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지축을 울리며 등장한 것은 다름 아닌, 호랑이 인간이었다.
“람파고군.”
나는 호랑이와 인간이 합쳐진 그것을 보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두 사람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알았지? 한국에는 존재하지 않는 몬스터인데 말이야.”
“던전에 들어온 것도 그렇고, 람파고를 아는 것도 그렇고,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란 말이지.”
“그렇기에 이 자리에서 반드시 죽여야 한다.”
“늙은이, 그건 맡겨두라고. 람파고가 온 이상 박한새도 두렵지 않으니까.”
루드밀라가 갑자기 활을 소환해서는 나를 겨누었다.
뒤에는 호랑이 인간, 앞에는 활을 든 고랭크 헌터.
나를 모르는 이가 이 상황을 봤으면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라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나는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다.
‘이 시기 루드밀라의 무력 수준이 어떠한지는 이미 파악이 끝난 상태다.’
내가 사람들을 가르칠 때, 가장 중시하는 점이 상대를 파악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말도 있듯, 적에 대해 잘 알면 패하지 않는 법이었다.
특히 무공의 경우, 다채로운 활용이 가능하였다.
원거리가 약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절정 고수가 되면 그런 제약도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편.
그리고 상대의 능력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는 지금의 나는 위기감을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
‘람파고야 수백 마리도 잡아본 나다.’
6성급 던전 보스 수준의 무력을 가진 게 람파고였다.
S랭크 헌터에게도 람파고는 위협적인 몬스터였다.
강철보다 단단한 방어력과 날렵한 민첩성, 트롤에 버금가는 신체 재생 능력까지.
람파고는 S랭크 헌터 중에서도 마치 딜탱 헌터를 상대하는 것만큼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아마 오태호가 조종하는 람파고라면 더더욱 위협적일 것이다.
이성이 없는 몬스터가 이성까지 갖춘 셈이니.
하지만 내가 봤을 때, 람파고는 절정 고수의 하위호환에 불과하였다.
초일류 무인을 상대하는 느낌이랄까.
‘루드밀라도 마찬가지지.’
예전이었으면 까다로웠을 거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내공만 2갑자 이상을 보유한 상태.
육체의 완성도는 아쉬웠지만, 회귀 전의 무력은 거의 다 회복한 상태였기에 루드밀라쯤은 전혀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죽어라. 박한새.”
루드밀라가 활시위를 놓았다.
그녀의 손에서 쏘아진 화살은 마치 분신술을 쓴 듯, 수십, 수백 개의 화살이 되었다.
정면으로 수백 개의 화살이 날아오는 상황에서도 나는 보법을 펼쳤다.
면에 해당하는 공격도 보법으로 피하자면 못 피할 것도 없었다.
화살처럼 점에 해당하는 공격이라면 말할 것도 없으리라.
휘이익! 휘이익!
내 귀를 스치는 루드밀라의 화살들.
확실히 위협적이었다.
웬만한 헌터들은 루드밀라의 화살을 한 방만 맞아도 치명상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심지어 루드밀라의 화살은 폭발하기까지 하였다.
내가 보법으로 화살 세례를 피하니 그대로 모든 화살을 폭발시킨 것이었다.
미처 화살 세례를 다 피하기 전에 폭발된 상황이었기에 보법으로도 폭발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에겐 보법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검막.
배리어라는 스킬처럼, 무공의 기술 중에서도 방어 전용의 기술이 있었다.
그게 바로 검막이었다.
퉁. 퉁. 퉁.
루드밀라가 쏘아낸 화살 폭탄은 내 검막을 두들기기만 할 뿐, 정작 나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하였다.
그렇게 화살 공격을 막았다 싶을 때, 타이밍 맞게 람파고가 공격하였다.
물론 제 딴에는 은밀한 기습이었을 거다.
람파고는 거대한 외형과 다르게 기습에 능한 몬스터였고 전투 중에도 기습을 곧잘 활용하였다.
하지만 람파고는, 아니 람파고를 조종하는 오태호는 몰랐을 거다.
지금이 딱 내가 노리던 상황이란 사실을.
포효를 내지르며 나에게 얼굴을 들이밀던 람파고의 목에 혈선 하나가 그어졌다.
몇 발자국 더 움직이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는 람파고였다.
그리고 쓰러진 람파고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다.
