뽑은 여군 안능희, 알고 보니 박한새와 같은 부대 출신?>
<시청자들의 선택. 헌터 자격시험 대신 무공 아카데미 입학시험.>
무공 아카데미 입학시험은 전국적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지상파와 케이블을 가리지 않고 관련 보도를 하였는데 시청률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국내 최초, 아니 세계 최초로 열리는 무공 아카데미 입학시험이었다.
무공의 중요성은 이제 전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 더더욱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헌터 자격시험에서 늘 ‘역대급 신인’이 나왔던 것처럼, 무공 아카데미 입학시험에서도 괴물 신인들이 여럿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중 첫 스타트를 끊은 인물이 바로 안능희였다.
비각성자, 미인, 여군 등.
여러 화제를 가진 그녀는 최초로 성검 아트록스를 들어 올리면서 순식간에 전국적인 인지도를 가진 유명인이 되었다.
하루가 지난 지금까지도 성검 아트록스를 뽑은 사람은 없었으니 그녀의 인지도는 더욱더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설마 그녀가 가장 먼저 성검을 들어 올릴 줄이야.’
그녀의 과거를 알았고 미래를 아는 나였기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무공을 배운 미래의 그녀는 국방부의 마스코트이자, 비각성자들의 희망으로 불렸었다.
그래서 사실 시험장에서 그녀를 본 순간, 그녀의 합격을 기정사실화하기도 했었다.
그녀가 무공의 자질을 가진 것을 아는데, 뽑지 않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하게 무공의 자질만 갖춘 것이 아니라, 이토록 강인한 정신력까지 갖췄을 줄은 몰랐다.
“역시 사람 보는 눈이 대단하십니다. 사부님이 눈여겨보라는 사람이 가장 먼저 성검을 들어 올리다니.”
강충구가 옆에서 감탄하는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러자 나는 아무 말 없이 웃어 보였다.
안능희가 성검 아트록스를 들어 올릴 것이라고는 나 역시 예상하지 못했던 일.
그래서인지 살짝 민망하기도 하였다.
“그나저나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비각성자가 이렇게 전국적인 주목을 받으니 뭔가 저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거 같습니다.”
같은 비각성자 입장에서는 확실히 안능희의 활약이 긍정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을 거다.
안 그래도 헌터들 사이에서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왜 굳이 던전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자질도 부족한 비각성자를 1,000명이나 받냐는 지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안능희가 활약해주니 많은 비각성자들에게 힘이 되고 있었다.
“아카데미 들어오고서도 헌터들에게 밀리지 않고 수업에 잘 따라오겠죠?”
솔직하게 말하면 비각성자들이 헌터의 속도를 따라가긴 힘들 것이다.
아무리 무공의 자질을 갖춘 비각성자 위주로 뽑았다 해도, 기본적으로 피지컬 차이가 워낙에 컸으니까.
헌터들이라고 자질이 부족한 이들만 뽑은 것이 아니기도 했고 말이다.
“헌터들의 진도를 따라갈 수는 없을 거다.”
“단, 이거는 확실하다. 무공을 배우지 않은 헌터들이 다시는 비각성자를 무시할 일은 없을 거란 사실 말이야.”
민병관.
그는 왜소한 체격의 사내였다.
하지만 팔만큼은 비정상적으로 길었는데, 거의 발목에 닿을 정도였다.
“역시 군인은 다르긴 다른가 봐. 헌터들도 들지 못한 걸 들어 버리네.”
“그래봤자 헌터가 아니라서 아이템 능력은 못 사용하잖아.”
“그게 뭔 상관이야. 이제 무공을 배우게 될 텐데.”
“뭐, 그건 그렇지.”
거리를 걷던 민병관은 사람들이 안능희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민병관은 이를 갈았다.
그 역시 같은 비각성자이니 안능희의 활약을 응원하는 게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민병관은 안능희의 활약에 오히려 불쾌감을 느꼈다.
마치 자신의 것을 빼앗긴 느낌이었다.
“성검? 그까짓 거, 이 팔만 있으면 나라고 들지 못할 이유가 없다!”
장갑을 벗자, 마치 짐승의 손처럼 털로 뒤덮인 징그러운 손등이 보였다.
만약 거리를 지나던 사람들이 그의 손등을 봤으면 비명을 질렀을 것이 분명하였다.
하지만 민병관은 그런 사실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신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성검을 뽑아 영웅이 되어주마. 그리고… 날 무시했던 놈들, 한 놈도 빠짐없이 두 눈을 뽑고 사지를 잘라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