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진수호의 입에서 이성은의 이름이 나온 순간, 나는 몸이 움찔하는 것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회귀자가 아닌 이성은도 진수호 길드장과 연이 있었던 건가.’
이건 몰랐던 사실이었다.
지금의 이성은은 일개 B랭크 헌터, 아니 불과 얼마 전에 A랭크 헌터가 된 이였다.
S랭크 헌터이자, 한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길드인 오성 길드의 길드장 진수호와 연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물론 내게 있어 그 사실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성은, 그의 행적이었다.
“이성은, 그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가 누군지 아는 건가?”
“한때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유망주 아닙니까?”
이성은은 성좌, 카펠라의 선택을 받기 이전에도 유명한 헌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각성할 때부터 그의 랭크는 B였다.
B랭크 헌터로 출발하는 경우, 대부분이 A랭크는 찍고 일부는 S랭크까지 가는 것을 생각하면 유명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성은은 현재 중동에 있다.”
“중동 말씀입니까.”
중동이라니.
‘그래서 내가 못 찾았군.’
회귀하고 나서 나는 이성은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을 하였었다.
이성은은 헌터의 자질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무공의 자질 또한 천재 그 자체였다.
그렇기에 설령 그가 회귀자가 아니어도 이성은은 반드시 포섭해야 할 인재였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이성은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뭐 외국에 있을 거라는 건 예상했었다. 이 시기의 이성은은 한창 카펠라 성좌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때이니 말이야.’
이성은은 가끔 내게 자신이 회귀하기 이전의 삶도 이야기해주고는 했었다.
물론 그때의 나는 그가 회귀했다는 말을 믿지 않아 제대로 듣지는 않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게 맞다면 현재 그는 카펠라 성좌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거다.
“중동에서 던전 하나를 지키고 있다. 성좌와 관련된 거 같은데, 던전을 지켜야 해서 중동을 떠날 수 없다더군.”
진수호의 말에 나는 쓰게 웃었다.
예전 같았으면 왜 던전을 지키냐고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던전의 가치를 아는 지금은 이유를 알 거 같았다.
아마 그가 지키는 던전은 카펠라의 세계의 파편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왜 저에게 부탁하면서까지 그에게 무공을 가르치려고 하십니까?”
“이성은은 내가 인정하는 몇 안 되는 헌터기 때문이다.”
벌써 진수호의 인정을 받다니.
이성은의 재능은 확실히 대단한 거 같았다.
“어떻게 할 건가? 그자에게 무공을 가르쳐주기로 약속한다면 나도 자네의 부탁을 하나 정도는 들어주지.”
이런 말까지 할 정도면 이성은과의 관계가 돈독하기는 한 거 같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에게 긍정의 답변을 전해줄 수 없었다.
“그는 중동을 떠날 수 없는 몸이고 저는 한국을 떠날 수 없는 몸입니다.”
“흠. 그건 그렇군.”
이성은의 천재적인 재능을 생각하면 그에게 무공을 가르치긴 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이성은이 귀한 인재라고 해도 지금같이 중요한 시기에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다.
무공 아카데미의 토대를 마련해야 할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진수호 길드장이 한 달만 더 빨리 찾아왔어도 중동에 가는 건데.’
여명회의 한국 지부를 처리하고 시간이 조금 남았었는데, 그때 후딱 중동에 갔다 왔으면 좋았을 것을.
괜히 아쉽게만 느껴졌다.
“단, 여력이 생기면 제가 직접 가거나 아니면 저의 제자를 보내겠습니다.”
이성은 같은 인재는 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어렵지만, 몇 달 정도 뒤에는 여력이 생길 터.
그때 내가 직접 가든가, 다른 교수를 시켜서 이성은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게 좋을 거 같았다.
“그런데 진수호 길드장님은 무공을 배우실 생각이 없습니까?”
이성은 못지않게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재가 진수호였다.
그 역시 회귀 전, 절정 고수로서 이름을 떨친 자였으니까.
“생각이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지난번 자네와 대련을 했을 때 이미 무공의 힘을 뼈저리게 느꼈으니 말이야.”
내가 회귀하고서 처음이자 마지막 패배를 경험한 상대가 바로 진수호였다.
하지만 진수호 입장에서는 오히려 자신의 패배로 기억되고 있을 거다.
비각성자에 불과했던 내가 그와 거의 박빙의 승부를 펼쳤었으니까.
