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왕자성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나는 반드시 그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를 어떻게 도울지, 그 방법이 문제였다.
‘자칫하면 적비단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하고 희생자만 나올 수 있다. 아니, 왕자성 자체가 여명회의 함정일 수 있어.’
여명회는 한 치의 방심도 할 수 없는 상대였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암중모략을 꾸미는 조직답게, 왕자성을 통해 내게 함정을 판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일단 노홍만 교수의 이야기를 듣고 판단하자.’
내가 그 생각을 하는데 마침 강충구가 내게 귓속말을 하였다.
나는 강충구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이며 왕자성을 향해 말하였다.
“왕자성 헌터의 동료를 불렀습니다.”
“제 동료라면…?”
“마침 들어오는군요.”
무거운 발소리를 내며 2m에 근접한 체격의 거한이 걸어왔다.
무공 아카데미에서 이만한 체격의 거한은 몇 명 없었다.
총장실에 들어올 정도의 인물은 단 한 명뿐이었고 말이다.
“노, 노홍만!”
“왕자성. 네놈이 왜 여기에 있지?”
서로 안면이 있는지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 예상했던 일이다.
같은 그린스킨 소속이니 당연히 일면식이 있을 수밖에.
그런데 예상과 달리 둘의 관계라는 게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아니, 좋아 보이기는커녕 원수지간처럼 보였다.
나는 의문을 숨기고 노홍만에게 왕자성의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왕자성 저놈이 너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왔다고?”
“예, 저는 긍정적으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노홍만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하지만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참고로 말하면, 나는 놈을 도울 생각이 없다.”
그 말을 듣자 나는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노홍만이 가지 않는다면 왕자성을 어떻게 도와야 할까?
내가 직접 가는 것은 아무래도 힘들었다.
아무리 암흑가에서의 전쟁이라지만, 중국과 대만, 홍콩 등.
그야말로 거대한 전역에서 벌어지는 전쟁이었다.
당연히 하루 이틀에 끝날 일은 아니었다.
무공 아카데미 일로 워낙에 바빠서 이성은도 만나러 가지 못하는 판국에 안면도 없었던 왕자성을 도우러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노홍만 교수 말고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화영 길드였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화영 길드에는 실로 막강한 전력이 숨어 있었다.
정승호, 정호연, 정소연.
이 세 사람만 해도 S랭크 헌터 이상이었으니.
심지어 정소연의 경우는 무공 아카데미 내부 인사를 제외하면 최초로 권속이 될 인물이었다.
내 권속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무공 경지가 많이 올랐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일로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염치가 없는 일이야.’
물론 내가 부탁을 한다면 화영 길드는 열성적으로 내 부탁을 들어줄 것이다.
화영 길드의 인사들은 나를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로선 이미 여명회의 한국 지부를 정리하는 일로 큰 도움을 받았는데 더 도움받는 건 염치없게 느껴졌다.
‘친위대가 없다는 게 아쉽군. 회귀 전에는 그저 부담스럽게 여겼는데 막상 없으니 이럴 때 곤란하단 말이지.’
뭐,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였다.
무공 아카데미가 발전을 거듭하면 권속도 늘어나게 될 테니까.
‘아! 성연 길드가 있었군.’
순간 머릿속이 밝아졌다.
성연에는 현재 두 명의 S랭크 헌터가 있었다.
브루노 클라크 그리고 아드리안 패튼.
물론 그냥 평범한 S랭크 헌터 두 명으로는 왕자성에게 큰 도움을 주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강병철에게 무공을 배운 두 사람은 평범한 S랭크 헌터가 아니었다.
아마 S랭크 헌터 안에서도 최소 상위권의 실력을 자랑할 것이다.
‘사실상 이럴 때 쓰려고 두 사람에게 무공을 가르친 거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상황에 써먹으려고 강병철을 통해 두 사람을 키웠다.
지금이 딱 고양이 손을 빌려야 할 상황이니 그들을 활용하는 게 좋을 거 같았다.
‘문제는 성연을 어떻게 끌어들일까인데.’
