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왕 의장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왕자성의 상태를 본 연맹 간부들은 경악하였다.
그야말로 피 칠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비단 부단주의 힘은 예상보다 훨씬 강했소. 커헉.”
“괘, 괜찮으십니까?”
말을 하던 왕자성이 피를 토하였다.
그만큼 그가 입은 피해는 상당했던 것이다.
결국 그를 병실로 옮긴 연맹 간부들은 곧장 대책회의에 나섰다.
“허어! 왕자성 대협이 적비단의 부단주에게 패배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겁니까? 부단주라고 해봤자, 당연히 왕 의장님의 무력에 못 미치는 게 정상인데….”
“살아남은 홍곤들이 전해주기를, 샤오펑의 무력이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고 합니다.”
“더 강해졌다니. S랭크급 강자가 그렇게 단기간에 강해질 수도 있는 겁니까?”
“적비단의 배후를 생각하면 아무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누군가가 적비단의 배후를 거론하자 여기저기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적비단의 뒤에 거대한 배후가 있다는 사실은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배후가 없고서야 그렇게 빨리 세력을 확장할 수는 없을 테니까.
무엇보다 그들이 공급하는 펜테리움 자체가 전 세계적으로 유통되고 있는 마약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배후가 가진 힘이 그 정도일 줄은….”
“적비단이 저런 미친 짓을 하는데 언론과 정부가 조용한 것을 보십시오. 저들의 배후가 가진 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입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여명회의 힘은 상식을 초월한 수준이었다.
다른 성좌 세력이 대부분 던전 점유율을 높이는 것에 혈안이라면 여명회는 던전 점유율을 높이는 동시에 각국의 정치권력도 노렸다.
중국과 대만 등에서는 최고 권력자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이제 어쩌면 좋습니까?”
“지금이라도 적비단에게 항복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항복을 받아줄 거 같습니까? 적비단은 연맹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민간인조차 학살하는 미친놈들입니다!”
적비단은 잔혹하였다.
적에게는 더더욱 잔혹하였는데 마치 과거의 제국들이 역모죄를 다스릴 때 구족을 멸했던 것처럼, 적이라 판명된 이와 연관된 사람들은 그 관계가 깊든, 깊지 않든 모조리 죽였다.
이번에 가오슝현의 상점가에서도 그들의 가족, 지인 등이 죽임을 당하였다.
그야말로 국제 여론조차 신경 쓰지 않는 무자비한 자들이었다.
“일단 지금으로선 왕자성 대협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거 같습니다.”
“제아무리 왕 의장이라도 지금 상황에서 뾰족한 수가 있겠소? 부단주 한 명을 이기지 못했는데….”
“왕자성 대협은 그린스킨 소속이지 않습니까.”
연맹 간부들은 결국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고 왕자성이 몸을 회복하기만을 기다렸다.
아무리 일개 부단주에게 패배했다고는 해도 왕자성만이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것이다.
왕자성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자신을 믿고 따랐던 홍곤들의 죽음과 한때 연인이었던 여성의 죽음까지.
적비단의 만행은 그를 분노하게 하였다.
마음 같아서는 다시 가오슝현으로 가서 적비단과 한바탕 싸우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막상 분노를 표출하기에는 적비단의 힘이 너무 강력하였다.
“연맹 지도부에서는 어떤 방법을 제시했습니까?”
왕자성은 ‘혹시’ 하는 생각에 간부들을 향해 물었다.
물론 엄청난 해결책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연맹에서 S랭크 헌터는 왕자성 한 명뿐이었다.
반면 적비단은 단주부터 세 명의 부단주까지, 무려 4명이나 되는 S랭크급 강자가 있었다.
그 아래 전력도 무시무시하였는데, 왕자성의 세력은 질에서도 밀렸고 양에서도 밀렸다.
이런 상황에서 엄청난 해결책을 제시하기는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외부에서 조력자를 찾아야 할 거 같습니다.”
“외부라면 국제 헌터 협회에라도 도움을 요청하란 말입니까?”
국제 헌터 협회가 과연 그들을 도울까?