목이 잘렸으니 일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 말도 안 돼! 람파고를 저렇게 쉽게 잡는다고?”
람파고는 반사신경과 동체 시력, 심지어 육감이라 부를 만한 능력까지 가지고 있었다.
살기를 느끼면 재빠르게 공격을 피하는 것이 람파고의 특기였다.
괜히 S랭크 헌터가 잡기 까다로워하는 몬스터가 아니었던 것.
하지만 그런 람파고도 내 상대는 아니었다.
물론 신궁이라 불리는 루드밀라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람파고의 죽음에 비명을 지르던 루드밀라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 얼굴은 그대로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일말의 망설임 없이 루드밀라의 목을 베어낸 나는 오태호에게 검을 겨누었다.
“허. 강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박한새, 네놈은 여명회 최대의 적이 되겠구나.”
시답지 않은 유언을 남기는 그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바퀴벌레마냥 강한 생존력을 보여주던 그도 최후의 은신처인 육각도 던전에서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커헉.”
그렇게 생을 마감한 오태호의 모습을 나는 무덤덤하게 바라봤다.
‘이제 이놈도 죽여야겠군.’
혹시 몰라 던전 안으로 끌고 왔던 팔콘이란 사내.
오태호까지 잡은 이상 그를 살려둘 이유는 없었다.
파다닥!
마치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린 듯, 정신을 차리자마자 날개를 펼치고 도주하려는 팔콘이었다.
하지만 그걸 내가 가만히 지켜볼 리가 없었다.
그가 날아오른 하늘을 향해 높이 도약하였다.
그러자 순식간에 그와의 거리가 좁혀지더니, 검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피했군.”
팔콘은 간신히 내 공격을 회피하여 목숨을 건져냈다.
물론 날개를 잃은 상태에서 잠깐 목숨을 건진 것은 그에게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었다.
“나, 나를 죽이면 나의 주군께서 가만있지 않으실 거다.”
바닥을 나뒹굴던 팔콘이 협박하듯 그같이 말하였다.
“주군이라면 7사도를 말하는 건가?”
“…!”
내가 7사도를 거론하자 팔콘이 눈을 부릅떴다.
“네, 네놈이 나의 주군이 누구인지 어떻게 안 거지?”
“적을 파악하는 것은 전쟁의 기본이다.”
“전쟁이라고…? 우리를 상대로 네가 감히?”
‘감히’라….
확실히 지금의 나로선 엄두도 내기 힘든 것이 여명회란 세력이었다.
여명회는 그만큼 거대하고 강대한 세력이었으니.
‘하지만 나는 계속 성장할 거다.’
절정 고수, 그 이상의 경지에 언젠가 도달할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무인들도 계속해서 양성할 것이고 말이다.
경지를 높이고 무인 양성까지 계획대로 성공한다면 여명회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내가 죽으면 나의 주군께서 바로 너에게 복수할 거다.”
“살려주면 복수하지 않을 것처럼 말하는군.”
“날 살려주면 주군을 스승으로 모실 기회를 주겠다.”
“나보고 7사도를 스승으로 모시란 말이냐?”
“너에게도 나쁘지 않은 기회일 거다. 무공이란 비전을 우리에게 알려주면 너는 단숨에 세계를…!”
더 들어줄 필요가 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놈의 목을 베었다.
“7사도가 부하의 복수를 한다고? 그것부터 일단 말이 안 되는 소리야.”
내가 아는 7사도는 절대 남을 위해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었다.
자신의 충실한 수하가 누군가의 손에 의해 죽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팔콘의 죽음과 관계없이 7사도와의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7사도는 무공을 원하고 나는 여명회의 멸망을 원하니까.
‘올 테면 언제든지 와라. 오는 족족 죽여주마.’
오는 것을 막기만 하는 것도 잠깐뿐이었다.
모든 준비가 갖추어진 그날.
반격을 시작할 거다.
7사도뿐만이 아닌, 여명회 전체를 향한 반격을.
위치 : 전라남도 신안군 임자면 육각도.
지형 : 저위 평지(13.2%), 저위 산지(52.8%), 중위 산지(22.4%), 고위 미경사지(11.6%)
몬스터 도감 : 람파고, 자이언트 스파이더, 발로그.