“근데 나는 내 힘으로 해보고 싶다. 누구에게 의지하는 것은 딱 질색이라서 말이지.”
“새로운 무공을 만들어내겠다는 말씀입니까?”
“무공이라. 글쎄, 새로운 마력 운용법을 만들 생각이긴 한데, 그걸 무공이라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군.”
“그 표정은 뭐지? 자네는 했으면서, 나는 못 할 것으로 생각하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만.”
솔직히 말하면 미련하게 느껴졌다.
굳이 제대로 된 길이 있는데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
무공만 배우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해질 텐데 말이다.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지. 그가 무공보다 더 효율이 좋은 마력 운용법을 만들어낼 수도.’
물론 그럴 가능성은 적었다.
무공보다 더 좋은 선택지가 있었으면 이성은이 선택하지 않았을 리 만무하니.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겁니다. 어쩌면 실패할 수도 있고 말입니다.”
“무공이라는 훌륭한 참고서가 있는 한,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렇습니까.”
“새로운 마력 운용법을 만들어 언젠가 자네에게 도전할 생각이야. 그러니 지금 당장 나를 넘어섰다고 너무 안심하지 말라고.”
“제가 길드장님을 넘어섰다니요. 전 그렇게 오만하지 않습니다.”
“자네의 기운은 이미 나를 넘어섰다는 듯, 바다처럼 넘실거리는데?”
“아무튼, 이성은이란 자에 대해 잘 생각해주길 바라네. 내가 강력하게 추천하는 인재니 말이야.”
“예, 머릿속에 담아놓겠습니다.”
머릿속에 담아놓는 거뿐이랴.
시간만 나면 바로 영입할 생각이었다.
“난 반드시 한국에 가서 무공을 배우고 말 거야!”
야마구치 스토무.
그는 무공 아카데미라는 것이 생기자마자, 누구의 의견도 묻지 않고 국제 헌터 협회에 입학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이런 그에게 동료 헌터들은 말했다.
비각성자, 그것도 한국의 비각성자에게 무언가를 배우는 게 자존심 상하지도 않냐고.
하지만 야마구치 스토무의 생각은 달랐다.
무공이란 이제 부정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괜한 자존심을 세운다면?
순식간에 도태되어 설 자리를 잃고 말리라.
‘반면 제때 기회를 잡는다면 일본의 일인자가 되는 것도 가능하다!’
그는 보통의 헌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한 스케일을 가진 야심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 제일의 헌터가 되고야 말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랭크로는 일본 제일의 헌터가 되는 것은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야마구치 스토무의 랭크는 겨우 C였으니.
‘무공만 익힌다면 그까짓 랭크쯤이야….’
비각성자가 S랭크 헌터도 이기는 시대였다.
그 역시 무공을 배운다면 기존의 랭크 체계를 뒤흔드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후후, 나를 실컷 비웃어라. 하지만 내가 일본으로 귀환하는 날, 너희는 나를 경배하게 될 것이다!”
야마구치 스토무는 무공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전, 무공 아카데미 교수진에 대해 많은 조사를 해왔다.
“유현경 조교수님 아니무니까!”
“누구…?”
“저는 일본에서 온 야마구치 스토무라고 하무니다!”
유현경.
조교수, 부교수, 정교수로 이어지는 직급에서 유현경은 가장 말단인 조교수였다.
박한새의 밑에서 오랜 시간 배운 사람치고 조교수면 성취가 낮다는 사실을 의미하였다.
하지만 야마구치 스토무가 조사한 결과, 유현경은 조교수란 이유로 무시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박한새 총장이 천재라 칭했다는 소문이 있는 여자다!’
무려 박한새에게 천재라는 말을 들을 정도면 얼마나 재능이 뛰어난 것일까?
게으르다는 평가도 있었는데, 아마 그 게으른 성격만 아니었으면 정교수도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야마구치 스토무라. 택배로 이상한 거 하나 보낸 일본인이 있었는데, 그게 자네인가?”
야마구치 스토무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신이 선물을 주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니.
이건 좋은 징조였다!
“도이치(독일)의 던전 무구 명가인 크루프사에서 만든 시가이무니다! 그 시가로 흡연하면 마력이 상승하무니다!”
무공 아카데미에 대해 많은 조사를 한 그는 유현경이 흡연자란 사실도 알아냈다.