뭐 그 문제는 내가 고민할 게 아니라, 왕자성이 고민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었다.
“저는 외부적인 시선도 있고 해서 도울 수는 없을 거 같습니다.”
“대협! 대협이 돕지 않으면 저희는 다 죽은 목숨입니다! 부디 저희를 위해, 그리고 정의를 위해! 저희에게 도움을 주십시오!”
왕자성은 절규하였다.
유일한 희망이 박한새였다.
그런데 이런 부정적인 답변이라니.
“저는 도울 수 없지만, 여러분을 도울 수 있는 세력은 추천해줄 수 있습니다.”
절규하는 그에게 박한새는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저희를 도울 수 있는 세력이 있단 말씀입니까? 그곳이 어디입니까? 부디 말씀해주십시오!”
“성연 길드입니다.”
박한새는 성연 길드란 곳을 추천해주었다.
‘성연 길드? 그곳은 또 어디지?’
한국의 10대 길드 중 하나라지만, 자국의 길드도 아닌데 왕자성이 알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곳이 어디든 일개 길드가 13연맹에 과연 도움이 될지 의문이었다.
‘물론 S랭크 헌터가 용병으로 와준다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S랭크 헌터 한 명이 더 포함된다고 해서 적비단과의 전쟁을 이길 수는 없었다.
단, 적비단의 공세를 ‘주춤’하게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헌터가 가진 스킬에 따라 전쟁에 변수를 만드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고 말이다.
“성연 길드에는 S랭크 헌터가 두 명 있습니다. 둘 다 미국 출신의 헌터입니다.”
‘S랭크 헌터가 두 명이나 있다고?’
심지어 미국 헌터라고 한다.
솔직히 말하면 박한새가 허언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한 전력을 갖춘 길드를 그가 모르고 있을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움직이자. S랭크 헌터를 두 명이나 용병으로 데려올 수 있다면, 적비단과의 전쟁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
박한새는 정작 성연 길드를 추천해줬으면서 성연 길드를 어떻게 끌어들일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그와 성연 길드는 그리 좋은 관계가 아니라면서 말이다.
‘한국까지 온 이상,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왕자성은 곧바로 성연 길드를 찾아가 S랭크 헌터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참고로 그가 성연 길드의 이세훈 길드장에게 제시한 것은 바로 돈.
그것도 아주 막대한 돈이었다.
“인당 오백 억을 주시겠다고?”
“예, 두 명을 용병으로 지원할 시, 한화로 천억을 지급할 용의가 있다고 합니다.”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생각했던 이 제안은 의외로 긍정적인 답변을 이끌어냈다.
“천억이라…. 실로 큰 투자를 하셨군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인당 천억도 가능하겠습니까?”
“…좋습니다. 단, 파견 기간은 최소 반년입니다.”
왕자성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즉답하였다.
S랭크 헌터 두 명의 지원을 얻을 수만 있다면 이천 억도 아깝지 않았다.
“일단 저 혼자 결정할 수 없으니, 긍정적으로 고민해보겠습니다.”
긍정적으로 고민하겠다고 답변하였지만, 정작 그의 얼굴은 무표정하였다.
하지만 왕자성이 물러난 뒤, 이세훈의 표정이 바뀌었다.
“이천억? 이천억이란 말이지!”
십억, 백억도 아니고 무려 이천 억이었다.
제아무리 10대 길드 중 한 곳의 수장이라 해도 이천 억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무공 수련에만 집중하느라, 사실상 길드로 가져다주는 수익이 0원에 가까운 두 S랭크 헌터로부터 얻는 수입이니 더 값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별로 중국에 가고 싶지 않은데?”
“나 역시 마찬가지요. 합당한 이유가 없으면 나는 길드장의 지시를 따를 생각이 없소.”
정작 당사자들이 그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길드장이 명령을 내리면 그냥 따를 것이지!’
이세훈은 그들의 반응에 속으로 분노하였다.
대우면 대우, 연봉이면 연봉.
뭐 하나 파격적이지 않은 게 없었다.