협회장인 제니퍼로 인해 조금씩 바뀌는 모습을 보여가고 있다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인식에서 국제 헌터 협회는 ‘가진 자’의 편이었다.
강대국 출신 헌터들의 이권을 보호하기 위한 단체랄까?
“그린스킨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겠습니까?”
간부들도 국제 헌터 협회의 도움을 받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다른 단체의 이름을 꺼냈다.
하지만 ‘그린스킨’이란 말을 들은 왕자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도 당연히 그린스킨의 도움을 받고 싶었다.
왕자성 본인부터가 그린스킨 소속이었으니.
‘문제는 그린스킨이 나설 리 없다는 거지. 녹색 예언자께서는 인간의 일에 크게 관심이 없으니까.’
성좌뿐만이 아닌, 다른 동료들 역시 그를 도울 리 없었다.
그린스킨 소속의 헌터들은 철저한 개인주의였다.
적대 세력과의 전쟁이라면 모를까, 왕자성 본인이 ‘쓸데없는’ 행동을 벌여 생긴 일이었으니 그들이 개입할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한국의 대종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왕자성이 고개를 젓자, 간부 중 한 명이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을 거론하였다.
“박한새 대종사에게 말이요?”
“무공 아카데미란 곳에는 S랭크 헌터가 무려 여섯 명이나 소속되어 있다고 합니다.”
“여섯 명이나?”
S랭크 헌터를 여섯 명이나 보유했다는 말에 간부들은 매우 놀랐다.
공식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당연히 적비단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세력일 거라고 예상하였다.
그런데 그보다 더 강대한 세력이 바로 옆 나라에 있었을 줄이야.
“그뿐만이 아닙니다. 대종사 본인은 랭크 측정 불가의 고수입니다. S랭크 헌터 여럿도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을 가졌을 겁니다.”
“흐음.”
왕자성은 침음을 삼켰다.
박한새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
그도 나름대로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중국에서 흔히 10배 과장하여 말하듯, 박한새의 무력에 대한 평가가 10배 이상 과장되었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하지만 설령 박한새 본인의 무력이 10배 과장되었다고 해도, 그의 세력이 강맹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 않은가.
만약 박한새의 도움을 받는다면 적비단과의 전쟁도 승산이 없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단 아주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도무지 현실성이 없다는 점이었다.
‘돈이면 돈, 명예면 명예, 모든 것을 가진 대종사를 과연 어떻게 설득해야 한단 말인가.’
무공의 창시자로 알려진 박한새였다.
그런 그가 돈에 얽매일 리는 없었다.
명예는 말할 것도 없었고.
하지만 지금의 그가 힘을 빌릴 수 있는 사람은 박한새뿐이었다.
설령 국제 헌터 협회가 말도 안 되게 그들을 돕는다고 해도 협회의 도움만으로 적비단을 무찌르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까.
“한번 해봅시다.”
고민하고 또 고민하던 왕자성은 결국 간부의 말에 동의를 표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적비단에 대항할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힘으로 적비단에 대적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아직까진 모든 게 순조롭다.’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회귀 전에는 우여곡절이 많았었는데, 이번에는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교수들의 전문성도 나무랄 게 없었고 학생들 역시도 수업에 잘 따라오고 있었다.
바깥의 사람들은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는 비각성자들도 나름대로 성과를 보는 중이었다.
‘능희 씨는 헌터밖에 없는 20반에서도 잘 적응하고 있군.’
한동안 그녀를 소대장이라 불렀지만, 지금 그녀는 중대장인 데다 무공 아카데미 학생 신분이었다.
언제까지 소대장이라 부를 수는 없었기에 그녀를 ‘능희 씨’라 부르는 중이었다.
‘뭐 내가 보지 못하는 어려움은 분명 있겠지.’
겉으론 잘 적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수십 명의 헌터들 사이에 그녀 혼자 비각성자였다.
나름대로 인성이 좋은 헌터들을 뽑았다지만, 원래 사람은 자신과 다른 것에 배타적인 법이었다.
특히 20반의 경우, 헌터들 사이에서 가장 진도가 느린 이들이기에 아득바득 쫓아오는 비각성자의 존재가 거슬리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일단 능희 씨를 믿어보자.’