던전 점유율 : 심연을 들여다보는 자(93.9%), 무에서 무를 이룬 자(0.1%)
회귀하기 전에는 이성은이 왜 그렇게 던전을 열심히 다니는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가 가진 무공의 재능을 생각하면 던전에서 사냥하는 것보다 가만히 무공을 수련하는 게 훨씬 더 성취가 클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알았다.
노홍만과 유지은 덕에 던전의 소유권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던 것이다.
던전.
그것은 한 세계의 파편이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성좌들의 고향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자신의 고향이었던 세계의 파편을 갖게 되면 그 성좌는 더 강한 힘을 갖게 되지.’
파롤이 노리는 이 육각도 던전도 아마 파롤의 고향일 것이다.
만약 이곳을 파롤이 먹게 된다면 파롤의 힘은 더욱더 강대해진다는 의미.
‘93.9%라. 조금만 더 지체했으면 위험할 뻔했군.’
회귀 전에는 아마 이성은에 의해 육각도 던전을 장악하는 데 실패했을 거다.
이성은이 다른 나라도 아니고 한국에서 파롤 소유의 던전이 생겨나는 것을 가만히 방관했을 리는 없을 테니까.
‘그런데 심연을 들여다보는 자라고? 파롤의 칭호치고는 생각보다 악의에 차있지는 않군.’
무슨무슨 마왕이라든가.
세상을 도탄에 빠뜨리는 자라든가.
그런 거창한 칭호를 가지고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어쨌든, 파롤이 던전을 먹는 것도 대비해야겠어.”
회귀 전에 내가 상대한 파롤은 본신의 힘을 완전히 되찾지 못한 상태였다.
이성은이 회귀하고 줄곧 해온 것이 파롤의 힘을 약화하는 일이었으니.
즉, 지금 상태로 가만히 놔둔다면 회귀 전의 파롤보다 훨씬 더 강한 파롤을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파롤이 세계 각국에서 던전을 집어삼키는 것도 견제할 필요가 있으리라.
원희수.
그는 얼마 전까지 평범하기 그지없는 D랭크 헌터였다.
특별한 스킬도 없었고 그렇다 해서 피지컬이 남다른 것도 아니었다.
나이에 비해 랭크는 높은 편이지만, 그래봤자 그의 한계는 명확하였다.
아마 10년 정도 열심히 일하면 C랭크 헌터가 될 수도 있고, 어쩌면 중소 길드인 진달래 길드에서 간부가 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평범한 미래가 예정되어 있던 원희수의 미래는 극적으로 바뀌었다.
‘내, 내가 무공 아카데미 입학시험에 합격하다니!’
길드장의 장남이란 이유로 후계자 소리를 들으며 망나니처럼 굴던 나진상도.
진달래 길드에서 유일한 B랭크 헌터인 부길드장까지도.
길드 내의 그 어떤 이도 무공 아카데미에 합격하지 못하였다.
원희수 그는, 진달래 길드에서 혼자 유일하게 무공 아카데미에 합격한 것이었다.
“희수야! 나는 네가 될 줄 알았다!”
“암! 우리 희수처럼 인성 좋은 애가 어디 있다고!”
“인성만 좋은 게 아니죠, 형님. 희수, 잠재력도 대단한 아이입니다.”
“그건 그렇지. 우리 희수,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길드 제일의 유망주였잖아.”
평소엔 그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던 길드의 중역들이었다.
그저 말 잘 듣는 후배라고만 생각하였다.
하지만 길드 내에서 그 혼자 무공 아카데미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그들의 반응은 확연하게 달라졌다.
마치 아끼던 후배 대하듯 원희수를 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가 유망주 소리를 다 듣다니!’
그는 맹세코 단 한 번도 ‘유망주’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E랭크로 출발한 그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
그런데 우습게도 무공 아카데미 입학시험에 합격했다는 소문이 돌자마자 그는 길드의 중역들로부터 유망주란 소리를 듣기 시작하였다.
후배들조차 그를 우러러볼 정도였다.
“희수야. 요즘 여자친구를 많이 못 봤다던데, 내가 오성 호텔 예약해놨으니 여자친구 데리고 갔다 와! 입학하면 더 바빠질 텐데, 지금 즐겨야지!”
심지어 늘 권위적인 모습을 보여줬던 길드장까지 그에게 친근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지금도 이런데 무공을 익히고 나면 내 인생이 얼마나 달라질까?’
원희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서 빨리 무공 아카데미가 개교하였으면 하는 바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