심지어 무공까지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저런 방자한 태도라니.
“합당한 이유라면 일단 그쪽에서 고액의 계약금을 제시했습니다. 단기간에 수천만 달러를 손에 쥐실 수 있을 겁니다.”
“내가 그깟 돈 몇 푼에 움직일 사람으로 보여? 킥킥!”
수천만 달러를 푼돈 취급할 헌터는 S랭크 헌터밖에 없을 것이다.
‘너무 두 놈에게 유리하게끔 계약을 한 게 실책이다.’
S랭크 헌터와의 첫 계약이라 너무 서투르게 진행하였다.
이세훈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두 사람을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였다.
물론 이게 완전한 포기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강병철 교관이 나선다면 그들도 어쩔 수 없이 나서게 될 거야!’
길드장으로서 일개 훈련 교관에게 의존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 훈련 교관은 그냥 훈련 교관이 아니었다.
무려 ‘무공’을 가르칠 수 있는 귀한 인재였다.
“어떻소, 강병철 교관. 두 사람을 설득할 수 있겠소?”
“한번 해보겠습니다.”
귀한 인재인 강병철은 이세훈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자신만만하게 두 S랭크 헌터를 설득해보겠다고 말한 것이었다.
“왜 갑자기 선택을 바꾼 거지?”
“오크리프의 촌놈 주제에 요즘 나에게 관심이 많군!”
“더러운 박쥐 새끼. 딴소리하지 말고 내 질문에나 답해라.”
브루노 클라크의 말에 아드리안은 어깨를 으쓱하였다.
“내가 중국에 가는 이유가 그토록 궁금한가 봐?”
“서로 약속했을 텐데. 길드장의 요구는 최대한 묵살하기로.”
두 사람은 무공을 배우기 위해 성연 길드에 가입하였지만, 그렇다고 성연 길드의 손에 놀아날 생각은 없었다.
고작 A랭크 헌터, 심지어 무공도 배우지 않은 A랭크 헌터의 명령을 듣는 건 그들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그래서 성연 길드 내부의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힘을 합치기로 약조하였다.
둘 다 성연 길드를 이용해 먹고 버릴 생각만 하고 있던 것이다.
“길드장의 말이라면 따를 이유가 없지. 하지만 나의 사부이신 미스터 강의 명령이잖아? 키킥!”
“그새 미스터 강의 충실한 개가 된 것이냐?”
“개? 제자라는 말을 두고 개가 왜 나오는 거야?”
아드리안은 피식 웃고는 자신이 중국으로 가야 하는 이유를 보다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뭐 사실 사부라서라기보다는 보법 때문에 가는 거지.”
강병철이 두 헌터를 통제하는 방법은 간단하였다.
자신의 말에 잘 따르는 자에게 무공을 자세하게 가르쳐주고 제대로 따르지 않는 자에겐 건성으로 가르쳐주는 것.
결국, 더 많은 무공, 더 자세한 가르침을 얻고자 한다면 두 헌터는 강병철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리고 궁금하지 않아? 우리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브루노 클라크는 부정할 수 없었는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역시 무공을 익히고 자신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궁금하던 참이었다.
‘분명 강해지긴 했는데,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모르겠단 말이야.’
단전을 만들 때, 이미 강해졌음을 체감하였다.
그의 반사신경과 동체 시력이 빨라졌고 무엇보다 단전에 마력을 집중하여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거대한 마력, 아니 내공을 손에 쥐게 되었다.
심지어 내공의 효율성까지 증대하여 이전보다 더 작은 내공으로 보다 강력한 스킬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차이나 마피아를 때려잡아봤자 큰 체감을 느끼긴 어렵겠지만, 재미는 있을 거야. 킥킥!”
아드리안은 적비단을 우습게 여겼다.
일개 폭력 조직이 강해봤자 얼마나 강하겠냐는 생각에서 비롯된 오만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무력이라면 이 같은 생각이 마냥 오만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무공을 배운 그는 이전과 차원이 다른 무력을 가지게 되었으니까.