주기적으로 그녀의 무공 수준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아직은 순조롭게 성장하고 있었으니, 지금으로선 그녀를 믿고 기다리는 게 좋을 거 같았다.
“중국에서 S랭크 헌터가 찾아왔습니다.”
혼자 상념에 잠겨있던 나에게 강충구가 그와 같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이름이 뭐야?”
“그린스킨 소속의 왕자성이란 사람입니다.”
“그린스킨 소속이라….”
‘무공을 배우러 온 것인가?’
노홍만에게서 아무런 이야기가 없었기에 나로선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직접 만나볼 수밖에.’
그린스킨 소속이라고 해서 나는 노홍만 같은 외모를 상상했었다.
원래 그린스킨의 멤버들은 우락부락한 체형의 소유자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하지만 왕자성이라는 그린스킨 소속 S랭크 헌터의 외모는 내가 생각한 외모와 전혀 달랐다.
키는 노홍만과 비슷하게 2m에 근접하였다.
그런데 외모는 선이 고운 얼굴에 쭉 뻗은 콧등까지.
남자다운 외모의 노홍만과 달리, 왕자성은 한마디로 말해 꽃미남 스타일이었다.
“대협!”
털썩.
그리고 웬만한 연예인보다 잘생긴 그 S랭크 헌터가 갑자기 나에게 무릎을 꿇었다.
내가 인사를 건네기 무섭게 다짜고짜 무릎을 꿇은 것이다.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대협!”
“부탁드립니다!”
잘생긴 S랭크 헌터, 왕자성이 무릎을 꿇자 그의 수하로 보이는 이들이 따라서 무릎을 꿇었다.
나는 잠시 당황하다가 그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그러자 왕자성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열변을 토하였다.
물론 중국어로 열변을 토하고 있었기에 나는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여 통역가의 말을 가만히 기다렸다.
“한국에서 펜테리움을 유통하던 조직이 적비단이라는 이름의 조직인데, 이 적비단이 자신들을 학살하고 있답니다.”
적비단이라면 여명회의 졸개 노릇을 하는 폭력 조직이 아니었던가.
설마 그린스킨 소속의 왕자성에게서 적비단이 거론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하였다.
“적비단이 왕자성 헌터를 공격하는 이유가 뭡니까?”
“악행을 일삼는 적비단을 징치하기 위해 정의로운 협객들과 함께 13연맹을 만들었습니다. 적비단이 저를 공격한 이유는 제가 바로 그 13연맹의 수장이기 때문입니다.”
협객이니, 정의니 그런 말은 흘려들었다.
원래부터 중국 폭력 단체들은 자신들을 협객이라 말하고 다녔으니까.
나는 오직 하나, S랭크 헌터인 왕자성이 여명회의 사냥개나 다를 게 없는 적비단과 적대한다는 사실에만 관심을 가졌다.
‘중국의 암흑가에서 적비단에 대항하는 조직이 아직 남아있었단 말인가.’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적비단은 실로 압도적인 세력을 가진 폭력 단체였다.
폭력 단체 중에서는 사실상 세계 제일이라고 칭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아마 이 왕자성이란 인물은 적비단에 대항했다가 죽었겠지.’
이렇게 잘생긴 외모의 S랭크 헌터를, 심지어 그린스킨 소속의 헌터를 내가 못 알아본 것만 봐도 그의 미래는 명약관화하였다.
회귀 전에는 내가 없었을 테니, 적비단에게 결국 죽임을 당했으리라.
‘그들이 적비단의 대적자가 맞다면, 반드시 도와야 한다.’
다른 사람이라면 적비단과 적대하기 싫어서라도 왕자성을 도울 생각을 하지 않았을 거다.
설령 도울 의사가 있더라도 최대한 뜯어낼 것은 뜯어내려고 하겠지.
하지만 나는 달랐다.
적비단을 견제하는 것은 결국 여명회를 견제하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지금쯤 7사도 쪽에서 무공 아카데미를 향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을 것이니, 왕자성을 도움으로써, 여명회 세력을 선제공격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