시가를 선택한 것도 그녀가 애연가라는 사실을 노린 것이었다.
“쓸데없는 짓을 했군.”
“하이?”
하지만 예상했던 것과 달리, 유현경의 반응은 퉁명스러웠다.
“나한테 뇌물 줘봤자 아무런 소용 없어. 안 그래도 사부님 눈치 보이는데, 내가 애먼 짓을 할 거 같아? 이딴 쓸데없는 짓을 할 시간에 열심히 수련할 생각이나 해.”
“재손하무니다! 제 생각이 짧았수무니다!”
예상했던 것과 다른 반응이 나왔지만, 야마구치 스토무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반성하는 표정을 짓고서 그녀에게 바로 사과하였다.
그러자 유현경이 의외라는 눈으로 쳐다봤다.
“그래도 생각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야. 시가는 내가 돌려주도록 하지.”
“저는 비흡연자이무니다!”
야마구치 스토무의 처세술이 통한 것일까?
유현경이 한결 온화해진 얼굴로 그에게 조언하였다.
“총장님은 영악한 자보다 우직한 자를 더 좋아한다. 잘 알아둬.”
“하이! 알겠수무니다!”
“다음에 또 보자.”
그런 유현경을 보며 야마구치 스토무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설마 이 녀석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그러게. 크큭. 왜, 너도 몰랐지?”
“근데 이놈도 웃겨. 비각성자 주제에 괜한 욕심이나 부리고 말이야. 왜, 무공을 배우면 우리에게 복수라도 할 수 있을 줄 알았어?”
“야, 혹시 몰라. 이놈도 절정 고수가 될지.”
“그러면 절정 고수 못 되게 존나 망가뜨려야겠는데?”
뒤에서 소란이 일어나자 야마구치 스토무는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였다.
‘이지메인가.’
헌터로 보이는 두 명의 학생이 왜소한 체격의 사내를 괴롭히고 있었다.
왜소한 체격의 사내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것을 보면 이미 몇 대 맞은 모양.
그가 만약 정의로운 사람이었으면 왜소한 체격의 사내를 구하기 위해 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는 정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한국의 헌터들과 시비를 벌여서 좋을 게 없다.’
무공 아카데미의 입학생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져 있었다.
한국 헌터, 한국 비각성자, 그리고 야마구치 스토무가 포함되어 있는 외국 헌터.
그리고 이렇게 세 가지 부류 중, 가장 힘이 센 쪽은 한국 헌터였다.
그도 그럴 것이 홈이라는 어드밴티지에 교수진과 인맥을 형성한 이들도 적지 않았던 까닭이다.
“지금 뭣들 하시는 겁니까?”
“넌 뭐야?”
“싸우시는 거 같은데, 여기는 신성한 학교입니다.”
“너 랭크 몇이냐?”
“제 랭크는 왜 묻습니까?”
“나 C랭크인데 너 감당할 수 있겠어?”
“크큭! 참고로 나도 C랭크다.”
왕따 피해자를 구하기 위해 나섰던 헌터는 두 사람이 C랭크 헌터라고 밝히자 주춤하고 말았다.
E랭크 헌터인 그로선 C랭크 헌터에게 맞설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별것도 아닌 게 깝치고 있어.”
“그러니까. 같은 학교에 들어왔다고 같은 레벨이 되었다, 착각하는 건가?”
그렇게 또 한 명의 피해자가 생기려던 순간이었다.
“그만하십시오.”
“이년, 그 여군인 거 같은데? 박한새와 같은 부대 출신이었다던.”
“아 그, 안능희인지 뭔지 이상한 이름 가진 년?”
왕따 가해자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야마구치 스토무는 눈을 빛냈다.
‘저 여자가 바로 그 안능희라고?’
박한새에 대해 조사하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이름 중 하나가 안능희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박한새와 같은 부대 출신이라는 유니크한 이력이 있는 여성이었으니까.
심지어 군 시절 때, 그렇고 그런 관계였다는 소문도 있었고 말이다.
‘만약 그 소문이 맞다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어쩌면 안능희와의 인맥이 교수진과의 인맥보다 훨씬 중요할 수도 있었다.
무려 무공 아카데미의 총장, 박한새와 이어질 수도 있는 인맥이었으니.
마침 세 사람의 신경전이 절정에 달하였다.
야마구치 스토무는 더 망설이지 않고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